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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의 자리를 놓고 벌어진 두 가지 테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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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는 더 나아가 황실 내부 상황을 고찰해야지만 비로소 효종(孝宗)이 결국 황위를 잇게 된 진상을 분명하게 밝힐 수 있다. 소흥(紹興) 30년(1160), 고종(高宗)은 효종을 황자로 세우기로 결정할 때 집정 대신들에게 말했다.



"이 일은 짐의 뜻에서 나온 것이지, 신하들의 건의 때문은 아니다.[此事出于朕意, 非因臣下建明]"



이 말은 진심어린 것이다. 왜냐하면 결국 누구를 황자로 세울지에 관한 최종 결정권은 황제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실 내부에서 고종의 최후 선택은 그 일과 관계 깊은 주변 인사들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가운데 핵심 인물 셋이 있다. 첫번째는 장 첩여(張婕妤)로 그녀가 전력을 다해 효종을 지지했다는 사실은 더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두번째는 헌성황후(憲聖皇后, 吳皇后)로 그녀는 오랜 시간 조백구(趙伯玖)가 황위를 계승하게끔 노력해왔다. 주밀(周密)의 <제동야어(齊東野語)> 11권 '고종이 태자를 세우다[高宗立儲]' 조목(條目) 기록이다.



효종과 은평군왕(恩平郡王) 거(據, 伯玖가 개명한 이름)는 함께 궁중에서 양육되었다. 효종은 영특하고 조숙하여 [당시 재상이었던] 진회(秦檜)가 그를 꺼려했다. 헌성황후 역시 조거를 [황위 계승 후보의] 위주로 삼았다.



마지막 구절이 특히 중요하다. 이는 남송대 이래의 전술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신뢰도가 매우 높다. 세번째 인물은 소흥 12년(1142), [정강의 변 당시 끌려갔다가] 북방에서 귀환한 현인태후(顯仁太后, 韋氏), 즉 고종의 생모였다.

고종은 효종을 황자로 세울 때 재상 탕사퇴(湯思退)에게 이렇게 말한다.



"짐이 오랫동안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 전적[載籍]에 실린 제반 내용을 깊이 숙고해보니, [후궁을] 왕후와 동렬에 두고 [서자를] 적자에 필적하게 하는 것과 정부와 나라를 둘로 나누는 것이 혼란의 근본임을 알고 있다. 짐이 어찌 그 점을 모르겠는가? 다만, 현인황후께서 아직 그렇게 하고자 하시질 않았기에 지금까지 늦춰왔을 뿐이다."



첫번째 구절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항은 소흥 8년(1138)에 나왔던 왕서(王庶)의 발언이 그래도 고종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가장 마지막 구절은 그가 소흥 30년까지 미루다가 비로소 정식으로 태자를 책립했던 수수께끼를 풀어준다. 고종은 어머니의 소원을 져버리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가 죽은 이후[소흥 29년]에야 자신의 결정을 공개할 수 있었다. 현인태후는 어째서 '그렇게 하고자 하지 않은' 것일까? 탕사퇴의 대답에 그 해답이 들어 있다.



"폐하께서는 나이가 한창이시고 하늘이 살펴주실 터이니, 필시 아들을 낳으실 것입니다. 이는 인심(人心)과 관계된 일로서 [아들이] 없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陛下春秋鼎盛, 上天鑑臨, 必生聖子. 爲此以系人心, 不可無也.]"



현인태후는 시종일관 고종이 아들을 다시 낳으리라는 희망을 버리려 하지 않은터라, 방계를 들여와 제위를 잇도록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상의 세 사람 가운데 효종이 태자로 지명되는데 도움을 준 사람은 양어머니인 장 첩여 뿐이었지만, 그녀는 이미 소흥 12년에 세상을 떠난 상태였다. 나머지 둘은 모두 부정적 요인으로 효종이 소흥 12년 이후 고립무원의 처지로 전락했으리란 것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현인태후는 고종이 제위를 방계에게 넘겨주는 것에 원칙상 반대했기에 효종과 백구 사이에서 어느 한쪽을 더 편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 시간을 지연시키는 건 [헌성황후에 의해 양육되고, 지원을 받은] 백구에게 유리했다. 왜냐하면 효종이 연상인데다, 궁중에 들어온 시기도 1~2년 빨라서 본래는 효종이 백구보다 유리한 지위를 확보해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헌성황후의 지위는 나중에 높아지는데, 장 첩여 사후 이듬해에 정식으로 황후에 책봉되어 그녀의 영향력은 갈수록 커졌다. 소흥 15년(1145) 백구가 왕으로 봉해지자, 백구는 효종과 완전히 동등한 지위를 차지했으므로 헌성황후의 역할을 낮게 평가할 수 없다. 고종이 말한대로 효종에게 제위를 잇게 한 것은 전적으로 '짐의 뜻에서 나온 것'이었다. 주희 역시 이 일을 논하면서 '모두 고종이 스스로 주장'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효종에 대한 고종의 인식 과정이 어떠했는지 추적해야 한다. <계년요록(繫年要錄)> 89권 소흥 5년(1135) 5월 신사일 조목을 보자.



주상은 조정(趙鼎) ・장준(張浚) ・맹유(孟庾) ・심여구(沈與求)에게 일찍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이 아들[孝宗]은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서 궁중에서 마치 신인(神人)처럼 엄숙하다. 짐이 직접 그를 가르쳐보니, 책을 읽음에 아주 잘 외우는 능력을 지녔다.[上嘗以語鼎浚庾與求曰, 此子天資特異, 在宮中儼如神人. 朕親自敎之, 讀書性極强記.]'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소흥 5년은 백구가 입궁한 지 1~2년이 지나 장 첩여와 헌성이 바야흐로 격렬한 경쟁을 시작한 시기다. 쌍방 모두 전력을 다해 자신의 양자가 고종의 총애를 받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서 궁중에서 마치 신인처럼 엄숙하다'는 말은 필시 장 첩여 및 주변 인물들이 일부러 퍼뜨린 말로 고종은 깊은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짐이 직접 그를 가르쳐보니, 책을 읽음에 아주 잘 외우는 능력을 지녔다'는 발언은 자못 의심스럽다. <주자어류(朱子語類)> 127권 본조(本朝) 1 효종조(孝宗朝)엔 이런 기록이 보인다.



효종은 어렸을 때 지극히 둔했다. 하루는 고종이 나와 조정 신하들에게 '밤에 잠을 못 이뤘다'고 말했다. 어떤 이가 '왜 그러셨습니까?'라고 묻자, '어린아이가 책읽는 것을 보니, 2~3백번 반복해도 외우질 못해서 매우 걱정스럽다'고 했다. 어떤 이가 나와서 '제왕의 배움이란 흥망치란만 알면 될 뿐, 처음부터 암기하고 외우는 데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帝王之學, 只要知興亡治亂, 初不在記誦.]'라고 말했다. 주상의 마음이 그제서야 조금 풀어졌다.



주희의 기록과 고종이 한 말은 서로 충돌하는 만큼 둘 중의 하나는 거짓임이 틀림없다. 앞서 인용한 효종의 유년기 상황을 보건대 효종은 분명 '강직하고 어눌한' 유형에 속하여 '지극히 둔하다'는 평가에 부합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주 잘 외우는 능력을 지녔다'는 설은 어디서 나왔던 것일까? 첫째, '이 아들은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다'는 표현은 원래 <시정기(時政紀)>에 나온다. 이 글은 정부 문서로 사후에 수식이 가해지지 않았는지 의심스럽다. 둘째, 어쩌면 장 첩여가 효종을 충분히 교육해놓고, 효종으로 하여금 고종의 면전에서 뛰어난 연기를 발휘하도록 했을 수도 있다. 주희의 기록은 고종이 진상을 발견한 뒤의 반응인 듯 하다. 하지만 이런 추측은 현재 입증할 방도가 없으므로 다만 참고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여하튼 <주자어류>에 보존된 '어렸을 때 지극히 둔했다'는 기록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우리는 고종이 효종에 대해 실망하고 낙담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효종의 '지극히 둔했다'와 백구의 '태어날 때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웠다'는 표현은 강렬한 대조를 이루는데, 고종이 장기간 결정을 주저한 것도 이와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고종은 어째서 효종을 선택했을까? 효종과 백구의 성격이 달랐다는 점이 결정적 요인이었다. 장단의(張端義)는 증거를 하나 제공해준다. <귀이집(貴耳集)> 상권에 이런 기록이 있다.



효종이 잠저(潛邸)에서 은평군왕과 함께 있었는데, 고종은 <난정서(蘭亭序)> 두 편을 써서 두 왕[효종과 백구]에게 하사하고, 그 글자체대로 5백번을 쓰도록 했다. 효종은 7백번 넘게 썼지만, 은평군왕은 끝내 다하지 못했다. 고종은 두 왕에게 각각 궁녀 10인을 하사했는데, 보안군왕(普安郡王, 孝宗)이 예의상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자문했다. 사호(史浩)는 '서모(庶母)의 예로써 그들을 대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두 왕이 궁녀를 어떻게 대우했는지 고종이 묻자, 보안군왕은 예로써 대우했고, 은평군왕은 버릇없이 굴었다고 말했다. 대계(大計)는 이런 일로 결정되었다.



이는 분명 태자 자리를 놓고 시행한 두 차례 시험에 해당된다. 우리는 다음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소흥 2년(1132), 고종이 효종과 백호(伯虎) 중의 한 명을 선택하여 궁에서 기르기로 했을 때 가장 마지막에 '다시 자세히 관찰했고', 그 결과 [고양이의 방해에도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았던] 효종이 남고 백호가 떠나갔다. 위 인용문의 두 차례 시험도 같은 성격을 띠고, 그 결과 효종은 합격이었고, 백구는 낙제였다. 하지만 위의 두 차례 시험은 동일한 시기에 치러진 것이 아니었다. <난정서>를 5백번 쓰게 했던 것이 먼저 일어난 일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비교적 초급 단계의 서법(書法) 훈련이기 때문이다. 궁녀를 하사한 것은 두 사람이 약관을 넘겼을 무렵에 일어난 사건이었을 것이다.

두번째 일과 관련하여 주밀은 <제동야어> 11권 '고종이 태자를 세우다' 조목에서 이렇게 기록한다.

 

일찍이 각각에게 궁녀 10명을 하사했다. 승상 사호는 당시 보안부 교수로서 곧바로 보안군왕을 위해 말을 해주었다. 주상이 왕을 시험하는 것이니, 마땅히 조심스럽게 그들을 받들어야 한다고 말이다. 보안군왕 역시 동의했다. 며칠이 지나자 과연 모두 들어오라는 조칙이 내려졌다. 은평은 궁녀 10명을 모두 범했지만, 보안은 손끝도 대지 않았다.


 
위의 조목은 사호가 '보안부 교수'였다고 언급하므로, 궁녀가 하사된 시간을 대략 추론할 수 있다.

<송사(宋史)> 396권 사호전(史浩傳)을 보자.



소흥 14년(1144), 진사에 합격하여 소흥 여요현(餘姚縣)의 현위(縣尉)로 발령받았고, 온주(溫州) 교수를 역임했는데 군수 장구성(張九成)이 그를 중히 여겼다. 임기가 끝나자 태학정(太學正)으로 제수되었으며, 국자박사(國子博士)로 승진했다. 정기적으로 황제를 알현할 때 '보안과 은평 두 왕 가운데 한 명을 택하여 천하의 소망에 부합해야 한다'고 진언했다. 이에 고종이 끄덕였다. [중략] 비서성교서랑(秘書省校書郞) 겸 이왕부(二王府) 교수로 제수되었다.



경력을 보면 사호는 진사 합격 후 적게는 7년에서 많게는 10년이 지나 비로소 이왕부 교수가 되었다. 또한 <송사> 신왕전(信王傳)에 의거하면 백구가 소흥 22년(1152) 생부상을 당했을 때 나이가 스물셋이었고, 상기(喪期)가 끝났을 때는 소흥 24년(1154) 11월 정묘일이 된다. 송대의 '삼년상'은 통상 27개월로 계산되므로 그가 복상을 시작한 시기는 필시 소흥 22년 10월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고종이 궁녀를 하사한 때는 소흥 22년 8월 이전이거나 소흥 24년 11월 이후였겠지만, 지금으로선 결정할 수 없다. 다만 단언할 수 있는 점은 그것이 고종이 최종 결정을 내리기 전에 가진 마지막 시험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사호는 고종을 알현할 때 '보안과 은평 두 왕 가운데 한 명을 택해야 한다'고 특별히 진언했을 것이다. 효종은 <난정서>를 7백번 넘게 베껴 썼고, 게다가 하사된 궁녀를 '예로써 대우했다.'

이런 고도의 자율적 행위는 효종이 고종으로부터 신임을 얻게 된 궁극적 원인이었을 것이다. 장단의는 '대계는 이런 일로 결정되었다고' 말했고, 주밀도 '주상의 뜻이 마침내 결정되었다'고 말하는데, 이들의 판단은 실제 정황에 아주 잘 들어맞는다. 고종은 대체 언제 효종에게 황위를 물려주겠다고 결심했을까? 아주 귀중한 사료 하나가 이 문제에 해답을 제시해준다. <계년요록> 200권 소흥 32년(1162) 6월 병자일 조목의 소주(小注)에선 이렇게 말하고 있다.



소흥 30년, [효종이] 황자로 세워졌다. 주상은 '짐의 뜻이 평소 결정되었는데, 벌써 9년이 되었다'고 말했다.



소흥 30년에서 9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소흥 22년이다. 곧 궁녀를 하사한 시기였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지나치게 확신해서는 안 될 것이다. 고종이 설사 인선(人選)을 이미 결정했었다 하더라도, 소흥 25년이나 혹은 조금 더 늦은 시기에 '다시 자세히 관찰했을' 가능성은 충분이 있다. 다만 '9년'은 정확한 숫자로 그저 대략 말한 숫자와는 다르다. 그러므로 고종의 말은 진지하게 간주되어야 한다. 어쨌든 이처럼 중대한 결정을 어떤 구체적 고려에서 했든지 간에 소흥 22년(1152)이 효종 개인의 생명사와 남송 황권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의미가 있다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뒤집어보면 고종의 말은 우리에게 다음 내용을 알려준다. 효종이 입궁 이래 비록 조정 및 사회의 적지 않은 사람이 그가 이미 '준(準)황자' 신분임을 인정했다고 하더라도, 그의 직위는 20여년간 시종일관 흔들렸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당시 정세를 놓고 보자면, 고종은 속으로 그런 결정을 내리긴 했지만 현인태후가 서거하기 전까지 그는 감히 자신의 속마음을 입밖으로 낼 수 없었다. 그래서 효종은 길게는 30여년 동안 줄곧 기대와 좌절감이 교차하는 초조함 속에서 살아야 했다. 소흥 12년, 장 첩여가 사망한 뒤에 효종은 궁중에서 고립무원 상태에 놓여 있었다. 소흥 25년, 백구가 왕으로 봉해면서 효종의 지위는 아슬아슬해졌고, 한 가닥 희망은 전적으로 고종 1인의 한순간 생각에 달려 있었다. 어떻게 자신을 만들어나가야 고종의 인정을 받을 수 있을지 여부가 효종의 중심 과제였다. 효종은 특유의 참을성 있는 성격과 강한 의지, 깊이 침잠하는 정신에 의지하여 비로소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계년요록> 184권 소흥 30년(1160) 2월 갑자일 조목이다.



그래서 보안군왕은 궁에서 길러진 이래 여기에 이르기까지 이미 30년이었다. 왕은 타고난 자질이 영명 ・활달하고, 도량이 커서 주위 사람 중 그가 기뻐하거나 화난 기색을 본 적이 없었다. 조정에 가서 반열에 들 때, 나아가고 멈춤에 모두 일정한 법도가 있었다. 말에 탔을 때에는 오만하게 내려다본 적이 없었고, 평소 수레를 탈 때에도 검약했으며, 매번 경전과 사서로 유유자적했다. 일찍이 부료(府僚)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목소리나 낯빛과 관련된 일에서 경전의 의도를 소홀히 한 적이 없었고, 보물과 진귀한 사물에 대해 마음으로 좋아하지 않았으며, 또한 그런 것들을 축적한 일이 없었다.' 말 타고 활 쏘기나 글 짓거나 글씨 쓰는 일이 모두 타인을 뛰어넘었다. 주상이 근신(近臣)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경들도 보안을 보았는가? 근래 골상(骨相)이 일변하여 보통 사람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는 찬양의 언사이긴 하지만, 사실의 핵심을 함축하고 있다. 효종이 30년에 걸친 '마음을 격동시키더라도 본성을 참는다[動心忍性]'는 과정이 여기서 분명한 윤곽을 드러낸다. 인용문 말미에 나오는 고종의 발언, '골상이 일변하여 보통 사람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표현은 자신이 황자로 뽑히게 된 것을 알게 된 효종의 정신 상태를 보여준다.

- by 여영시(余英時) 著 <주희의 역사세계> 12장 황권(皇權)과 황극(皇極)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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