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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그런 거스름돈 어떻게 써먹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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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넌은 선(善)과 악(惡)에 대한 절대적인 구분에 기초하여 국제 정치를 바라보고, 정치적 현실의 한계를 무시하고 추상적인 도덕주의적 원칙을 적용시키려는 시도를 '도덕주의(Moralism)'라고 비판한다. 케넌은 이 도덕주의가 미국 외교의 뿌리깊은 전통의 하나로 이 전통은 미국이 [1898년 이후] 고립주의에서 벗어나 국제 정치 무대에 등장하게 되었을 때 부정적인 결과들을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국가의 생존을 위해 폭력의 행사가 정당화될 수 있는 현실에서 오히려 폭력 행사 그 자체를 완전히 제거하려는 도덕적 이상을 실현해 나가는 과정에서 [강대국들간 권력 균형 및 이해와 저촉되어] 오히려 더 많은 폭력이 행사됨으로써 인류는 더 많은 고통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도덕주의가 미국인의 뿌리깊은 법리주의적 사고와 결합될 때 더욱 큰 문제점을 낳게 된다고 그는 주장했다.

케넌은 국제 정치를 국내 정치와 동일시하여 국내에서나 가능한 사법적 판단을 국제 정치에 그대로 적용시키려는 시도를 '법리주의(leagalism)'라고 비판했다. 미국은 13개의 주(州)들이 상호간의 법적인 합의를 통하여 유럽 대륙과 같은 무정부적 국제 질서의 형성을 지양하고, 단일의 연방을 건설하여 평화를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미국은 자국의 연방 형성 과정에서의 경험이 국제 정치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고 보고, 국제 정치 현실에서의 문제점들도 국가간 조약이나 법적인 합의를 통하여 해결할 수 있다고 간주했다. 그 대표적인 예로서 케넌은 1928년의 파리 부전조약[켈로그-브리앙 조약]을 들고 있다. 국가간의 조약 체결과 합의를 통하여 전쟁을 국제 정치의 현실에서 제거하려는 시도는 일본의 만주 침략과 무솔리니의 에티오피아 침공, 히틀러의 등장으로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결국, 법리주의는 법적 합의를 집행할 수 있는 마땅한 중앙 권력체가 존재하지 않는 국제 정치의 현실에서 국가간에 존재하는 이해관계의 충돌의 상존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형식적이고도 법적인 기준을 통하여 문제의 해결을 시도하려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 이러한 법리주의적 사고는 도덕주의와 결합될 경우 국제 정치에서 한층 더 위험한 결과를 가져온다고 케넌은 주장한다. 국제 정치에서 사법적 판단을 적용시키려는 측은 법을 위반한 국가에 대해서 분노함과 동시에 도덕적 우월감을 만끽할 것이다. 만약, 이러한 분노가 군사적 대결의 양상으로 발전하게 된다면, 상대국으로부터 무조건 항복을 받아내어 그 국가를 완전히 굴복시킬 때까지 전쟁 수행을 지속할 수밖에 없게 된다. 대표적인 사례로 우리는 2차대전 당시 미국이 독일과 일본에 대해 내걸었던 무조건 항복 조건을 들 수 있다.

설령 전쟁에서 군사적으로 승리한다고 하더라도, 전쟁의 목적이 상대국 국민들의 태도와 전통을 바꾸고, 기존 정치 체제의 성격을 완전히 변화시키기 위한 '도덕적'이고도 '이념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목적들은 결코 군사적 수단을 통해서 단기간내에 성사될 수 없다는 점이 명백하다. 이처럼 전쟁을 통하여 성취될 수 없는 도덕적 이상을 추구한 과정에서 인류 문명엔 또다른 파탄이 초래되는 것이다. 따라서 전쟁의 목적은 '실질적'이고도 '제한적'이어야 하며, 우리는 그 목표에 대한 근사치를 중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케넌은 [태프트의 중재조약이나 윌슨의 국제연맹 구상, 루스벨트의 신탁통치론 같은] 비현실적인 도덕주의와 법리주의의 한계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무정부적 국제 정치 현실이 만들어내는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서는 국가간의 '세력 균형'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포스트 나폴레옹 시대를 맞아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에서 소집된 범유럽 국제회의 석상의 각국 전권
            보수 반동과 신성동맹의 외피를 두른 강대국간 유럽 균형 질서의 구축은 협조 체제의 기원이 되었다.




그는 특정 시점에서 국가간의 힘의 분포 상태는 불균등성에 의해 특징지어지고, 국제 정치는 주요 강대국들 사이의 힘이 균형을 유지할 때 안정적이라고 본다. 물론, 특정 시점에서의 강대국간 세력 균형의 성립에 의해 국제 정치에 존재하는 불확실성이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균형 상태가 파괴되었을 때 발생하는 힘의 공백 상태는 불안정한 세력 균형보다도 훨씬 더 불확실성으로 특징지어진다는 것이다. 국제 정치에서 평화를 유지하고, 폭력의 행사를 완화시킬 수 있는 주된 임무는 외교에 있다고 케넌은 주장한다. 외교는 국제 정치 현실을 개혁하려는 것이 아니다. 또한, 외교는 인간의 본성을 변화시킬 수도 없다. 따라서 외교는 '무정부적 국제 정치 질서에 내재적인 한계'를 뚜렷하게 인식하고, 그 범위 내에서 '폭력의 행사를 완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 나가는 것이다.

케넌은 2차대전 이후 현대적인 군사력을 양성할 수 있는 산업 시설 기반과 고도로 훈련된 기술 인력을 갖추고 있는 국가는 전세계적으로 다섯 곳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엔 미국 ・영국 ・일본 ・서유럽 제국 ・소련이 포함된다. 케넌에 의하면 당시 중국은 인구 문제와 취약한 산업 기반 ・원시적 농업 조건 ・1세기간의 정치적 불안정 등 때문에 향후 상당한 기간 동안 군사적 강대국이 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그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케넌의 봉쇄정책의 핵심은 소련이 이 국가들 가운데 어느 것도 차지하지 못하도록 서유럽과 일본을 미국의 동맹권으로 흡수시킨 다음, 이러한 전략적 구도 하에서 미국이 인내심을 갖고 봉쇄를 추구하면 정통성이 결여된데다, 체제 생존의 여부마저 검증받지 못한 소련은 미국의 압력을 견디지 못한 채 내부 모순이 분출되어 붕괴하리라는 가정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5대 중심국가론을 통하여 케넌은 중국이 아닌 일본을 동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국가라는 전후 미국 외교 전략의 전제를 확립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일본의 부흥을 통하여 동아시아의 세력 균형을 회복해야 한다는 케넌의 주장엔 전후 이 지역의 세력 균형이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에 처해 있다는 판단이 깔려 있었다. 케넌은 이 불안정의 원인을 동아시아의 역사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는 외교관 존 V.A. 맥머레이(John V.A. MacMurray, 1925~29년 주중 공사 재임)가 1935년 작성한 예언적 각서를 원용하고 있다. 맥머레이는 미국이 아시아에서 일본을 완전히 패배시키더라도, 아시아가 떠안고 있는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패배는 오히려 아시아에서 소련의 영향력 증가를 초래해 미국의 극동 정책 수립을 더욱 더 어렵게 만들 것이라며 경고했다.

2차대전의 결과로 일본 제국주의가 아시아 대륙으로부터 완전히 패퇴한 후 그와 비례해 만주와 한반도에선 소련의 영향력이 증대됨으로써 미국은 이 지역에서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는데 일본 제국이 과거에 해왔던 역할을 떠맡지 않으면 안되었다고 케넌은 주장했다. 따라서 동아시아에서 대소(對蘇) 봉쇄정책을 추구해가는 과정에서 미국의 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해선 일본의 경제를 활성화시키고, 민주화된 일본을 미국의 확고한 동맹국으로 만드는 것이 긴요하다고 보았다. 또한, 당시 미국 내에선 야당인 공화당을 중심으로 중국의 장개석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요구가 거세지고 있었기 때문에 케넌의 일본 중시 정책 구상에는 중국 문제가 자칫 미국의 아시아 정책에 대한 국내 합의점을 도출하는데 장애가 되지 않도록 해야 된다는 고도의 전략적 판단도 깔려 있었다.

한편, 동아시아에서 중국과 마찬가지로 5대 중심국가에 속하지 않는 한반도에 대해서 케넌은 한반도에 반드시 소련에 적대적인 체제가 들어설 필요는 없다고 보았다. 그는 일본으로부터 이제 막 해방된 한국이 명목상으로는 독립국의 지위를 유지해야 하지만, 소련의 영향권 아래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1947년 9월, 미소 공동위원회가 전격 무산되고 난 후에 국무성 정책 기획실장이었던 케넌은 미국은 재정적이고 군사적인 손실을 줄이기 위해서 남한에서 가능한 한 빨리 빠져나오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그는 미국이 한국을 버리고 도망쳐 나오는 듯한 인상을 다른 국가들에게 줄 경우 미국의 위신은 많은 손상을 입을 것이기 때문에 미국이 품위있게 한국에서 철수하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고 보고, 한국 신탁통치 문제의 유엔 이관에 적극 찬성했다.




           포츠머스 강화의 중재자 테디 루스벨트를 묘사한 삽화, 이 공적으로 그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게 된다.
           극동의 세력 균형이란 전략적 관점에서 대일 후견인이라 자처하면서도 러일간 상호 견제를 추구했다.   




실제로 국무성이 자신에게 한국 문제에 관해 정식으로 보고서를 작성해 줄 것을 요청했을 때 케넌은 이상의 주장을 간단한 비망록으로 제출하는데 그쳤으며, 정책 기획실 명의로 된 한국 문제의 보고서조차 쓰기를 거부했다. 결국, 케넌은 미국이 군사적으로나 재정적으로 확고하게 한국의 독립을 보장해줄 수 있는 조치를 취할 수 없다면, 미국의 위신을 손상시키지 않는 방식을 선택해서 일단 한국에서 철수해야 하며, 그 이후의 한국 정책은 사태의 추이를 봐서 결정할 문제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일본 제국주의의 몰락 후 아시아에서 발생한 권력의 진공 상태를 메우고 들어온 것은 중국이 아니라 소련이었다는 사실을 케넌은 지적했다. 일본이 패전의 늪에서 당분간 재부상할 가능성은 없고, 중국이 공산화된 이후 한반도 전체는 소련의 잠정적인 영향권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던 것이다.

케넌이 한반도가 실질적으로는 소련의 영향권으로 들어가면서 명목상의 독립을 유지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일본의 국력이 회복되었을 때 일본이 한반도에서 영향력을 다시 행사하는 것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데에 있었다. 케넌의 주장은 2차대전 후 일본이 여전히 한국에 영향력을 행사했으면, 한반도에서 미국이 직접 소련에 대항하는 부담을 떠맡지 않아도 되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전략적 발상이지만, 미국의 대외정책이 얼마나 철저하게 '국가 이익'이란 관점에서 입안되는지를 보여준다. 1947년 11월에 작성된 정세 보고서인 PPS/13에서 케넌은 한반도에서는 더 이상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발전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없고, 앞으로 한국에서의 정치적 삶은 미성숙 ・편협함과 폭력에 의해 지배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미국은 한국인들로부터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는데 필요한 어떠한 도움도 기대할 수 없다고 간주했다. 결국, 한반도는 미국에게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 아니기 때문에 미국의 중요한 목적은 미국의 위신을 크게 손상시키지 않는 선에서 한반도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라는 이전의 주장을 되풀이했다. 여기에 덧붙여 그는 미국이 한반도 전역에 대한 소련 영향력의 팽창을 인정하면서 한반도의 배후지인 만주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완전히 넌센스(Nonsense)라고 주장하면서 장개석에 대한 계속적인 지원을 요구한 미국 내의 일부 세력[중국 상실론을 주장하게 될 공화당 강경파 등]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했다. 케넌에게 만주와 한반도가 중요성을 갖는다면, 그것은 오로지 일본의 경제적 부흥을 뒷받침하기 위한 원자재 공급처와 시장으로서였다.

전후 동아시아에선 일본의 몰락과 중국의 국공내전으로 소련의 세력이 급격히 팽창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결과, 미국은 이 지역에서 제정 러시아 및 소련에 대항하여 전통적으로 세력 균형을 유지해왔던 일본과 중국을 대신하여 현지의 안정을 도모하는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 그러나, 미국이 중국 내전에 직접 개입한다는 것은 미국의 국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고, 한국은 미국에게 전략적 가치가 없다고 케넌은 판단했다. 따라서 그는 5대 중심국가론에 기초하여 일본을 경제적으로 재부흥시켜 이 지역의 세력 균형을 회복하고, 소련의 팽창에 대응하고자 했다. 이처럼 케넌은 미국이 과거처럼 '문호 개방(Open Door)'이나 '중국의 영토 보존'이라는 애매모호하고도 비현실적인 정책적 입장에서 벗어나 철저하게 군사 ・경제적인 측면을 중심으로 동아시아를 바라 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 By 김영수 著 <동아시아와 케난(Kennan)의 딜레마>에서 발췌




            쿨리지 행정부에서 '최고의 중국통(通)'이라 지칭되며 공사로 부임한 국무성 차관보 존 V.A. 맥머레이          
            미일전쟁 발발과 볼셰비즘의 확산을 경고했던 그의 선견지명적 각서는 캐넌으로부터 절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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