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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에바 에스파냐 체류 당시 훔볼트의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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훔볼트 일행 3명과 20 상자의 화물을 실은 오르에 호가 과야킬(Guayaquil) 항구를 출범한 것은 1803년 2월 17일 오후 3시의 일이었다. 배는 해안에서 1000km 정도 떨어진 먼 바다 쪽으로 곧장 아카풀코(Acapulco)를 향해서 나아갔다. 앞절에서 인용한 훔볼트의 편지에 나오는 해상의 강풍은 3월 10일부터 21일의 사흘간 있었던 것이다. 오르에 호는 도중의 어디에도 기항하지 않고 3월 22일 아카풀코에 도착했다. 오르헤 호가 더듬어 찾은 루트 가까이에는 다윈의 <비글호 항해기>나 <종(種)의 기원>으로 일약 유명해지게 될 갈라파고스 제도가 있다. 과학적으로 매우 흥미있는 이 섬들을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던 훔볼트는 전용 조사선이 아닌 상선(商船)의 불편함을 탄식하고 있다. 그것은 또 정부가 파견한 탐험대에 비해서 모든 비용을 자신이 부담해야 하는 사적인 탐험가의 탄식이기도 했다.

아카풀코에 도착한 후 훔볼트는 즉시 멕시코 시티에 있는 부왕(副王) 호세 데 이투리가라이(José de Iturrigaray)에게 편지로 누에바 에스파냐(Nueva Espana) 왕국의 여행 허가를 요청했다. 이에 대한 이투리가라이의 회답은 '당신에게 유용한 모든 지원을 하려고 생각합니다. 나의 지배에 속한 지방에선 어디서든 나의 명령이 당신을 호위할 것입니다. 그곳에서 바라는 통행 허가증과 그외의 필요한 서류를 보냅니다.[1803년 4월 15일자]'라는 호의가 넘치는 것이었다. 스페인 국왕의 여행 허가증을 휴대한 훔볼트는 스페인령 아메리카에서 가는 곳마다 환대를 받았지만, 멕시코 만큼 관용으로 그의 조사 여행을 승낙한 데는 없었다. 아카풀코를 3월 29일에 출발한 훔볼트 일행은 측기류와 그때까지 수집해왔던 자료[동식물과 암석 표본 등]를 운반하기 위하여 21마리의 노새를 이끌고 멕시코 시티로 향했다.

멕시코 시티에 도착한 것은 4월 12일이었다. 훔볼트는 이동 루트를 기록하고, 많은 지점에서 해발 고도를 측정했다. 똑같은 일이 멕시코 시티로부터 베라크루스(Veracruz)까지의 이동에서도 반복되었다. 이리하여 태평양 연안에서 멕시코 만(灣)까지 측량에 기초한 멕시코의 지형 단면도가 비로소 그려졌다. 아카풀코에서 멕시코 시티에 이르는 여정 도중에 훔볼트 일행은 광산 도시인 탁스코(Taxco)를 방문했다. 탁스코는 18세기의 멕시코를 대표하는 은(銀) 광산이 있었던 곳이다. 독일에서 광산 감독관 경험이 있는 훔볼트는 여행 일지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탁스코 광산은 이 20~25년 사이에 과거의 성황을 잃고 말았다. 이전에는 대규모 광맥이 존재하여 수개월 사이에 약 8~15만 페소(Peso)의 수입을 얻을 수 있었다... 현재 탁스코 광구에서 산출되는 은의 양은 주위의 광산을 합해도 연간 약 10~12톤 정도이다. 탁스코 광산의 최고 전성기는 1752년부터 1761년 경이었는데, 한 푼도 없이 탁스코에 온 프랑스인 호세 데 라 보르다(José de La Borda)가 풍부한 광맥을 발견한 덕에 대단히 많은 재산을 축적하고 있었다. 당시의 탁스코 은 광산은 그곳에서만 연간 약 37톤 이상의 생산량을 자랑했다고 한다. 라 보르다는 놀라울 정도로 도량이 컸던 인물로 산타 프리스카(Santa Prisca) 성당의 건설에 40만 페소라는 거액의 자금을 쏟아 넣었다."




           아카풀코 전경, 독립 이전까지 멕시코와 필리핀 사이를 왕래한 태평양 횡단 갈레온 선단의 출항지였다. 
           누에바 에스파냐의 서쪽 관문이었던 이곳은 1940년대부터 관광업 육성에 따라 휴양지로 각광받았다.   


             프랑스인 기사 라 보르다의 스폰을 받아 1758년에 준공된 탁스코의 산타 프리스카(Santa Prisca) 성당
             바로크 양식의 전형을 대변한 이 성당의 종탑(鐘塔)은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최고층 건축물이었다.




1803년 4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몇 차례 국내 여행을 제외하면 훔볼트 일행은 9개월 이상을 주로 멕시코 시티에서 체재했다. 누에바 그라나다(Nueva Granada) 왕국의 수도 보고타나, 페루 왕국의 수도 리마에서의 체재에 비하면 4배 이상의 장기 체재다. 아카풀코 도착에서부터 베라크루스 출발까지 누에바 에스파냐 왕국에서의 12개월은 훔볼트의 열대 아메리카 여행에서 정온함과 두드러진 광경이 가장 부족한 기간이다. 탐험 여행이란 견지에서 보면 훔볼트가 도착한 멕시코 국내에서의 여행 루트는 스페인령 아메리카에서도 가장 개발이 진전된 풍요한 지역이었고, 인적이 드문 탐험 대상으로는 부족한 곳일 뿐이었다. 그중에서도 수도 멕시코 시티는 약 13만의 인구를 보유한 19세기 초의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최대의 도시였다. 훔볼트는 그 도시 경관의 아름다움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전체로서 보자면 유럽의 어느 도시도 멕시코 시티 만큼은 아름답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멕시코 시티에는 토리노나 밀라노에서 볼 수 있는 건물의 규칙과 통일감이 존재하고, 파리나 베를린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시가지 규획이 조성되어 있다. 모든 도로는 직선상에서 규칙적으로 뻗어 있으며, 도로의 폭은 매우 넓다... 길 양쪽엔 납작한 돌로 깐 근사한 보도가 정비되어 있다... 대(大)광장[소칼로]은 그곳에 석조 상점이 병렬로 건축된 정방형의 시장이 없다면 세계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광장 중 하나일 것이다... 대성당과 부왕의 궁전이 그곳에 면해 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훔볼트는 멕시코의 지식인들과 교류를 심화하고, 이투리가라이 부왕과 자주 회견하는 등 꽤나 사교적인 생활을 했다. 하지만, 멕시코 체재의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열대 아메리카 여행의 학술 성과 중에서 동식물의 새로운 속과종의 발견을 별개로 하면, 그외의 지리학적인 저작에선 멕시코 체재 성과가 큰 부분을 점하고 있다. 일례로 열대 아메리카 여행의 성과로 2권의 <지리 ・자연 아틀라스>가 간행되어 있는데, 그 제1권째로 1811년에 출판된 <누에바 에스파냐 왕국의 지리 ・자연 아틀라스>는 동년에 간행된 <누에바 에스파냐 왕국지>의 부록으로 멕시코 각지의 지형도나 지형 단면도 등을 모은 것이었다. 또한 3년 후에 간행된 <신대륙 열대 아메리카 지역의 지리 ・자연 아틀라스>에도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등과 더불어 멕시코 지도가 큰 비율을 점하고 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멕시코에서의 최대의 여행 성과는 앞서 들었던 <누에바 에스파냐 왕국지>일 것이다. 거기엔 독립 전야의 멕시코가 자연 ・인구 ・농업 ・광산업 ・제조업 등 다양한 측면에서 상세히 묘사되어 있고, 근대 지리학의 고전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인구든, 농업이나 광산업 ・제조업 등의 경제 활동이든, 그곳에서의 고찰은 세밀한 통계 자료에 근거하여 전개되었다. 이런 기술을 가능하게끔 한 것이 멕시코 시티에 체재할 때 훔볼트가 정력적으로 덤벼든 자료 수집 활동이었던 것이다. 멕시코 시티 체재 중에 훔볼트는 이투리가라이 부왕의 특별한 호의로 궁전에 있는 왕국 문서 자료실의 자유로운 출입과 보관 자료들을 필사할 수 있었다. 흥미있는 자료들을 대출하여 숙소에서 베껴 쓰는 것까지 허락되었는데, 실제로 과학, 특히 지리학에 가치있는 자료를 다량으로 빌려왔던 것 같다.

부왕청 문서 자료실에서의 문헌 조사를 훔볼트는 7월 8일부터 시작했다. '보관 문서는 빈틈없이 정리되어 있었다. 그러나, 18세기 중반에 많은 문서류가 소실되었기 때문에 보관 문서는 꽤 좁은 3개의 방을 점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여행 일지>]' 여기서 얻은 정보가 <누에바 에스파냐 왕국지>를 집필할 때 귀중한 기초 자료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훔볼트는 서문에서 자신이 멕시코에서 사회 ・경제 상황의 연구를 뜻하게 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카라카스(Caracas) 주변 지역과 오리노코(Orinoco) 강 연안, 나아가 네그로(Negro) 강 연안과 누에바 그라나다 왕국, 키토(Quito), 페루의 해안 지대 등에서 조사해 온 이들 남아메리카 지역이 미개발 상태인 데 비해 나는 누에바 에스파냐 왕국에서 문명의 발전이라는 현저한 차이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멕시코에 관한 통계학적인 분석과 사람들의 진보나 산업의 발전을 초래한 주요 원인을 추구하려 한 것은 두 지역간의 이러한 대조가 동기였다."



훔볼트의 폭넓은 관심은 열대 아메리카 어디를 방문해도 자연과 인간 사회의 양 분야에 걸쳐 있었는데, 멕시코에선 특히 인문과학 혹은 사회과학 영역에 훔볼트의 흥미가 집중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중의 한 결과가 역사학이나 고고학에 대한 훔볼트의 강한 관심이다. 궁전의 자료실에서도 통계 자료 및 지지(地誌) 자료와 더불어 훔볼트는 아즈텍(Aztec)의 상형 문자 자료나 아즈텍 왕국을 멸망시킨 정복자 코르테스(Cortés)의 관련 자료에 강한 관심을 보였고, 멕시코 원주민의 언어에 대해서도 열심히 연구했다. 1810년 간행된 <산악 지역의 조망 및 아메리카 민족의 문화유산>에선 아즈텍이나 잉카의 도상(圖像) 등 아메리카 각지의 고대 문명 유산이 수많이 수록되어 있다. 이렇게 해서 훔볼트의 멕시코 체재는 말하자면, 문헌 연구에 의해 특징지을 수 있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멕시코 시티의 소칼로(Zocalo), 일명 '헌법광장'과 마주한 옛 스페인 부왕의 관저인 국립궁(國立宮) 전경
           훔볼트 남작이 방문했던 식민시대 말기부터 당국은 근대적인 인프라를 깔아 도심의 미관을 개선했다.


           국립궁 중앙의 정문을 출입중인 방문객 및 공무원들, 보초병이 양 옆으로 경계를 서며 지키는 모습이다.  
           부왕청 시대부터 멕시코 정치의 주요 무대로 국경절이나 외빈의 방문 때마다 의전 장소로 활용되었다.


           메트로폴리탄 대성당, 멕시코 시티의 가장 저명하고도 오래된 랜드마크로 3세기간에 걸쳐 축조되었다. 
           1790년 말 대성당 정면의 소칼로 일대를 개수하던 과정에서 아즈텍의 석조(石彫) 달력이 발굴되었다. 


           화가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의 만년 대표작이자 최고 걸작이라 일컬어진 국립궁의 프레스코 벽화  
           스페인의 정복으로부터 반(反) 디아스(Diaz) 혁명에 이르기까지 멕시코사를 인물화 위주로 묘사했다.


             1789~94년 부왕으로 재직하면서 계몽적 행정 수완을 발휘했던 레비야히헤도(Revillagigedo) 2세 백작
             독립 전야의 멕시코에서 가장 유능한 통치자로 알려진 그는 수도의 미화 ・정비에도 크게 공헌했다. 




그런데 멕시코 시티에 체재한 9개월을 훔볼트가 줄곧 시내에서만 소일했던 것은 아니다. 멕시코에 건너가면서부터 소식이 없었던 훔볼트의 동정에 대해 월간지 <신(新) 베를린>은 1804년 5월호에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알렉산더 폰 훔볼트는 로마 주재 공사(公使)인 형 빌헬름(Wilhelm)에게 누에바 에스파냐의 미초아칸(Michoacan) 지방에서 1803년 9월 23일자로 보낸 편지를 핑계대고 있다. 이에 따르면, 그는 이전의 편지에서 예고했던 아메리카 출발 일정을 다시 연기하고 있다. 그 이유로 베라크루스에 황열병이 만연해 수많은 희생자가 속출하고 있다는 것과 형편이 좋은 배를 잡는 일이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그는 편지에서 지적하고 있다. 유럽 귀환 여행을 하는 데 있어서 훔볼트는 이상의 두 가지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때까지 대기할 의향이다. 그와 동행자인 봉플랑(Bonpland)은 모두 건강하다고 한다. 조금 지연되더라도, 병에 걸리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우리는 그의 행운과 건강하게 재회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별세계로부터 방대한 식견과 귀중품을 가지고 귀환할 그들에게 무엇보다 순풍이 불기를.

훔볼트는 지칠 줄 모르는 연구자로서 이 편지를 쓴 전년의 9월 하순 경 누에바 에스파냐 북부를 여행중이었고, 이미 2개월에 가까운 기간을 주로 화산 조사 등으로 보냈다. 화산은 장기간의 여행을 통해서 항상 그의 관심을 끌어왔다. 이번 여행에서도 역시 그는 동행자와 함께 호루요(Jolluo) 산 정상에서 지금도 역시 분연(憤燃)을 내뿜는 화구(火口) 아래로 136m 정도 내려가 화구 밑바닥에서부터 거의 29m쯤 되는 지점까지 접근하고 있다. 호루요 산은 1759년 9월 29일 돌연히 형성된 것이다. 훔볼트는 이 새로 생긴 산을 조사함으로써 불을 뿜어낸 산들의 성질에 대해 만족스런 몇 가지 설명을 얻어냈다. 그외의 내용은 태반이 이미 소개한 사실의 반복이다. 훔볼트가 똑같은 일을 몇 번씩이나 편지로 쓰는 것은 너무 많은 편지가 분실되기 때문에 어느 것이 목적지까지 도착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호루요 산은 훔볼트가 방문하기 44년 전에 사탕수수나 쪽을 재배하는 광대한 농원[아시엔다] 한 가운데에 돌연한 폭발로 형성된 새로운 화산이다. 그 높이는 517m에 달하고, 이런 종류의 지질 현상으로는 유럽에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대규모인 것이었다. 그러나 멕시코 시티에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였는데도, 호루요 신산(新山)의 형성은 유럽 지질학계에 거의 소개된 바가 없었고, 또 지질학적인 조사 대상이 된 적도 없었다. 그곳에서 훔볼트와 봉플랑은 이 호루요 산을 조사하기 위해 멕시코 시티로 돌아오면서 길가의 풀을 뜯어먹으며 분연이 자욱하고, 작렬하는 화구를 탐험하는 위험도 무릅쓴 것이다. 게다가 호루요 산으로부터 돌아오는 길에서도 만 하루간에 걸쳐 톨루카(Toluca) 산[4577m] 등정을 시도하고 있다[1803년 9월 28일]. 두 사람 모두 건강했던 사실이 여기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톨루카 산의 등정으로 결말지은 2개월에 걸친 멕시코 국내 여행을 <신 베를린>의 기사처럼 '주로 화산 조사' 때문이었다고 요약한 것은 조금 부정확하다. 여행의 주요 목적지는 오히려 광산 도시 과나후아토(Guanajuato)였다. 훔볼트는 그곳에서 8월 7일부터 9월 6일까지 정확히 1개월을 부근에 산재하는 수많은 광산을 조사하는 일로 보냈기 때문이다. 당시의 과나후아토는 아메리카 대륙 유수의 광산 도시였으며, 이곳에서 채굴되었던 양질의 은은 스페인 본국과 누에바 에스파냐 왕국에 거대한 부(富)를 가져다주었다. 16세기에 발견된 과나후아토의 광맥은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은 광맥이었는데, 훔볼트가 이곳을 방문한 19세기 초까지 230년간을 통해서 총액 1억 8천만 페소의 부를 산출했다고 한다. 특히, 18세기 말부터는 전성기를 맞아 매년 약 5~6백만 페소의 생산액을 자랑하고 있었다.




             사카테카스 및 포토시와 더불어 스페인령 아메리카의 3대 은광 도시로 명성을 날린 과나후아토 전경
             열악한 환경과 봉건적 사회의 모순이 집약되었던 이 도시는 훔볼트에게 고통스런 인상만을 남겼다.


           과나후아토 시가의 중심부에 소재한 후아레스(Juárez) 기념 극장, 축제나 행사의 집전 장소이기도 하다.  
           독립 이후 내란과 재해로 점차 쇠락해왔으나, 1903년 준공시킨 극장은 문예 부흥의 상징처럼 되었다.




이러한 성황을 반영해서 큰 채굴장 주위엔 광부들의 주택이 나란히 축조되는 한편, 거의 도시 계획의 흔적을 볼 수 없는 중심 시가지에서는 호화스런 건물과 초라한 가옥이 현저한 대조를 나타냈다. 당시의 과나후아토엔 5만 이상의 인구가 집중해 있었다고 한다. 여행 일지에는 이 과나후아토에서의 체재와 조사가 그때까지의 그의 생애에서 '가장 힘들었던 기간 중 하나'였다고 쓰여졌다. 훔볼트는 이 2개월간의 여행 외에도 앞서 5월 13일부터 27일에 걸쳐 2주간 정도의 소(小)여행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도 주요 방문지는 광산 도시인 파추카(Pachuca)였고, 멕시코의 가장 오랜 은 광산으로 알려진 파추카 갱이나 당시 활발한 상황을 드러내던 레알 델 몬테(Real del Monte) 갱, 모란(Moran) 갱을 견학했다. 이들 조사 결과는 <누에바 에스파냐 왕국지> 제4부 농업 ・광산업 부분에서 충분히 활용되었다.

해안 저지에서의 황열병 유행은 12월에 들어서면서부터 점차 누그러지는 듯한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훔볼트 일행은 마침내 열대 아메리카 여행에 종지부를 찍고 유럽으로 돌아가는 최후 여정에 오르게 된다. 훔볼트가 멕시코 시티를 출발한 것은 1804년 1월 20일의 일이다. 당초엔 베라크루스 항구를 2월 1일에 출발하는 배에 승선할 생각이었는데, 예정된 배가 나타나지 않아 출항이 대폭 지연되버렸다는 소리가 들렸다. 황열병을 계속 두려워하던 훔볼트는 천천히 걸음마를 옮기며 해안 저지 쪽으로 내려가 할라파(Jalapa)에서 2월 10일부터 15일까지 체재했다. 베라크루스에 도착한 것이 2월 18일이었으니까 멕시코 시티에서 베라크루스까지 약 1개월에 걸쳐 여행한 셈이다. 이 기간에 대해선 유감스럽게도 여행 일지가 현존하지 않기 때문에 대략적인 일정 밖에는 알려져 있지 않다.

베라크루스에 도착한 훔볼트 일행은 배의 출발이 카리브해의 강한 폭풍으로 연기되자, 결국 출항하는 3월 7일까지 3주 정도를 이 항만 도시에서 체류하게 되었다. 그 기간을 이용하여 그는 베라크루스와 그 주변의 지역을 조사했다. <누에바 에스파냐 왕국의 지리 ・자연 아틀라스>에 게재된 베라크루스 주변의 지도는 이때의 조사 결과에 기초하고 있었다. 훔볼트 일행을 태운 스페인 군함 오(O) 호는 2주 가까이 걸려서 카리브해를 횡단, 3월 19일 쿠바의 아바나에 입항했다. 아바나에선 일전에 체재할 때 맡겨두었던 35개 상자의 자료들[식물 표본 등]을 회수했다. 아바나에서의 체재는 1개월 반에 달한다. 그러나, 이 기간에 대해서도 안타깝지만 여행 일지가 남아 있지 않다. <여행기> 제3권엔 <누에바 에스파냐 왕국지>와 구성이 같은 <쿠바 지지(地誌)>가 삽입되었는데, 보조 조사가 있었을 것이다.

- by 데즈카 아키라 著 <훔볼트의 세계(フンボルトの世界)>에서 발췌




              훔볼트가 내방할 당시의 부왕으로 연구 조사를 호의적으로 배려해 준 호세 데 이투리가라이의 초상
              나폴레옹 전쟁 와중에 독립의회 소집을 요구한 크리오요 계층과 결탁한 혐의로 체포 ・송환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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