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벚꽃이 만개한 창경궁의 야경은 서울 시민에겐 아주 훌륭한 휴식처다. 1986년 제 이름을 다시 찾은 창경궁은 1909년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하면서 궁(宮)을 원(苑)으로 바꾸고, 일부를 헐어내어 동식물원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처럼 민족의 핍박과 함계 수난을 겪었던 창경궁은 필자[=윤우경]가 구(舊) 황실재산사무총국장 재임 시절 등 동식물원 복구를 위해 각별한 노력을 기울인 바 있으며, 또 그때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신 분들이 있기에 여기에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 필자가 1953년 3월, 사무총국장에 취임하여 창경원의 형편을 살펴보었더니, 식물원에 소철이 한 포기 남아있을 뿐 식물 모두가 흔적이 없었다. 맹수는 탈출 위험이 있다 해서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면서 총독부의 지시로 모두 사살해 버렸고, 나머지 관상용 동식물도 6.25를 겪는 동안 모두 말라죽거나 탈출해 나가버린 것이다.
당시는 서울 시민의 유일한 휴식처였으며, 전쟁 전에는 시골에서도 창경원으로 관광을 오던 곳이었다. 뿐만 아니라 어린이 학습장 노릇도 톡톡히 하던 곳인데, 전쟁통에 모두 없어져 버렸으니 한심한 노릇이었다. 나는 하루라도 속히 창경원을 복구할 필요를 느꼈으나, 예산이 한 푼도 없었다. 천상 땅을 팔아야 하는데, 어떤 경우라도 땅을 처분하진 않겠다는 것이 나의 방침이었다. 내가 육영사업 이외에 구 황실 소유 부동산을 불하하지 않기로 방침을 세운 것은 개인 살림도 부동산을 처분해서 무엇을 한다는 것은 대개는 위험한 일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궁리 끝에 나는 서울시내 유지들로부터 얼마씩 추렴하기로 하고, 김태선 서울시장을 찾아가 계획을 설명한 후 김 시장에게 동물원 재건 위원회의 위원장이 되어주길 부탁, 약속을 받았다. 우선 필요한 동물을 구입하는 예산부터 세워야 했다.
당시 국내엔 그 자료를 뽑을 만한 곳도 없었다. 마침 중립국 휴전 감시 위원단 초청으로 판문점을 시찰하러 갔다가 스미스(Smith) 대표의 사택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스미스씨의 부친이 세계적인 동물 상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스미스씨에게 우리가 구입해야 할 동물 명세를 넘겨주며 가격표를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후, 동물 정가표가 왔기에 창경원 수정(水亭)에서 은행단 ・ 재계 인사들을 초청, 동물원 재건 위원회를 조직했다. 1954년 5월 경으로 기억된다. 참석자들에게 필요한 동물과 가격표를 적으며 한 장씩 돌렸더니, 그 자리에서 한 쌍씩 신청해주어 거의 해결됐다. 이렇게 해서 동물을 구입하고 나니 왜정 당시보다 훨씬 훌륭한 동물원이 되었으나, 이제 식물원이 문제였다. 아무리 궁리해도 묘안이 떠오르지 않아 고심하고 있는데, 뜻밖에도 실마리가 잡혔다.
궁하면 통한다는 말이 꼭 맞아 떨어지는 경우였다. 내가 [일제시대] 해주(海州) 경찰서의 경부(警部)로 있을 때 당시 황해도에는 어느 고을에나 중국인이 많이 와서 야채 농사를 하고 있었다. 이들은 군(郡) 단위로 화교회(華僑會)를 조직하고 있었으며, 해주에 황해도 화교 연합회가 있었다. 중일전쟁이 한창 치열하던 1941년 당시 화교회장 손학령(孫鶴齡)이란 사람이 나를 찾아와 각 군의 회교회장 10여명이 애매한 사건으로 구속되었는데, 구제해달라고 탄원해 왔다. 알아본 결과, 사실 무근한 사건이기에 경찰부장에게 얘기하여 석방시킨 사건이었다. 나중에 손 회장이 서울에 내려와 살면서 중화민국(中華民國) 대사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중국 대사로부터 고맙다는 인사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런 관계로 중국 대사관과는 절친하게 지내면서 매년 한 두 차례씩 초대되어 식사를 하고는 했었다.
1957년 음력 정초 무렵, 대사관의 초청을 받고 으레 만찬하는 자리에서 나는 왕(王) 대사에게 식물원 복구의 고충을 털어놨다. 얼마 지나서 왕 대사로부터 반가운 소식이 왔다. 왕 대사는 당시 대만성(臺灣省) 주석인 엄가금(嚴家淦, 후일 총통) 씨에게 한국의 식물원 사정을 보고했더니, 언제던지 내가 대만에 오면 열대 지방의 식물들을 무상으로 제공하겠다는 회신이 왔으므로 대만에 가서 식물을 받아오란 것이었다. 나는 뛸뜻이 기뻤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반가운 소식을 받고 보니, 고맙기 그지 없었다. 그러나 반가움도 잠시 뿐, 가만히 생각하니 운송이 문제였다. 식물을 운반하려면 선박이 있어야 하는데, 그때의 예산으로 선박을 전세낸다는 건 엄두도 못낼 형편이었다. 그런데 그때[1957.4], 마침 해군 본부에서 연예인 위문단을 태우고 동남아 몇개 나라를 방문한다는 계획이 있었다.
그래서 귀국하는 길에 대만에 들러 공연도 하는 겸, 식물을 실어오도록 해군 당국과 교섭이 이루어졌다. 나는 해군 함정이 대만에 도착하는 날짜를 맞춰 박응구 창경원장을 대동하고 홍콩을 경유해 대만에 도착했다. 선물로 대만에 꿩이 없다기에 창경원에서 부화시킨 꿩 한 쌍을 가지고 갔다. 우리 대사관의 안내로 엄가금 씨를 방문했더니, 매우 친절하게 맞아주었다. 인사가 끝나자, 그는 즉시 국립 식물원장 및 대북대(臺北大) 식물학과 교수 황(黃) 모 박사를 불러 '한국 식물원에서 기를 만한 식물을 많이 선택해서 보내도록 하라'고 지시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안내로 국립 식물원에 갔더니 2만평 정도 넓은 토지에 아열대 지방의 식물이 밀식되어 있어서 장관이었다. 다음날부터 인부를 고용해 그들이 지정해주는대로 채취하여 뿌리를 묶어 포장을 막 시작했는데, 4일만에 해군 함정이 도착했다.
위문 공연을 마치고 함정에다 식물을 적재해 놓은 후 엄 주석에게 인사차 갔더니, '동물은 다 갖추었느냐'고 물었다. 나는 다 갖추었으나 꽃사슴이 없다고 했더니, 즉시 비서를 불러 대북시 동물원장에게 꽃사슴 한 쌍을 상자에 넣어 식물과 같이 실어보내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리는 것이 아닌가. 지금 대공원에 있는 꽃사슴은 그때 대북에서 가져온 것이 원종(元種)인데, 식물과 더불어 영구히 번식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1957년 5월 14일, 해군의 L.S.T. 함정편으로 인천항에 도착한 이 식물은 총 57종 150 그루로 그중엔 각종 야자류와 흰 겹동백을 포함한 동백류, 종려 ・ 바나나 ・ 소철 ・ 고무나무 등 하나 하나가 다년간 섬세하게 다듬어 가꾼 진품들이었다. 이것들이 창경원 대온실에 제자리를 찾아서 배식 ・ 진열되자, 식물원에는 당장 관람객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성황을 이루었던 것이다.
- by 창경원 복구 사업에 있어서 대만 당국의 협조를 받았던 경과를 회상한 윤우경의 기고문에서 발췌

양자는 국부천대(國府遷臺) 초기 재정부장을 교대로 역임하며 대만경제 안정화의 기반을 마련했다.

수목이 우거진 옥천교를 넘어 명정문 행각의 우측으로 최대의 철제 사육장인 큰물새장이 설치되었다.

고궁 유적과 테마파크 시설이 혼재되었던 창경원은 학습장으로도 기능하며 수많은 인파를 모았다.

코끼리 방사장 측면으로 홍학사가 자리잡은 것처럼 공간의 협소성 때문에 각 동물사들이 밀집했다.

한국전쟁으로 절멸당한 동물원은 전후 재건을 거쳐 최절정기 9백두의 대가족을 거느리게 되었다.

낙타사 동쪽의 바다사자사, 일본에서 수입된 한 쌍이 출산하던 경사도 있었으나, 엿새만에 사망했다.
맞은편으로 세워진 열대 동물관은 개원 60주년에 개관, '아파트'라 불리며 본관 사무실도 입주했다.

봄철의 벚꽃을 머금은 장서각, 개원 초기부터 이식된 수목은 원내 도처마다 일본적 경관을 연출시켰다.
도서관이 1981년 창경원을 떠나간 후, 이 건물은 소실된 옛 고궁 전각들의 현판 수장소로 활용되었다.

장서각 건축의 롤모델로 알려진 교토(京都) 우지(宇治)의 평등원(平等院) 봉황당(鳳凰堂), 1973년 12월
헤이안 후기인 1053년 관백 후지와라노 요리미치(藤原頼通)가 건립한 사찰의 부속 불당(佛堂)이었다.

식물원 온실의 동관, 동물사 본관과 마찬가지로 개원 60주년 기념차 신축되어 야자류 등을 전시했다.
재건 과정에서의 식물 확보가 난제였으나, 대만으로부터 무상 공여받은 품종으로 이내 해결되었다.

춘당지(春塘池)의 수정궁(水亭宮), 벚꽃놀이 야간 타임이 가까워지자 전등을 밝히며 흥을 돋구고 있다.
연못 위로는 1962년 국내 최초로 개통된 케이블카가 횡단했고, 뱃놀이와 더불어 명물로 자리잡았다.

원내 시설의 현대화가 진행된 1974년부터 기구를 고궁 동남쪽으로 이전시키고, 공작사를 신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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