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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향수병 환자의 보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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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戰禍) 속에서 절멸당한 창경원의 동물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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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19세에 고향인 강원도 회양(淮陽)의 이왕직 난곡(蘭谷) 목장에서 목동 생활을 시작으로 서울 경마장 기수와 왕실 마부직을 거쳐 창경원 사육사[苑丁]로 발탁된 박영달(朴永達)은 15년 사이 조류에서부터 맹수, 대동물까지를 두루 다뤄본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한 경력자였다. 일제시대의 사육사는 다른 직업보다 대우도 좋은 편이었으므로 그동안 다소의 여축도 있었던지라 굳이 동물원을 떠나지 않아도 당장 곤란한 것은 없었다. 그보다도 그는 자신만을 바라고 있는 동물들을 외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8.15부터 2년간은 새로운 동물의 증가는 없었고, 더러 한 마리씩 줄어도 보충하지는 못했다. 그 후 6.25가 일어나기까지 3년 동안은 시골 사람들이 우연히 입수해 기증하는 동물을 받아들였는데, 삵 ・너구리 ・수달 ・오소리 ・백로 ・ ・수리부엉이 등의 육식 동물과 고라니 ・꿩 등이었다.

적게나마 예산도 서서 이들의 사료를 사먹이는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박영달은 틈을 내서 비원과 종묘 숲에 나가 그물을 쳐서 밀화부리 ・찌르레기 ・방울새 따위 산새들을 잡아다 빈 새장을 하나하나 채우기도 했다. 1947년부터는 사회 질서도 어지간히 잡히고, 원내(苑內)의 시설과 정원도 차츰 정비 단계에 들어갔다. 전문 직원이 없어 어려움이 많았으나, 바로 이웃한 성균관 대학과 서울대학교 수의학부 교수들의 지도와 협조를 받을 수 있었다. 동물과 식물이 부족했던 대신 각종 전람회, 연예 단체들을 유치해 행사도 치뤘다. 당시 구(舊) 황실의 유지는 거의 창경원 수입에 의존하는 실정이었는데, 특히 매점 임대료는 세입원으로 큰 몫을 감당하고 있었다. 정부가 수립된 후에도 예산이란 명목 뿐이었고, 관리 운영과 직원들의 부족한 생계 보조비도 이 잡수입으로 상당 부분 보충하는 실정이었다.

1950년 6월 25일. 38선이 무너지고, 28일 새벽에는 인민군이 물밀듯이 미아리 고개를 넘어 창경원 앞을 지나 서울로 들어왔다. 이 의외의 사태에 대다수 서울 시민들처럼 창경원 직원들도 대부분 피란할 겨를 없이 인민군을 맞았다. 이렇다 할 저항도 없이 서울이 함락되었지만, 창경원은 요행히 별다른 피해가 없었다. 다만, 창경원은 1926년 순종 승하 이래 두번째로 홍화문(弘化門)을 닫아야 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박영달 기사의 이야기로는 이러했다.




인민 위원회의 붉은 완장을 두른 사람들이 들어와 일과를 지휘 ・감독하고, 군인들이 드나들었다. 밤에는 당직자만 남았고, 모두 폭격으로 파괴된 철도 ・도로 및 교량 등의 복구를 위한 노력 동원에 나아갔다. 시일이 지나가 직원들 가운데 젊은이는 의용군으로, 나이 많은 이는 노무자로 징발되어 가기도 했다. 요원으로 남은 나는 몇몇 인원들과 동물 관리만을 맡아 일했다. 특수한 업무라 간섭은 비교적 안 받았지만, 하루 50kg씩 두 지게의 풀을 베어다 먹이고 말리는 일은 어김없이 이행하고, 조석으로 사상 교육도 받았다. 더러 동물이 죽어 꼬치꼬치 경위를 추궁받을 때는 아주 질색이었다. 불합리한 지시나 문책에 대해선 타고난 기질대로 항변했지만, 먹히지 않았다. 9.28 때까지 원내는 비교적 조용한 가운데 큰일은 없었으나, 하루는 우연히 장서각에서 서적 꾸러미를 내어가는 것을 보았다.

호되게 꾸중을 듣고, 조사한다며 자서전[반성문]을 쓰라는 바람에 곤욕을 치뤄야 했다. 그들은 출신 성분이 좋아서 용서해준다며 풀어줬는데, 나는 순전히 무식한 덕분으로 큰 곤욕을 모면한 것이다. 가지고 간 책들은 아마도 귀중한 보물급이었을 것이다. 9.28 때 그들은 소리도 없이 떠나버렸다. 서울 탈환에 안도의 숨을 돌이킬 틈도 없이 전황은 역전되어 1.4 후퇴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직원들은 다투어 피란 짐을 싸고, 나도 이때만은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엄동설한에 아무도 돌봐주는 이 없이 우리 안에 갇힌 동물 가족들을 남기고 발길을 돌리기란 차마 어려웠지만, 백번 궁리 끝에 떠나기로 했던 것이다. 나는 앵무새 한 마리만 장에 넣어 가지고 떠났다. 정들었던 앵무새를 마지막으로 보고 문을 나서려는데, 'こら, こら! ばか, ばか!'하며 욕소리를 외쳐대는 이 오랜 친구만은 두고 갈 수가 없었다.

화성군 어느 지경에선가 얼어 죽은 앵무새를 눈속에 장사지내고, 피란 생활을 전전했다. 3월에 서울이 재탈환되자, 나는 잠입하다시피 단신으로 서울에 들어와 우선 창경원에 와보았다. 원내는 적막한 가운데 전각이며, 동물사 등도 예전과 다름없는 듯 했으나, 차례로 살펴보니 살아 움직이는 동물은 새 한 마리도 눈에 띄지 않았다. 누가 그랬는지 동물사는 모조리 문이 열려 있었다. 아마도 다시 내려왔던 인민군들이 잡아 먹었거나, 아니면 미쳐 돌볼 길이 없자 차라리 문을 열어 능력껏 살라며 방면해준 듯도 싶었다. 먹이지 못하고 가둔 채 굶겨 얼려서 죽일 바에야 백번 잘한 일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야생에 익숙하지 못한 동물들이 나아간들 제대로 살아 남았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아닌게 아니라, 조금 더 살펴보니 우선 에뮤 한 마리가 우리 가운데 엎어져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어루만져보니, 푸시시 거친 터럭 속에서 먼지만 일었다. 앙상한 뼈대를 간신히 가죽과 터럭이 덮고 있을 뿐이었다. 견디다 못해 혹한에 굶어서 얼어 죽은 것이다. 이밖에 큰물새 우리의 재두루미 한 마리, 맹금사의 부엉이 한 마리도 그렇게 죽어 있었고, 유일하게 문이 열리지 않았던 소(小)동물사의 여우 ・너구리 ・오소리 ・삵 등은 혹은 굴 속에서, 혹은 돌틈에 끼어 죽어 있었다. 낙타 ・사슴 ・얼룩말들은 발목이며, 머리통만이 우리 안의 여기 저기에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중공 ・인민군이나 굶주린 시민들이] 먹기 위해 제자리에서 도살을 당했음이 분명했다. 박물 표본실과 장서각은 문이 열린 채 소장품들이 흩어지고, 온실 내부의 식물들도 대부분 얼어서 말라 죽어버려 남은 것이라고는 묵은 소철이 한 그루만 있을 뿐이었다[여담으로 해방 직전에 처분된 동물들은 21종 38마리였다고 전해진다].




창경원은 일제 36년의 영욕의 넋두리를 8.15 전야의 맹수 및 대동물 학살이란 제1차 수난으로 끝내고, 바로 이어서 혼란스러웠던 5년을 가까스로 유지해 오다가 민족 상잔의 6.25로 절멸되는 제2차 수난을 당하고 만 것이다.




           일제시대 이왕직 박물관이 입주했었던 창경원 장서각 전경, 천수각의 형태를 취한 왜색풍 도서관이다.
           한국전쟁 초기 인민군은 이곳에 소장중인 <조선왕조실록>의 적상산본을 노획해 북으로 반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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