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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스 리 박사, 창경원 유원지의 폐쇄를 시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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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창경원은 미군정(美軍政) 산하의 구(舊) 왕궁사무청에서 운영하였다. 그러나 서울시 운영이 논의되는 등 그 관리의 주체는 분명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대통령 직속 기관으로 구 황실재산관리위원회가 설치되어 운영했으나, 창경원에 대한 정부의 지원과 관리는 체계적이지 못했다. 창경원을 일제의 유산과 결부시켜 인식한 대표적인 것은 창경원에 심겨진 벚꽃과 벚꽃놀이에 관한 것이었다. 1946년 4월, 창경원에서 밤 벚꽃놀이가 재개되면서 벚꽃을 일본의 꽃으로, 일제의 한국혼(魂) 말살과 결부시켜 인식하면서 식민 유산의 문제가 제기됐다. 즉, 인식의 시작은 해방 후에도 벚꽃놀이에 인산인해를 이루는 현상에 대한 불편함이었다. 당시 일간지에선 벚꽃은 일본이 '조선의 조선혼을 꺾어 누르고자 무궁화를 응징한' 것을 상기시키고자 하는 기사들이 게재되었다.

동시에 벚나무를 베고 그 자리에 무궁화를 심자는 '벌앵(伐櫻) 운동'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실행에 옮겨지진 않았다. 1947년, 수도경찰청과 공보처는 '신성시되어야 하는 고궁(故宮)의 문화가 흥행만을 주로 하는 오락 문화의 장소로 변질되었으며, 이로 인해 흥행을 목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사를 금한다'는 발표를 하였다. 이 발표는 경복궁 ・덕수궁 등을 포함하는 것이었으며, 특히 창경원을 온전히 보존하기 위해 원내(苑內)의 일체의 오락과 상업적 이익을 위한 행사 등을 허가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같은 조치는 구체적으로 창경원에서 실시되었던 건국 박람회 ・권투대회, 각종 흥행을 목적으로 한 행사로 인해 서울 시민의 비난과 부정적 여론에서 나온 것으로 창경원이 이윤 획득 목적의 오락장으로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해선 서울시 직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는 의견 등으로 확대되기도 하였다.

즉, 창경원이 '모리의 대상'이 되는 것을 막을 방법을 강구한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개선을 위해 서울시 참사회에선 미군정청과 교섭에 나서기도 하였다. 그리고, 서울시에서는 '창경원이 오락장으로 변하는 것을 막기 위해 허가제에 의거하여 실시되고 있던 일반 흥행 공연을 포함하여 어떠한 공연도 절대로 불허한다'며 창경원내 공연 허가제마저 폐지하였다. 이러한 조치를 강력히 실시하고자 서울시 또한 창경원의 경비 부족과 관리의 소홀함으로 인한 훼손을 막으려면 구 왕궁사무청이 운영한 것을 직영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는 정부 수립 이후로 미루어졌다. 정부 수립 직후인 1949년 4월엔 공보처도 '자랑스러운 한민족의 고대 문화인 궁궐과 사찰 등에서 흥행을 목적으로 한 상업적이며, 오락적인 어떠한 행위도 일체 금지한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왜정시대에는 일인(日人)들이 대소를 막론하고 우리의 사정과 유물은 다 파괴 ・소멸하기로 작정하여 온 것인데, 다행히 지금 얼마 유지된 것이 있으니 이것을 우리가 소중히 여겨 절대로 보유해야 할 것이다. 과거 3년간은 우리가 정신을 차릴 여가가 없어서 그동안 궁궐이나 사찰 등을 돌아볼 여지가 없었지만, 지금부터는 우리 관민이 합심해서 우리의 고적을 보호해야 하겠다. 일동이 절대 책임을 지고 조금이라도 손해될 것을 엄금하여 발전시킬 일에 합심 ・노력해야 될 것이다. 더욱이 궁궐 기지에서 난잡한 유흥이나  운동 ・연회 ・흥행 등을 일체 금지할 것이며..."




공보처 조치의 핵심은 일부 '모리배'들이 역사적 고적(古跡)인 궁궐을 이용해 모리 흥행을 감행하고, 일반 시민에게 불편을 가하는 행위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조치는 시민들의 요구가 지속적으로 속출하고 있는데 기반한다고 강조했다. 이후 창경원내 행사는 서울시 학무국 문화과(文化課)의 허가를 받아야만 가능했으며, 일체의 유흥이나 흥행 성격의 운동회 ・연회 등을 금지시켰다. 이처럼 창경원에 대한 여론의 환기는 '탈(脫)식민의 문제'라기보단 단순히 상업적 목적에 의해 무분별하게 운영되고 있는 부정적 여론에 대한 대응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49년 12월 2일, 이승만 대통령 역시 고적 ・사찰을 소중히 할 것과 일제의 조선 왕궁에 대한 훼손 및 침탈의 의도를 정확히 간파해야 한다는 내용과 한국 문화의 정체성 회복을 강조하는 고적 보존 관련 담화를 발표하였다.




"누대(累代)의 궁실(宮室) ・사찰 등은 가장 우리의 특색을 이어서 고대 문명(古代文明)의 발전을 자랑할 만한 것이 많았으나, 일본이 우리를 속박한 이후로 우리의 기왕 건물은 다 쇄락 ・파손하도록 만들어 놓고, 고대의 우리 문명을 다 잊어버리게 만들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중에 우리가 가장 통한히 여기는 것은 지금 중앙청(中央廳)이라는 것을 하필 경복궁의 신성한 기지를 쓰고, 광화문(光化門)을 옮기고 그 자리에 새 건물을 세워 경복궁 설계를 다 파손시켜 놓았으니, 우리가 그 악독한 심정을 볼수록 가통(可痛)한 것이다. 우리 민족이 외적의 압박하에서 원체 견고하게 된 연고(緣故)요, 또 어떤 것은 애국 정신을 가진 남녀(男女)들이 모험 정신으로 부지했던 공들인 보람이다..."




이같은 대통령의 담화는 국보 ・고적 명승지 지정 작업과 천연기념물 애호 주간 실시 등으로 연결되었다. 왜곡되고 황폐화되는 문화재 보존이 시급하다는 인식은 정부가 수립된 이후 1949년 말부터 문화재 보호 운동의 차원으로서 전개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정부 방침하에 1950년 5월, 창경원 임시 폐문 조치가 취해졌다. 그러자, 창경원 임시 폐문에 서울 시민들은 '반발'했고, 여론이 가라앉지 않자 이 대통령은 아래와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어느 나라고 국민이 신성하게 생각하는 지경(地境)이나 고적이 있는 것으로써 미국 같은 나라도 로버트 리 장군의 저택을, 혹은 무슨 저명 인사의 서재까지도 보존하여 신성한 것으로 만들고 있으며, 패전국 일본에서도 궁성(宮城) 만큼은 그대로 개방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놈들의 신사만을 거룩하게 여기었으니 한심한 일이다. 우리나라의 신성한 장소라면 창경원이요, 덕수궁이요, 그리고 경복궁 등이다. 그런데, 미국인들이 들어가 놀면 말려라 할 터인데도 그들을 오히려 끌어들임에 만족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관습을 교정하고, 우리의 우수한 고적을 보존하기 위해 관할 경찰서장에게 [명령을] 행하여 폐쇄시킨 것이다. ...도대체 창경원에다 동물원을 들여 넣고, 경복궁에다 중앙청 건물을 건축한 것은 일인들의 우리의 신성 침해인 것이니 각성이 필요하다."




이 담화의 핵심은 창경원 ・경복궁 ・덕수궁은 대한민국의 신성한 장소이지, 공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궁을 공원화한 것은 일제의 '간악한 신성 침해'이니, 이것에 대한 각성이 요구된다는 것이았다. 그리고 일제에 의해 '우리의 거룩한 곳이 거의 파괴'되었는데도 현재까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아 우리 국민 스스로도 거룩한 곳을 보존하려는 의욕을 가지지 않게 되었으며, 지금 현재 창경원을 운영하여 이왕직(李王職)에서는 돈을 버는 것에만 급급한 나머지 일반에 무질서하게 공개해 창경원을 파손 ・훼손시키고 있다며 비난과 각성을 강조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창경원에 대한 일방적 폐문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대통령의 담화는 창경원에서의 상업적 행위와 무질서한 운영의 책임을 이왕직에 떠넘긴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때의 창경원은 대통령에 직속된 기관이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임시 폐문 조치는 '시민의 휴식 공간이 박탈'당했다는 표현이 제기되는 등 즉시 강력한 저항에 부딪쳤다. 창경원 임시 폐문 조치에 대한 반대 및 저항의 논리는 크게 4가지였다. 첫번째는 창경원이 서울 시민들의 공원으로 내외국인의 유람지이자 서울의 명소라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된다는 점, 두번째는 창경원은 대한민국의 문화재로 일반 시민이 유적을 감상할 수 있는 국보적 ・문화적으로 중요한 곳이며, 또한 동식물원이 겸비된 교육 학습장으로 그 역할이 뛰어나다는 점이다. 세번째는 창경원내 동식물원은 학생 ・시민들 모두에게 '취미'로나 '교양'으로 중요한 곳이니 폐문이 아니라 반대로 기존 시설을 완비 ・확충해 시민이나 외국인을 위하여 유용한 장소가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네번째로 문화 국가로 이런 시설이 없다는 것은 문화국의 수치라는 논리들이었다.

이상 논리들의 핵심은 대통령이 창경원이 서울 시민의 여가 공간으로 자리잡은 '공원'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에 맞추어져 있었다. 그리고, 서울시 인구에 비해 공원도 부족한 현실에서 서울 시민이 휴일에 갈 수 있는 산책지인 창경원은 단순한 휴식 공원이 아니라 문화를 느끼고 배울 수 있는 중요한 장소라는 점 또한 제기하였다. 이처럼 개원 40년만에 서민의 휴식처요, 피서지로 확고히 자리잡은 창경원이 시민의 공간이 된 사실에 대한 인식이 없는 일방적인 폐쇄 조치는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당시 임시 폐문 조치에 대한 반대 논리들에서 주목할 점은 '실물 교육기관', '국민들의 취미 ・교양을 위한 곳', '시민의 위안(慰安) 장소', '문화 국가다운 시설' 등으로 창경원을 규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일제가 개원 당시 부여했던 창경원의 성격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이렇듯 창경원이 이미 한국인의 여가 문화의 중요한 장소로 내면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폐문 조치에 대한 반대 여론이 강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대궐이나 사찰 같은 신성한 곳에서 꽹과리를 치고 하는 행태를 그대로 묵과할 수 없으며, 후대에 그리고 외국 손님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귀중한 고적을 전부 잃을까 염려되어 조치를 취한 것이라고 완화된 내용의 담화를 발표하기도 했다. 창경원의 일방적 폐문과 반대 여론 형성 및 논의들은 곧바로 터진 전쟁으로 진척되지 못했다. 전후에도 창경원의 위상 점검이나 복원 등 '탈식민'에 대한 논의는 적극적으로 개진되지 못했다. 단지, 한국의 훌륭한 국보와 명승 고적으로 널리 인식시킨다는 목적하에 '문화재 애호 기간'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무료로 개방시켜 전통 문화 체험장의 역할을 하면서 '올바로' 보존해야 하는 공간으로 천명되었을 뿐이다.

1950년 이래 창경원에 대한 국가적인 보호책을 요구하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 주장은 '한 국가의 문화적 수준을 높여줄 수 있는 국보적 존재인 창경원에 너무 무관심했고, 점차 관리도 이루어지지 않아 황폐화되었으며, 동물원은 일제시기의 모습에 비해 너무 쓸쓸해 자랑할 만한 동물도 하나 없다'는 내용이 핵심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입장료만 챙기고, 원내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는 구 왕궁관리국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졌다. 동시에 시민들이 가족을 동반하고, 휴식을 위해 찾아간 창경원이 시설 부족과 고장이 나도 수리조차 하지 않은 채로 방치해 놓으며, 황량해진 공원에 대한 실망의 목소리들이 연속적으로 터져 나왔다. 그럼에도 황폐해지고, 관리되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과 비난에도 불구하고 봄철이 되면 주말 하루 10만명 인파로 살인적 대혼잡 ・만원 전차로 비유될 정도의 사람들이 찾았다.

전쟁 이후에도 이같은 역할은 지속되었다. 전쟁으로 완전히 폐쇄된 창경원은 1952년 4월, 벚꽃이 한창일 적에 다시 개방되었다. 이듬해엔 대통령의 지시로 잠시 문을 닫고, 죽은 나무도 손질하면서 새로운 나무를 심거나, 최전방에서 기증된 짐승들을 확보하고 시설을 정비하는 등 내부 단장을 하기도 하였다. 동물원은 일제 말기의 맹수 학살을 거쳐 한국전쟁으로 '원숭이 ・곰 하나 없이 빈 건물만 남아 있었'고, 식물원에도 오로지 소철 한 그루만 멀쩡했다고 한다. 이에 서울시에서는 가장 먼저 인기가 있었던 동물원부터 정식으로 복구할 계획을 세우고, 복구 공사에 들어가면서 각종 동물들을 확보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1954년엔 '동식물원재건위원회'를 결성해 동식물을 해외에서 수집 ・수입해 왔다. 동식물원재건위원회는 자발적이라는 명목하에 정재계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구성되었다.  

그 멤버들은 위원장에 서울시장 김태선, 부위원장에 서울 부시장과 전택보 등이었다. 이들은 조직과 예산의 집행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으며, 상임위원으로는 자유당 부총재였던 이기붕 외의 14명으로 구성되었는데, 모두 정계의 유력 인사들이었다. 또한 재건 위원들은 국내외 각계의 유지 및 명사 80여명으로 이루어졌다. 회의 또한 서울시청 회의실에서 개최되는 등 서울시와 정부가 주도해 움직였다. 50년대 중반에도 전쟁의 휴유증과 복구로 지친 심신을 달래고자 창경원을 찾는 시민들은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창경원의 공원화에 대단히 부정적이었던 이 대통령조차 '국민이 그토록 바라고, 자진해서 복구에 나설 정도라면... 우리나라 유일의 동식물원이니 지금부터라도 확실히 계획하여 일제 때보다 훌륭하게 건설하라'며 구 황실재산사무총국장 윤우경에게 당부할 정도였다고 한다. 




            창경원 문물 보존지역 전경, 중앙의 정전(正殿) 명정전 행각 좌우로 동물원 축사들도 혼재되어 있었다.
            일제 말기와 한국전쟁의 수난을 거치면서도 국내 제일의 테마파크로 80년대까지 인기를 구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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