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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향수병 환자의 보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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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청일전쟁의 조선 전역(朝鮮戰役), 3세기만의 Remat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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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4년 6월 13일, 인천 제물포에 도착한 와카노우라 마루(和歌浦丸)와 일본 혼성여단의 선발 대대
                동학란 진압을 구실삼아 전날까지 청군(淸軍) 파견대도 아산에 상륙함으로써 전운이 고조된다.


              1894년 6월 16일,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 소장의 지휘로 인천만에 나타난 혼성여단의 수송선단  
              연합함대 전함 요시노(吉野)의 호위하에 수송선이 항만으로의 상륙 준비차 대기중인 모습이다. 


               임시 혼성여단의 제3차 수송단대가 제물포 일본인 거류지 근교에 주둔중인 광경, 1894년 6월 27일


                 인천과 서울간 도로상의 길목인 성현산(星峴山, 비루고개)에 감시 초소를 차린 혼성여단의 병영


                 서울 만리창(萬里倉)의 일본군 임시 혼성여단 사령본부 앞에서 회동한 오시마 소장 이하 막료들


                 만리창에 주둔한 일본군 포병대대 막사의 전경, 산기슭 도로 양측으로 취사장이 설치되어 있다.


               아현동에 주둔한 혼성여단 보병 제21연대 막사의 전경, 사진 촬영차 병사들이 대기중인 모습이다.


                  용산의 일본군 병참 사령부 전경, 6월 하순 만리창에 혼성여단 본대가 진주하면서 개설되었다.


             청일전쟁의 첫 포성이 울린 풍도해전 직후 아산만(牙山灣)에서 좌초된 청국 군함 광을(廣乙)의 잔해
             본래 광동함대 소속이었으나, 개전 전야에 견습차 북양함대로 파견 ・동원되었다가 최후를 맞았다.


                  좌초된 광을호의 내부 전경, 갑판의 목재는 피격 당시의 화재로 전소된 채 철골만 드러나 있다.


                   성환(成歡)에서 청군 선봉대를 격퇴시키고 만리창으로 복귀한 일본군 환영식, 1894년 8월 5일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 공사 이하 다수의 일본 관헌이 마중나와 개선 부대를 영접했다.


              노획된 청군 군기(軍旗)와 8문의 야포 등 전리품을 수송하며 성환으로부터 서울로 개선한 혼성여단
              문록(文祿)전쟁 이래 근 3세기만에 해외원정 정규전에서 일본 육군이 거둔 전첩으로 기록되었다.


                한강(漢江) 도하를 마치고 만리창으로 집결중인 일본군, 전방에 돌출된 촌락이 지금의 용산이다.             
                2주후 육로로 부산에서부터 올라온 제5사단과 합류하면서 서울 이북으로의 진공이 개시된다.


               1894년 9월 12일, 야마가타(山縣) 추밀원 의장의 지휘로 제물포에 상륙한 제1군 사령부 및 제3사단
               주력과 후속 부대가 분산된 제5사단을 지원해가며 평양으로의 진공에 대비해 편성 ・파견되었다.    
 

             제물포 부두 연안에 속속 상륙중인 제1군 예하 제3사단, 야마가타 사령관은 이튿날 서울에 입성했다.


                   대동강 좌안 선교리(船橋里)의 포격으로 전소된 민가, 청군이 구축한 방어용 보루가 산재했다.
                   이 부근에서 오시마 혼성여단과 마옥곤(馬玉崑)의 의군(毅軍)이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함락된 선교리 보루의 전경, 이곳을 사수한 청군은 섭지초(葉志超)의 본대에 비해 선전한 편이었다. 


                보루 부근의 탄환 자국을 살피는 일본군 병사들, 우측에 전사자 140명을 기린 추모비가 세워졌다. 


                 1894년 9월 16일, 오시마 혼성여단이 대동강 부교(浮橋)를 건너 평양성으로 입성할 당시의 전경  
                 좌측 후방으로 평양의 최고 명승(名勝)인 연광정(鍊光亭)과 대동문(大同門)이 나란히 보인다. 


                 평양성 시가 남쪽에 축조된 청군의 보루, 성내에 거주한 민간인들을 강제 징발해 건설한 것이다. 
                 보루 전면으로 청군이 버리고 간 장비들과 잔해가 널려졌는데, 총 35문의 야포가 노획되었다.


                 주작문(朱雀門) 외곽의 구릉에서 평양 남부를 바라본 전경, 혼성여단의 좌익이 이곳을 돌파했다. 


               모란대(牡丹臺)와 현무문(玄武門)의 전경, 그 배후로 청군이 세운 견고한 원형 보루가 버티고 있다.  
               현무문 위에서 독전을 무릅썼던 좌보귀(左寶貴)의 전사는 평양성 함락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평양성 함락 직후, 대동문 망루에서 시가지를 바라본 광경. 302년만에 일본군이 다시 들어왔다.


                   조선국 평안도 감사(監司)의 집무실인 평양 선화당(宣化堂)에 개설된 일본군 제5사단 사령부
                   평양으로 입성한 사단장 노즈 미치쓰라(野津道貫) 중장이 이곳을 접수, 군무를 총괄했다.  


                평양 대동관(大同館)에 들어선 일본군 병참 사령부, 본래 조선을 방문한 중국 사신의 객관이었다. 


                  일본군에게 생포되어 운집한 청국 패잔병 포로들, 2천명의 전사자와 6백명의 포로가 발생했다.
                  평양 공방전을 기점으로 청군이 조선반도에서 모두 축출당하자 전선은 남만주로 확대되었다.


                  승자의 관용을 베푸는 셈치고, 평양에서 부상당한 청군 포로들을 치료해주는 일본군 위생부대


              1894년 9월 17일, 세계 해전사상 최초의 증기선 함대간 교전인 황해해전에서 포격을 가한 연합함대  
              평양 함락에 호응해 해상으로 출격한 연합함대가 북양함대 호송단과 조우하면서 일대 격돌했다.  


             9월 17일 오후 1시 30분, 황해해전 와중에 전함 치요다(千代田)와 이쓰쿠시마(嚴島)가 항진중인 장면
             멀리 수평선 너머로 북양함대의 초용(超勇)이 일격을 받아 침몰하는 모습도 어렴풋이 포착되었다.  


             해전이 막바지에 접어든 오후 5시 30분, 경원(經遠)의 격침 순간을 요시노 선상으로부터 포착한 장면


                1894년 9월 18일, 황해에서 전첩을 거두고 대동강 하구로 개선한 622톤의 소형 포함 아카기(赤城)


                하시다테(橋立)를 선두삼아 대동강 하구 외곽의 임시 근거지로 귀환 ・개선중인 연합함대 전함들  


                1894년 10월말, 통군정(統軍亭) 전망대에서 바라본 압록강변의 국경도시 의주(義州) 시가지 전경
                문록전쟁 초기에 조선 국왕의 최후 피난처로 행재소가 설치됐으며, 만주와 인접한 요충지였다.


                 일본 제1군의 임시 사령부가 개설된 압록강변 의주산성 원경, 중국쪽으로 호산(虎山)이 보인다.
                 야마가타는 10월 25일 압록강을 횡단, 청국 영내로 진입해 구련성(九連城)의 공략에 나섰다.  
                   

                   압록강 도하를 앞두고 의주 관아 앞에서 현지 관헌과 회동한 제1군 병참 감부(監部)의 직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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