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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러시아 외교관의 청일전쟁 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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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모노세키(下關) 조약에 따라 일본은 막대한 배상금 외에도 포트 아서(Port Arthur, 旅順)라는 거대한 해군기지와 함께 대만과 팽호군도(澎湖群島), 요동반도를 할양받았다. 일부 유럽 열강은 이 조약의 마지막 조건이 과도하다고 여겼다. 일본이 강력한 전략 거점을 소유함으로써 청국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것을 걱정한 것이다. 러시아와 프랑스, 독일은 동맹을 결성했다. 이 동맹은 일본에게 극동의 항구적인 평화를 위해 요동반도에 대한 권리 주장을 포기하라고 권고했다. 일본은 제안에 동의함으로써 정치가의 현명함이 장수의 기량에 못지않음을 전세계에 보여주었다. 유럽의 개입에 대해 국내에선 커다란 반발이 일어나, 열강의 조언에 굴복한 대신들을 격렬히 비판했다. 아마 이보다 부당한 일은 없을 것이다. 요동반도 반환을 거부했다면 분명 끔찍한 전쟁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같은 전쟁은 일본인의 대담함에 지극히 어울리는 영광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전쟁에서 실제로 성취한 결과물을 모두 희생시켰을 것이다. 아무리 치열한 애국심을 가졌다 해도, 세계 3대 군사강국의 정중한 충고에 어느 정도 굴복하는 것은 결코 불명예스러운 일이 아니다. 현대 유럽의 엄청난 군사적 발전을 고려할 때 역사적으로 가장 가공할 이 동맹은 극동에서 일본이 가진 힘과 지난 전쟁에서 보여준 기량에 대해 최고의 찬사를 보내는 증명서였다. 이는 청일전쟁이 금세기 가장 주목할 만한 사건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로 본서의 서문에서 피력한 견해를 입증해준다. 일본의 놀라운 군사적 성공은 매우 특별한데다, 대단히 복잡한 고찰이 필요한 것이어서 주의깊게 분석해야 한다. 동방의 오스만(Ottoman)은 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함락과 더불어 전면에 등장했다.

오스트리아의 소비에스키 3세(Sobiesky III)에 의해 레판토와 빈에서 괴멸되기까지 2세기 이상 유럽 기독교 세계를 위협해왔던 오스만의 발흥 이후로 세계는 동방 민족의 군사적 성장을 더이상 목격하지 못했다. 더욱이 일본의 힘은 오스만 투르크의 힘보다 한층 더 질서정연했다. 우스만은 수적 우세와 광신적 용맹함으로 나라를 정복했고, 숙련을 요하는 군사 부문에선 대개 배교자(背敎者)의 도움을 받았다. 일본군은 과학적 원칙에 입각해 작전을 수행했으며, 단 1명의 유럽 장교의 도움도 받지 않았다. 전쟁의 내용을 고려한다면, 그 차이는 비교조차 안된다. 오스만의 정복이 전면적인 학살과 온갖 폭행으로 점철된 반면, 일본인은 모든 기독교 국가가 존중하는 인간애와 절제를 보여주었다. 평화적인 거주민들을 함부로 취급하지 않았고, 구급대와 야전병원에선 양측 부상자를 동등하게 치료했다.

청일 양국간의 수적 불균형을 고려한다면, 역사상 유사한 사례를 찾기 위해선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과 영국의 인도 정복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대로 지속되었더라면, 일본은 중국 전체를 점령할 수도 있었다. 이번 전쟁에서 주목할 만한 또다른 측면이 있으니, 바로 모든 공격 부대가 해상으로 수송되었다는 사실이다. 수개월 동안 일본은 적(敵)의 해안에 약 8만명의 병사를 상륙시켰다. 그처럼 엄청난 시도를 완수해낸 민족을 찾으려면 한니발 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게다가 이 모든 작전이 기껏해야 적의 함대[=북양함대]에 비해 전력상으로 약간 우월할 뿐인 연합함대와 대부분 전시에 사들였던 증기 수송선으로 수행되었다. 물론, 이러한 일본군의 신속한 성공은 형편없는 군사조직을 보유한 비(非)호전적인 민족을 상대로 전쟁을 수행했다는 사실 때문에 다소 평가 절하되기도 한다.

하지만, 효과적인 군사적 저항의 부재는 또다른 성격의 장애물, 즉 험난한 지형과 도로, 전쟁 후반기 동안 이어졌던 혹독한 겨울과 같은 조건에 의해 상쇄된다. 바다를 통해 전쟁을 수행해야 했던 일본 민족은 신속하고도 성공적으로 난관을 극복함으로써 일본이 대단히 효율적인 군사조직과 어떠한 비상사태에도 공급 가능한 병참부대를 보유하고 있음을 입증해 보였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성공에 놀라지 않았다. 그들이 유일하게 놀란 것은 외국인들이 그러한 결과를 의아하게 여긴다는 점이다. 일본은 이번 전쟁을 통해 전세계에 자국의 힘을 과시하였고, 위대한 문명국으로 확실히 인정받았다. 그러나, 이 진취적인 국가를 근거리에서 관찰한 바 없는 사람은 일본의 군사적 발전이 총체적인 국가 발전의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되새겨야 한다. 덜 알려졌으나, 그보다 중요한 다른 점들도 많다.

일본은 외국의 차관없이 자체 재원만으로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는 전쟁을 수행했으며, 전투가 지속된 수개월 동안 12만톤의 보급품을 날랐다. 하지만 국가는 부담을 느끼지 않았고, 무역은 오히려 번창했다. 일본의 제조업은 매우 발전하고 있어서 유럽이나 미국에서 생산된 품목 가운데 일본에서 제작할 수 없는 것은 거의 없다. 과학 분야에서의 진보는 놀라울 정도이다. 한 육군 장교는 총을 발명했고, 1894년 홍콩에서 흑사병이 창궐했을 때는 세균학 연구를 수행하고자 일본인 전문가가 파견되었다. 전시에 제2군의 수석 의사인 기쿠시(菊池) 박사는 태운 볏단에서 추출한 재가 부상자의 치료시 프랑스에서 쓰이는 석회 붕대 대용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하지만, 이 모든 물질적인 성과를 능가한 것은 바로 전쟁으로 촉발되어 모든 계층을 휩쓴 열렬한 애국심의 거대한 분출이었다.

온 나라가 마치 한 사람인 듯 느끼고 행동했다. 평소 그토록 비판적이었던 정파들도 전시엔 침묵했고, 모두가 앞을 다투어 자기 희생과 애국심을 보여주었다. 이같은 정서를 보여준 나라는 위대한 국가를 이룬 가장 핵심적인 요소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전쟁의 결과물은 일본에게 매우 중요하다. 팽호군도는 중국으로 가는 해상 진입로를 지배할 수 있는 뛰어난 전략 거점이었다. 대만은 풍부한 차[茶]와 설탕, 장뇌 생산과 더불어 일본의 무역을 크게 발전시킬 수 있는 영토의 확장을 가져왔다. 이제 일본은 아시아 대륙의 동측 해안을 따라 캄차카까지 거의 위도 30도에 걸친 강력한 '열도 제국'을 형성함으로써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2억냥의 배상금으로 국부(國富)가 늘어나고, 재무관료의 능숙한 관리하에 군사적 성공 못지않게 세계를 놀라게 할 통상 ・산업의 성장을 가져올 것이다.

일본의 장래가 밝다면 일본에게는 그럴만한 자격이 충분하다는 점도 인정해야 한다. 지난 30년간 지구상의 선진국 수준으로 성장하기 위해 일본의 최상급 인재들이 조용히 그리고 꾸준히 연구하고, 노력해왔다. 일본의 젊은이들은 조국의 번영과 위대함에 기여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찾아내고자 전세계를 탐험했다. 유럽과 미국으로 가는 기선(氣船)마다 온갖 계급의 일본인 승객이 있었으며, 모두가 학문과 자기 발전에 전념하고 있었다. 인간 활동의 어떠한 분야도 간과하지 않아 각국은 일본의 탐욕스러운 호기심 앞에 자신들의 최상급 지식을 내줘야 했다. 심지어 불교에 대한 지식을 발전시키기 위해 일본의 열성적인 신도들이 실론(Ceylon)을 방문하기도 했다. 지난 세대 동안 일본은 마치 거대한 벌집과 같아서 이 벌집의 동거인들은 사방에서 자신들이 본 최상급 정수를 수집하느라 분주했다.

이제 이들이 노력의 과실(果實)을 즐기기 시작한 것은 정당한 일이다. 일본의 역사에서 이러한 현상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과거에도 일본은 매우 완벽하게 중국의 학문을 흡수해 현재 한문학(漢文學)은 본고장보다 일본에서 훨씬 융성하고 있다. 유럽과 미국의 과학 ・문화를 흡수하려는 일본의 시도가 비슷한 성공을 거두게 된다면, 일본은 동양과 서양의 오랜 경험으로 축적된 지식이 융합되는 도가니가 될 것이며, 그로 말미암아 넓은 기반위에서 새로운 형태의 문명이 탄생할 것이다. 이번 전쟁의 엄중한 교훈은 청국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다만, 불행히도 현재로서는 그같은 징후를 찾아볼 수가 없다. 물질적인 타격은 이 거대한 제국에겐 극히 사소한 것이었다. 영토의 상실은 미미했으며, 군비 배상금은 청국내의 재정 체계의 결함 때문에 상대적으로 크게 비쳐질 뿐이었다.

중국의 인구를 최하 2억명 정도로 본다면[세기말의 전환기에 중국 인구는 이미 4억을 돌파했다], 배상금은 1871년 프랑스가 보불전쟁 직후 국가 번영에 별다른 지장없이 독일에 지불했던 금액의 1/30보다 적은 액수일 것이다. 설사 중국 대륙의 부(富)와 자원이 과장되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청국은 큰 부담없이 그 정도 금액을 지불할 능력이 있다. 대청제국(大淸帝國)이 일본에게 당한 패배는 자국이 천하의 중심이라는 중국인들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주었다. 하지만, 이번 전쟁의 결과로 국가 체제와 경영을 총체적으로 개혁하기 위하여 건강한 반작용과 결의를 새롭게 불러 일으켜야 한다. 청국이 이상의 결의를 실천으로 이행해 일본의 물질적인 진보를 적극 모방하고, 무엇보다도 일본의 민간 부문과 군사 부문의 장점들을 받아들이는데 성공하지 못한다면, 중국의 미래는 대단히 암울해질 것이다.


- By 청일전쟁의 결과 및 의의를 총결산, 양국의 진로 향방을 예견한 볼피첼리(Volpicelli)의 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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