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의 1시간 가량 쉬고 있는데, 호리구치(堀口) 등이 뛰어와 장병은 모두가 서대문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속히 가마를 출발시켜야 한다고 보고해왔다. 이에 일행은 바로 자갈이 많은 길을 서둘러 갔다. 처음의 방략서(方略書)에 따르면, 대원군은 남대문을 통해 경성으로 들어가 바로 경복궁으로 향할 예정이었으나, 남대분 안에선 매일 아침에 시장이 서서 혼잡할 뿐더러 서대문으로부터 들어가는 것에 비하면 경성내의 시가를 통과하는 거리가 엄청나게 멀고, 또한 일반의 주의를 끌 우려가 적지 않았기 때문에 예정했던 방략을 바꿔 서대문을 통해 들어가기로 했던 것이다. 그런데 공덕리에서 경성으로 통하는 길은 두 갈래로 가마가 나간 곳은 남대문 방면으로 통하는 길이었고, 수비대 장병들은 대원군이 서대문으로 통하는 지름길을 택하리란 예상하에 그 중간 지점인 고개 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때문에 그 사이 어긋남이 생겨 일행을 초조하게 했던 것이다. 이에 호리구치 등이 말을 달려 군대의 소재를 확인해 이를 보고하였기 때문에 일행은 가마를 호위해가며 남대문 밖에 이르러 다시 성밖을 돌아서 서대문 쪽으로 향했다. 이 때문에 오전 4시에 경복궁으로 들어가려던 예정이 완전히 처져버리게 되었다. 서대문 밖의 한 길이 의주(義州)로 통하는 길과 4거리를 이루고 있는 한성부청(漢城府廳) 앞에 가마가 이르자, 우범선(禹範善)이 인솔한 한국 훈련대 제2대대 장병이 행길의 왼편에 장렬해서 대원군을 맞았다. 일본 수비대의 사관 몇명도 또한 그 속에 끼어서 그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대원군은 가마를 4거리 복판에다 멈추게 하고, 스스로 가마 밖으로 나와 장병에게 일렀다.
"지금, 간신(奸臣)이 궁중에 있어 국왕을 업신여기니 나라의 안위는 그대로 앉아 볼 수 없는 바가 있다. 나는 단연히 일어나 궁중으로 들어가 간사한 무리들[閔氏一派]을 내쫓고, 사직을 반석 위에 놓으려고 한다. 너희들은 모름지기 나의 뜻을 받들어 진력(盡力)하라. 만일에 나의 입궐을 방해하려는 자가 있으면 당장에 이를 베어 없애라."
이 말 앞에 장병들은 다만 숙연할 따름이었다. 대원군의 가마가 서대문 밖에 도착하고도 다른 길목에서 대기중이던 일본 수비대가 오지를 않아 거의 1시간 동안이나 지체하였다. 새벽 별들은 점점 희미해져 가고, 먼동이 트려는 동쪽 하늘이 조금씩 밝아 갔다. 한국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어 놀란 표정으로 구경하고 있었다. 일행들은 모두 초조해져서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간 혹시 궁중에 소문이 전해지지 않겠냐며 가슴을 태웠으나, 수비대가 오지 않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러자, 이윽고 1명의 전령이 말을 달려 일행에게로 와서 얼마 안있어 수비대가 도착한다고 알렸다. 그럭저럭 새벽달은 빛을 잃어가고, 별빛도 희미해지면서 먼동이 트기 시작하는데, 그제서야 겨우 수비대 장병들이 달려왔다. 그들은 곧 한국 훈련대와 합류해 전투 준비를 갖추고, 혁낭의 탄환을 끄집어내어 총에다 재었다.
이리하여 대원군의 가마를 한 가운데로 해서 일본 수비대가 선봉을 서고, 훈련대는 가마 앞뒤를 호위하며, 최후방엔 또한 일본 수비대가 따랐다. 낭인들은 대부분 가마 옆에서 붙어 갔다. 뜀박질로 서대문으로부터 경성 시가로 들어가 정동(貞洞)의 서쪽 길을 달려서 회상전(會祥殿) 앞을 지나 경복궁 정면의 한 길로 나섰다. 너무 달려서 일행은 모두 숨을 헐떡이고 있었는데, 가마가 경복궁의 정문(正門)인 광화문에 거의 당도할 무렵 삐그덕거리면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때쯤 되어서 동쪽 하늘에 훤하게 먼동이 트기 시작했으나, 아직 사람의 그림자를 제대로 분간할 수는 없었다.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이기 때문에 우람스럽고도 훌륭해 웅장한 기운으로 주위를 굽어보고 있었다. 광화문은 가로 20여간(間)에 높이는 7간이 넘게 대리석으로 쌓아 올렸는데, 정면에다 3개의 대문을 만들었다.
중문(中門)은 국왕폐하의 출입문으로 평소엔 열지 않았으며, 좌우의 양문(兩門)을 관인(官人)들의 출입문으로 삼고 있었다. 이 문의 석벽(石壁) 위엔 장대한 고루(高樓)가 세워져 그 장엄함이 비록 쇠퇴해가는 반(半) 망국(亡國)이라 할지라도, 아직은 왕궁의 위엄을 우람스럽게 드러내고 있었다. 광화문 양쪽으로부터 뻗어나간 성벽은 높이가 5간 남짓해 멀리 경복궁의 사방을 감싸고, 왕궁 뒤에 있는 삼각산을 두르고 있었다. 야간에 광화문의 철문(鐵門)은 굳게 닫혀져 있었기 때문에 대원군의 가마가 서대문 밖에 머무르고 있을 동안에 먼저 수명의 일본 경관을 파견해서 문을 열도록 하였다. 일본 경관들은 광화문에 당도하자, 밤새 비상용으로 준비해 두었던 긴 사다리를 문 왼쪽의 성벽에다 걸고, 이를 타고 벽 위에 올라 다시 긴 밧줄을 석벽 안으로 드리워 놓았으며, 이를 타고 문 안으로 내려섰다.
이렇게 해서 정문의 내부로 들어가 보니, 경비하는 총순(總巡)과 순검, 병사들이 깜짝 놀라 한 사람도 저항하지 않고 다투어 도망쳐버렸다. 마침내, 굳게 닫혔던 왕궁의 철문도 이렇게 아무런 장애없이 열 수 있었던 것이다. 대원군의 가마는 일본 수비대와 한국 훈련대, 그리고 낭인 일당 30여명의 호위를 받으면서 광화문을 들어섰다. 이를 계기로 의기를 돋구운 일행은 문득 함성을 지르면서 돌진했다. 병사들은 총검을 총대에 꽂고, 낭인들은 시퍼렇게 날이 선 일본도(日本刀)를 빼어들었다. 바야흐로 수라장의 막이 열리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가마가 광화문에 들어와 한 30간을 치달려 두번째 소문(小門, 근정문)을 통과하려는 무렵, 뒷편에서 요란한 총성이 일어나면서 전투는 먼저 광화문 밖에서 벌어졌다. 우리 일행은 이 문밖의 전투에 개의치 않고, 그대로 궁중을 향해서 돌진해 들어갔다.
그러는데, 앞에서도 또한 총성이 들려왔다. 앞뒤의 총성이 고요 속에서 잠자고 있던 구중 궁궐에 메아리쳐 일시에 살기가 가득찬 광경으로 뒤바뀌면서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게 만들었다. 애초에 궁중에 들어서면 우리들의 전방에 있을 시위대와 충돌하게 될 것이고, 이 시위대를 돌파하지 않으면 목적했던 내전(內殿)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은 미리 짐작한 바이지만, 뒷편에서 일어난 총성은 어떠한 영문에서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행이 서대문 밖에서 수비대가 오기를 기다려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사이 소식이 궁중에 전해져 궁중에선 우리의 계획을 거꾸로 이용하려고, 우리를 광화문 안으로 끌어들여 전후 양편에서 협공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앞뒤로 적을 맞은 것으로 각오는 했지만, 어차피 목적지로 빨리 당도하는게 상책일 수밖에 없는 것 같았다.

광화문의 문루 유지(遺址), 중앙청 청사가 준공된 1927년에 이축시켰으나, 한국전쟁 도중 전소당했다.
낭인단 일행이 이 육중한 석축 관문을 돌파해 궐내로 진입하면서 여우 사냥의 살육극도 개시되었다.
달빛이 교교(皎皎)히 흘러내리는 한밤중에 우거진 수양버들의 그늘에다 가마를 멈추게 하고, 대원군이 우리들에게 궁중으로 들어가는 행동에 대해 여러가지 분부를 내렸을 때처럼 심장이 녹아들 정도로 엄숙하고, 또 장쾌한 기분에 잠겼던 일은 없었다. 그 위에 오카모토 류노스케의 통역하는 목소리가 낭랑하고도 힘있는 것이었다. 이때, 우리들은 너나할 것 없이 꼭 소설 가운데의 주인공들이 되어버렸다. 나중에 법정에 나아가 예심 판사로부터 심문을 받을 때, 그 당시 오카모토의 명령이 어떠한 것이었냐고 귀찮게 파고 들었으나, 나는 지금 적은 것처럼 진술하였다. 판사는 오카모토가 '여우[狐]는 베어버려라'고 명령하지 않았냐고 몇번이나 캐묻고 했는데, 혹 그런 말이 섞여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때의 정경(情景)은 말보다도 상상으로 느껴지는 것이 오히려 여운이 있어서 나을 것이다.
남대문 밖에서와 또한 공덕리의 고개 위에서 쉬면서 일본 수비대 장병들을 기다리는 동안에 겪은 추위는 대단했다. 우리들은 부근 민가에서 짚을 징발하여 화톳불을 피우고 있는데, 대원군은 가마 안에서 연성 기침을 하고 있었다. 노인이기 때문에 그랬으리라. 화톳불을 쬐고 있자니 낭인들이 찬 일본도가 불빛에 비쳐 번쩍거리고, 얼굴엔 살기가 가득차 어떻게 보면 산적(山賊)의 무리들이 어느 토호(土豪)의 집을 털러 들어가는 꼬락서니 같기도 했다. 우리가 서대문 밖에까지 뛰어갔을 때엔 이미 한국의 훈련대가 길가에 늘어서서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어떠한 심정으로 이 새벽의 사변(事變)을 맞고 있을까 상상해 보았으나, 그들은 조용히 줄지어 서있을 뿐 서로 말이 안 통하고, 얼굴도 알아볼 도리가 없어 그저 '무지한 한국 병사가 가엾구나' 하는 정도의 느낌밖에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 점점 먼동이 터오고, 사람들은 모여드는데 수비대는 오지 않았다. 한결같이 조바심을 내고 있는중에 이윽고 그들이 다른 길에서 나타났다. 이날 밤에 이렇게 길이 어긋나 거사에 참가 못한 낭인들도 있었다. 고바야시 마고이치로(小林孫一郞)도 그 한 사람으로 니이로(新納)라는 해군 소좌의 집에 몸을 붙이고 있던 그는 외출했다가 이번 일의 연락을 직접 받지 못했다. 밤이 깊은 연후에야 돌아와서 소식을 듣고는 <오사카 마이니치(大阪每日)>의 통신원 나카지마 시바노스케(中島司馬之助)와 함께 둘이서 성밖으로 나가 공덕리로부터 오는 일행을 기다리고자 새벽녘까지 길옆에 잠복해 있었다. 이들은 근방의 지리에 소상했기 때문에 공덕리에서 오는 길이라면 우리 일행이 택한 남대문으로의 길보다는 수비대가 대기중이던 가까운 길로 나오리라 짐작하고, 그쪽 길에서 기다렸다.
그랬기 때문에 두 사람은 끝내 합류하지 못한 채 추위에 견디다 못해 돌아가 잠자리에 들었다. 얼마 안가서 경복궁 쪽에서 총성이 일어나 사태가 벌어진 줄은 알았으나, 결국 참가하진 못했던 것이다. 드디어 장교가 병사들에게 전투 준비의 명령을 내렸다. 병사들은 혁낭에서 탄환을 꺼내어 총에다 재었고, 이렇게 곧 전투가 벌어질 것이라 생각을 하니 용기가 치솟아 일종의 표현하기 어려운 흥분된 감정이 끓어 올랐다. 우리들은 한국 병사들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일본 병사들을 앞뒤로 배치해서 나아가기로 했다. 나는 이 무렵 각기병을 앓고 있었고, 게다가 전날 밤부터 용산으로, 공덕리로 많은 길을 걸었기 때문에 광화문을 향해 행진을 시작했을 때엔 다리가 거의 말을 듣지도 않는 지경이 되버렸다. 이 무거운 다리를 끌고 병사들과 함께 뜀박질로 경복궁에 쳐들어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서대문으로부터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까지의 거리가 또한 꽤나 멀었다. 나는 숨을 헐떡거리며 거의 쓰러질 지경이 되면서 간신히 일행에서 처지지 않고 따라가긴 했으나, 그때의 괴로웠던 일은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광화문을 들어서자 일행의 대부분은 뛰면서도 칼을 빼들고 있었다. 그러면서 광화문 밖에서 일어난 총성을 들었던 것과 때를 같이해 '와아!!'하고 일제히 함성을 올렸다. 처참한 새벽의 정경 속에서 살기가 온통 경복궁을 에워쌌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광화문 밖에서 일어났던 총성은 궁중 시위대의 계획적인 협공은 아니었고, 민비(閔妃)가 태산처럼 믿었던 한국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洪啓薰, 임오년 당시 왕비를 구출한 이래 총애를 받아왔다)이 인솔한 훈련대의 일부와 일본 수비대 및 대원군에게 속했던 훈련대의 일부가 서로 총격전을 벌였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잠깐 얘기가 되돌아가지만, 일찍이 한국 훈련대는 일본 사관에 의해 교련을 받았으나, 점차로 궁중의 계교에 넘어가 그쪽 편으로 기울어져 간부엔 궁중파의 인물이 배치되었다. 위로는 형세에 따라 처신을 잘한다고 알려졌던 안경수(安駉壽)가 군부대신이 되었고, 민비의 총애를 받아 대단한 신임을 얻고 있었던 홍계훈이 연대장의 직책에 있었다. 홍계훈은 다시 그 부하인 제1대대장에도 민비파의 인물들을 배치시켜 단지 경골파(硬骨派)로 알려진 우범선만이 제2대대장의 지위를 보전해 고립무원의 처지에 있었다. 이날 밤, 우범선이 사면이 모두가 정적(政敵)인 속에서 그의 부하인 제2대대를 빼내어서 대원군이 궁중에 들어오는데 그 선구의 역할을 했다는데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고심이 있었으리라. 우범선은 [전날인] 7일 밤, 야외 연습을 핑계로 실탄을 병사들에게 분배하고, 병영을 나섰다.
실탄을 휴대한 야외 연습이란 실로 기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 조희연(趙羲淵)도 또한 일본 공사관 서기관 스기무라(杉村)의 방문을 받아 형세가 위급해진 것을 알았고, 7일 밤에는 직접 거사의 통지를 받았다. 그는 일전에 군부대신을 지냈던 관계로 곧 훈련대 제1대대 장교들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궁중에서 꾀하는 훈련대의 해산이 날로 박두했으며, 이로 인해 위험이 눈앞에 닥쳐왔음을 토설하고, 대원군의 입궐을 돕는 게 그들에게 얼마나 이로운가를 설득했다. 훈련대 장교들도 위기가 절박한 정세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희연의 권유에 따라 병사를 이끌고 건춘문(建春門) 밖에서 대기해 궁중으로부터 민비파가 도주해오는 것을 저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훈련대의 장교들은 원래 확고한 결심을 한 것은 아니었고, 다만 의혹이 짙은 태도로 형세가 돌아가는 것을 관망한데 불과했다.
- by 을미사변 당시 거사 결행에 동참했던 고바야카와 히데오(小早川秀雄)가 사변의 정황을 회고하며

석양의 노을을 머금은 근정전 일대 정원, 고려조 후기의 경천사 불탑과 조화를 이룬 기묘한 광경이다.
사변 당시 낭인들은 근정전 동측 회랑으로부터 진격하면서 샛길을 가로질러 건청궁까지 박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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