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3년 말, 나는 나의 계획의 2부를 실행에 옮겼다. 그 계획이란 '페타(PETA)'라는 의용군 형태로 우리 국민들에게 군사적 대비 태세를 갖추도록 하는 것이었다. 일본군은 그들이 점령한 영토의 도처에서 막심한 인명 피해를 입었고, 점차 세력이 약화되어 가고 있었다. 그들은 네덜란드 통치하에서 교육이란 받지 못하고, 또한 대체로 친(親)서방적 감정과는 거리가 먼 인도네시아 청년들을 그들의 편으로 끌어들이는데 몰두했다. 그들의 생각으로는 단순하고도 무지하며, 어린애 같은 토착민 청년이 다루기 쉽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러한 인도네시아 청년들에게 서방에 대한 증오심을 주입시키고, 인명을 살상하는 방법을 가르칠 작정이었다. 일본군 최고 사령부는 연합군이 침공해 올 경우, 그들에 대항하여 싸울만한 현지의 친일(親日) 민병대를 준비시키고자 페타 의용군 창설에 동의해 주었다.
일본 장성들의 입장에서 자국 병사의 피를 흘리느니, 인도네시아인의 피를 흘리게 하자는 책략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우리의 초라한 국민들을 유능한 군인으로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우리 국민들이 난생 처음으로 총기를 다루는 법과 그들 스스로 방어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도래했다고 보았다. 우리 청년들은 포복 자세에서 소총을 사격하는 법과 휘발유를 코코넛 열매에 넣어서 사제 수류탄을 제작하는 법도 배웠다. 일본군 사령부로부터 페타군(軍)의 장교가 될 만한 인물을 선정해 달라는 요청이 왔다. 그래서 나는 사령부의 요청을 최대 한도로 이용했는데, 내가 1930년 투옥될 당시 나와 옥살이를 함께 했었던 인도네시아 국민당(PNI)의 반란 지도자 가토트 망쿠프라자(Gatot Mangkoepradja) 같은 사람을 골랐다. 나는 우선 그를 페타의 총지휘관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내가 조종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혁명 영웅이 될 청년들도 물색했다. 1943년 가을, 나는 이미 우리 공화국 군대에 기용할 미래의 영관들과 장성들을 점찍어 놓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사람을 쓰기 앞서 그자에 대한 신상을 세밀하게 조사했다. 이들 발랄한 젊은이들은 그들의 총구를 미국인이나 영국인에게 겨누기 위해 훈련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조국을 위하여, 군대를 지휘하기 위하여 정력을 쏟았음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어떻게 그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겠는가? 그것은 내가 한 사람, 한 사람을 직접 교육시킨 까닭이다. 따라서 그들이 선택된 데 대해서 아무런 비밀이 없었고, 그들도 이해했으며, 하타와 다른 신뢰할 만한 지도자들도 모두 이해해 주었다. 그러나, 젊은 지하의 과격 분자들이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페타의 설립에 완강히 반발했고, 그 일로 나에게 도전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들의 반대 의사가 나에게 전달되어 왔다. 나는 내가 추진하려는 대업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 상당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하기는 했었다. 그렇다고, 일일이 그런 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여러분, 제발 나를 믿어주시오. 나는 일본의 동조자가 아닙니다'라고 머리를 숙이며 돌아다닐 한가로운 처지가 못되었다. 그러나, 가끔 몇몇 반대자들을 설득시킬 때도 있었다. 병원에서 나의 주치의가 '사람들 대부분은 일본군의 규율을 준수하는 것이 단지 일본을 도와주는 결과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요?'라며 문제를 제기하자, 나는 그를 심하게 꾸짖었다. '그것은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단견으로 궁극적인 목적은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의 준비 절차인 것이다. 그 이외의 목적은 없다'고 반박하자, 주치의는 일본과 협력해가며 싸우자는 약속은 파시즘을 도우는 격이라고 주장했다.
"그러한 사고 방식 자체가 잘못이네!"
나는 실망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야 당연히 일본군은 점령자이고, 응당 쫓아내버려야 할 존재들이지. 다만, 그들은 이용할 만한 점령자란 말이네. 나는 페타를 창설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협력했어. 이것은 사실이야. 그러나, 모든 것이 그들을 위한 것만은 아니야. 당신은 정녕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겠소?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며, 당신을 위한 것이오.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며, 나의 조국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 당신은 군대도 없이 차라리 영원한 식민지 상태로 남고 싶다는 것인가?"
"만약 일본군이 페타의 편이 되고, 우리가 일본군에 대항한다면, 결과적으로 반(反) 페타가 되버리겠네요?"
욕구 불만과 말라리아 때문에 나는 덜덜 떨면서 말했다.
"물론, 그들은 페타를 자신들과 더불어 연합군에 대항시키려는 심산에서 창설한 것이지. 그러나, 우리는 이 조직을 네덜란드가 되었건, 일본이 되었건, 우리들의 독립을 방해하려는 그 어떠한 적과도 싸울 수 있는 도구로서 이용할 작정이오. 사실, 페타군은 연합군의 적도 아니야. 그들은 오로지 인도네시아를 위한 존재일 따름이지."
"그렇기는 하지만... 모두들 당신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말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무슨 말을 한다는 거야?!"
나는 그의 말을 가로막으며 성을 냈다.
"내가 조국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다고 페타의 병사들이 믿는다면, 그들이 어떻게 나를 따르겠어?"
"그렇지는 않겠지요..."
"그럴 것이네. 그들은 지금 나를 따르고 있어. 그것은 당신도 인정하지요?"
"뭐, 그렇습니다. 전적으로..."
"그래서 말이오, 누가 감히 그따위 말을 지껄인다는 것이오? 말이 많은 것은 극소수의 흥분된 애송이들 뿐이야."
"그렇다면, 당신은 적들[=일본]과 협력해 나갈 셈이시로군요?"
"물론. 이 점을 분명히 해야겠어. 나는 나의 조국을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지옥의 악마와도 협력하겠어."
몹시 기분이 언짢았다. 이따금 익명의 종이 조각이 나의 방문 사이에 꽃혔던 적이 있었다. 어떤 쪽지에선 '우리들은 시궁창의 쥐보다 못한 나약한 지도자 밑에선 싸울 수 없다. 그러나, 황소 같은 투사가 지도자가 된다면, 기꺼이 싸울 것이다'라고 적혀 있기도 했다. 참으로 쓰라린 나날이었다. 나의 머리는 진통제로는 도저히 식힐 수 없는 고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재혼한 아내] 파트마와티(Fatmawati)는 근심스럽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나의 괴로움을 함께 나눌 재간은 없었다. 나는 스스로 '오리는 무리를 이루지만, 독수리는 홀로 날아간다'는 격언을 되새기며 자위하는 수밖에 없었다. 당시 하타는 여러모로 나를 도와주었다. 그는 대중 선동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지만, 적어도 나의 작전을 이해했으므로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페타를 위해 전개한 나의 선전 활동까지 거들어 주었다.
1943년 11월, 하타와 나는 일본 천황으로부터 [대동아회의 참관차] 동경(東京)을 방문해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나의 동료들은 날카롭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동경 방문을 만류했다. 일본에서 그들이 점령한 각국의 지도자들을 천황이 초청한다는 명목으로 데리고 갔는데, 그 지도자들이 모두 돌아오지 못했다는 소문이 떠돌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어떻게 되었단 말인가?"
"글쎄, 우리도 잘은 모르겠다만... 일본군이 그들을 비행기에서 떨어뜨려 죽였다고 하더군."
이런 이상한 비화를 남겨둔 채 하타와 나는 동경으로 떠났다. 일본의 민간 고위급 관리들이 우리를 영접해 주었다. 대동아성(大東亞省) 대신은 우리를 교토(京都)로 데리고 가서 그곳의 관광지들을 구경시켜 주었으며, 또한 누군가 우리를 위하여 15가지 코스로 준비된 만찬도 베풀었다. 게다가 그들은 우리를 국화 전시장으로 데리고 갔다. 그렇게 엄청나게 많은 꽃들을 난생 처음 보았다. 그들은 일본의 공업시장과 토지란 토지엔 모조리 식량이 자라나고 있음을 과시하고자 우리에게 농촌과 시골도 일주시켜 주었다. 도조(東條) 수상까지 그의 자택에서 우리에게 연회를 베풀어 주었으며, 다다미 위에서 일본식 요리로부터 시작하여 다음엔 서양식 가구가 비치된 방으로 자리를 옮겨서 양식을 제공받았고, 기생들이 춤을 추었다. 17일간의 여행 기간에 그들은 우리를 지나칠 정도로 후하게 대접했다.
강철 공장과 탄약 공장, 그리고 최대의 생산력을 발휘하던 조선창(造船廠)도 모두 구경해 보았다.
"그들의 공업력은 정말 놀라워. 우리들의 기를 꺾으려는 목적이라면, 그들의 전시 효과는 성공적이야."
하타가 대답을 계속했다.
"이번 여행은 자네한테 최초의 외유였지? 확실히 우리와는 엄청난 격차가 있지. 때문에 저들이 자네를 초청한 것이 아니겠나? 하지만, 나는 11년간 유럽에서 지냈어. 그곳엔 이보다도 더 큼직한 공장들이 즐비하게 널려있지."
하타와 나는 제국(帝國) 호텔의 호화스러운 방안에서 마주 앉아 서로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우리들은 방에 가져다 놓은 녹차와 과일을 멍하게 바라보면서 여러가지 생각에 잠겼다. 일본군은 강력하며, 전쟁에서 승리한다는 인상을 심어주려고 그랬겠지만, 아무튼 우리의 정치적 장래가 그들의 수중에 들어가 있다는 점을 잘 알 것이다. 그런데도 무엇 때문에 새삼스레 이렇게까지 보이려 하는 것일까? 그들은 예상보다 실제 전황이 훨씬 악화되었으며, 우리가 인식했던 이상으로 우리의 협력이 필요하게 된 것임에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가 천황을 알현한 이후부터 나의 예상은 더욱 적중해졌다. 의전관은 사흘간이나 우리가 천황 앞에서 취해야 할 행동과 자세를 설명해 주었다. 여러 발자국 앞으로 걸어가서 깊이 머리를 숙이며 절하고, 다시 몇 발자국 가서 머리를 숙이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천황을 알현하기 위해 특별히 줄이 쳐진 바지와 검은색 예복을 입고, 거울 앞에서 천황에게 경의를 표하는 방법을 연습해야 했다. 의전관이 우리를 전실(前室)에서 천황의 옥좌 앞으로 안내하는 사이, 하타와 나는 옷을 다시 고쳐 입었다. 우리는 깊이 숨을 들이켜 걸어서 들어갔는데, 천황이 먼저 악수를 청하면서 나에게 손을 내밀었을 때 나는 너무나 의외라 기절할 뻔했다. 모두가 놀랐다. 어리둥절한 일본 관리들은 나중에 설명하기를, '이것은 굉장히 드문 일입니다. 천황폐하께서는 외국인 방문객이라도, 고위직에 있는 사람이 아니고선 악수를 청하시지 않습니다. 폐하의 손이 낮은 계급의 손과 악수를 교환했던 일은 여태껏 단 한 차례도 없었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관례를 깨뜨린 이 사건속에 담겨진 파악할 수 없는 미묘한 사실을 캐내고자 모두가 여러가지로 난무한 해석을 내렸다.
내가 바타비아로 귀환하자, 일본 선무부(宣撫部)의 당국자는 이 전례없는 사건을 이렇게 설명했다.
"설명은 단 한 가지로만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천황께서는 당신을 친구로 생각하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당신네 나라의 국민들이 조만간 자유롭게 되리라는 것을 의미하는 좋은 징조입니다."
"천황이 우리가 언제 해방된다는 정확한 날짜를 발표한 것도 아닌데, 당신은 어떻게 단언할 수 있소?"
"천황께서 당신의 국가를 식민지로 생각했다면, 당신은 그분의 신하가 됩니다. 따라서 악수를 청하지 않았을테죠. 당신의 손을 만졌다는 것은 폐하께서 당신을 높은 정치적 수준에서 받아들였다는 말이 됩니다. 게다가 폐하께서는 그가 수여할 수 있는 최고의 훈장까지 당신에게 달아주셨습니다. 그 훈장엔 천황의 축복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축복'을 받을 만한 사건이 이듬해에 일어났다. 사태는 일본에게 점차 불리해져 일본군이 남태평양으로부터 철수하고 만 것이다. 연합군은 태평양에 소재한 일본군의 요새에 집중적인 반격을 개시하여 전황은 더욱 연합국에 유리해지고 있었다. 우리 국민들은 일본의 무적함대에 금이 가기 시작했음을 눈치챘다. 자바의 농민들이 일본군의 야만적이고도 잔혹한 착취로 아사해가는 한편, 보르네오의 반란에 가담했던 수천명의 지식인들은 일본군의 손에 희생되고 있었다. 1944년 2월, 블리타르(Blitar)에 주둔한 페타 수비군의 일부가 무장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전화 교환대와 경찰서 본부, 탄약고를 기습했다. 그러나, 이 대규모 반란을 점령 당국은 신속히 진압하고 말았다. 반란이 진압되자 일본군은 보복 수단으로 가담자들을 학살했고, 놀란 국민들은 다시는 저항을 일으키지 못했다.
국민들은 온통 나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국민들의 시선을 외면해야만 했다. 나는 힘이 없었다. 따라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없었다.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만, 수카르노 자신도 이 반란에 가담하고 있었다. 이 페타의 저항이 일본군에겐 정말로 뜻밖의 사건이었으나, 나에겐 그렇지 않았다. 즉, 나는 사전에 상세히 그 계획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고향이 블리타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때도 부모가 블리타르에 거주하고 계셨다. 내가 양친을 만나러 갔을 당시, 마침 페타군의 장교 몇 사람이 나를 찾아왔다. 그들은 거리낌없이 반란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아직은 계획이 착수 단계에 있으니, 나의 의견을 듣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는 괴로운 마음을 달래면서 '결과를 먼저 생각하라, 이러한 반란은 반드시 진압되고 만다는 현실을 인식하라'고 말했다.
나는 이 젊은이들의 단호한 결의를 도저히 꺾을 재주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한 마디만 충고를 건넸다.
"실패할 경우, 최악의 사태에 임할 각오가 있어야 하네. 일본군은 제군들을 처형할 것이야."
"당신은 우리를 변호할 수 있겠습니까?"
"할 수 없네. 제군들은 군인이지, 민간인이 아니야. 군법으로 다스린다면 유죄는 자명한 사실이지. 그리고, 여기서 내가 제군들에게 미리 밝히고 싶은 점은 만약에 제군들이 거사를 실천에 옮기겠다면, 나도 당연히 제군들 편에 서서 계획에서부터 도와주겠네. 그러나, 나는 나의 증거를 감추기 위해서 극도로 조심해야만 할 것 같아. 이 반란이 나의 고향에서 발생한 것을 일본군이 우연의 일치로 넘기리라고 생각한다면 커다란 오산이야. 그리된다면, 나도 구제될 가망이 없지. 나는 페타의 장래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거사와 관련해 그 어떠한 일도 부인하지 않을 수 없어. 페타는 앞으로 닥쳐올 우리들의 혁명에 없어선 안될 존재야. 나는 소수를 위하여 나의 전체 군대를 희생시킬 수 없네. 만약 제군들이 체포된다면, 페타의 나머지 조직을 보호하고자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해."
그리고 나는 소신대로 하였다. 일본군이 반란을 제압하고, 나의 젊은 부하들에게 사형을 선고했을 때, 나는 그들을 변호하지 않았다.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본서(本書)의 서두에서 언급한 바 있었지만, 나의 당시 몇 가지 기억들은 서술하기가 무척 고통스러웠다. 지금 적고 있는 이 몇 페이지도 나에겐 여간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아니다. 당시의 일들을 쓰려면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에 입은 내 상처는 완전히 가시지 않고 있다. 내가 하지 않으면 안되는 행동, 그리고 나를 이해하지 않으려 했었던 몇몇 사람들이 나에게 안겨준 고통, 나는 이 마음속의 상처를 무덤까지 가져갈 것이다. 이 고통스러운 기억들 가운데 먼저 징용자 이야기부터 해본다. 일본은 인도네시아외에 그들이 장악한 다른 점령지에서도 계획을 수행하는데 노동력이 절실히 필요했다.
징용자란 바로 그들이 거리나 마을에서 닥치는대로 잡아간 남성 노동자들을 일컫는 것이다. 16세부터 60세 사이의 남자란 하나도 남지 않게 된 여러 마을에서는 부녀자들이 밭을 갈았으며, 그밖에 힘겨운 일들을 계속해야만 했다. 수만명의 남자들이 모이면 반란을 일으킬지 모른다고 생각했던지, 일본군은 징용자들에게 상당한 액수의 노임을 약속하고, '노동의 영웅'이란 칭호까지 붙여주면서 이들을 달랬다. 그러나, 실제로 징용자들은 노예나 다름없었다. 나는 바로 이 징용자들을 모집하는 일을 맡았다. 이렇게 해서 외국으로 떠난 징용자들은 수천명씩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타국의 땅에서 죽어갔고, 저 악명높은 버마 도로를 건설하며, 마치 전쟁 포로처럼 쇠사슬로 한 줄에 묶여서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기도 했었다. 그들이 어떠한 일을 하는지, 어떠한 대우를 받았는지 나는 다 알고 있었다.
그들이 단번에 수천명씩 흡사 짐짝처럼 화물차에 실려갔다는 사실, 그리고 뼛골이 빠지도록 일하다가 죽어갔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도울 길이 없었다. 사실 그들을 보낸 장본인은 나였다. 그들을 보내서 죽도록 만든 장본인은 다름아닌 바로 나였다. 나는 징용자 모집을 지지하는 연설도 했다. 보고르(Bogor) 근처에서 나 스스로 머리에다 헬멧을 쓰고, 손에는 삽을 든 채로 징용자가 된다는 것은 이렇게 쉽고, 영광스러운 일이라는 듯 사진을 찍기도 했다. 언젠가 취재기자 및 사진기자와 군(軍) 사령관, 그리고 민간 당국자들과 함께 자바의 서쪽 끝에 위치한 반텐(Banten)의 금광과 석탄 광산을 시찰한 적이 있었다. 우리 국민들이 처참하게 뼈만 남아서 노예들처럼 광산에서 일하고 있었다. 참으로 처참했고, 절망적인 광경이었다. 그들을 내가 일본군에게 넘겨준 것이다.
이는 참으로 가공할 만한 일이 아닌가? 국민들은 지금 나의 이 말을 듣고 싶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들을 나무라지 않는다. 누구든지 훌륭하지 못한 진실은 꺼리고, 싫어하는 법이니깐. 그날 오후, 일본군의 모든 계획들을 마치 내가 승인하기라도 한 듯이 내가 징용자와 함께 찍힌 수백 장의 사진이 거리에 뿌려지자, 의과대학 학생 5명이 사무실로 찾아왔다. 내가 이름까지 알고 있었던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예의를 차릴 줄 아는 성인이 아니라, 혈기에 찬 피끓는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의 면상엔 노골적으로 나를 불신한 기색이 담겨 있었다. 그들은 나무로 된 무거운 문을 닫고선 높은 천장의 헛간과도 같은 방에 말없이 걸어 들어와 나의 책상 앞으로 다가서더니, '이대로 나가신다면, 국민들은 더이상 당신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라며 하나가 불쑥 말했다. '징용 문제에 대해서 이제 뭐라고 답하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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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질문에 나는 똑바로 대답했다. 위로의 말 따위 무슨 필요가 있을까?
"일하는 데엔 두 가지의 방법이 있다. 하나는 페타의 반란에서 보았듯이 피와 죽음을 필요로 한 혁명적인 방식이다. 그러나, 페타의 반란은 너무 일렀다. 우리는 해방의 방법을 택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아. 둘째는 일본에 협력하면서 우리들의 실력을 기르고,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시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나는 후자의 노선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어째서 우리를 팔아먹는 겁니까?! 무엇 때문에 우리를 일본놈들에게 넘겨주려고 하느냔 말입니다! 당신이 이 더러운 일을 맡아서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대신 가로챌까봐 그러시는 겁니까?!"
나는 주먹으로 책상을 힘껏 내리치면서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그건 절대로 아니다! 나는 그처럼 어리석은 생각은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나의 생각은 확고하다. 일본에게 그들이 원하는 것을 내주는 대신 우리가 자유를 찾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그들의 양보를 얻자는 것이다. 전쟁에는 사상자가 생기기 마련이야. 최고 사령관이 할 일은 전투에서 몇 차례 패배하는 한이 있더라도, 마지막엔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수백만명을 살리기 위해서 수천명을 희생시켜야만 한다면, 나는 그렇게 하겠다. 우리는 살아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자 투쟁하고 있다. 이 나라의 지도자로서 나는 그렇게 사치스러운 감상을 누릴 여유가 없어!"
나는 이 학생들의 눈을 일일이 응시하면서 한숨을 쉬며 말했다.
"자, 앉아봐. 그리고 솔직하게 질문해라."
"어째서 일본군에 반대하지를 않으시는 겁니까? 왜 그들을 도와주는 거죠? 왜 연합군을 비난하는 연설을 하시죠? 왜 '영국의 목을 조르고, 미국을 깔아 뭉개라'는 따위의 구호를 만들어내시는 겁니까?"
"그것은 일본군에 도움이 되도록 내가 군중을 조종하고 있음을 그들로 하여금 믿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나를 치워버릴 것이다. 우리는 우리 전체의 생명을 위하여 싸워왔던 투쟁의 막바지에 도달해 있다. 어떠한 희생을 치루더라도, 나는 현재의 이 위치에 머물러 있어야만 한다. 내가 일본에 압력을 가할 수 있는 입장에 있어야만 시기가 도래할 때까지 인도네시아의 명맥도 유지할 수가 있는 것이다. 너희들은 마음속 깊이 나를 알고, 신뢰하고, 신용해야 한다. 많은 국민들이 죽어간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수카르노가 없다면 너희들도 없을 것이다. 아니, 그보다 더 심각한 사태가 일어나 전체 국민들이 일본군의 포탄으로 사용될 운명에 놓여지고 말 것이다."
의대 학생들은 그때까지 나에겐 커다란 골칫거리였다. 대부분 샤리르(Syahrir)의 제자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말하는 지하운동의 가장 큰 결과는 일부 혈기에 넘친 젊은이들의 무덤을 스스로 파게 만들었다. 일본군이 교육을 감독하려 시도하자, 그들은 반항했던 것이다. 일본군은 본때를 보여주려 학생 지도자의 머리를 면도날로 삭발시키고, 단단한 각목으로 후려쳤다. 학생들은 스트라이크를 일으켰으나, 결국 투옥되었다. 그리고, 3개월간의 혹독한 고문을 당한 연후에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이러한 학생들은 아직 어린데다, 어떠한 정치적 의도가 전혀 없다는 것으로 변호한 사람은 바로 수카르노였다. 그리고, 그들을 석방시킨 사람도 수카르노였다. 나는 젊은이들에게 눈을 돌려서 '내가 하루도 빠짐없이 자신의 백성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다는 사실을 감히 부정할 자가 누구냐?'고 물었다.
학생들은 서로 쳐다보더니, 그중의 하나가 조용히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붕(Bung). 용서해 주십시오. 연합군의 반대 선전이 어찌나 극성인지 잊어버릴 때도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을 구해주신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정말로 강철처럼 굳은 의지없이 이같은 일을 감당하지 못할 겁니다."
"우리나라가 점령당하고 있다는 자체가 커다란 부담이 아니겠나? 학생 사건에서 일본군에 대한 나의 협력을 더욱 아끼지 않겠다는 것이 대가였고, 노동자 사건의 결과로 나의 지원이 늘어났어. 독립을 위한 강제 노동이지. 그것이 모두 일종의 흥정이란 말이네. 우리는 모임에서 우리의 국가(國歌)인 '위대한 인도네시아(Indonesia Raya)'를 불러도 괜찮다는 허가를 받았어. 그리고, 일장기와 나란히 우리의 신성한 국기(國旗)인 메라 푸티(Merah Putih)를 게양해도 좋다는 허가도 받았어. 또한, 군정 당국의 자문기관이 될 중앙 참의원의 설치도 그들은 허가해 주었단 말이야."
나는 나의 모든 사력을 다해 우리나라만을 보살피고 있다. 따라서 나를 찾아오는 청년들에게 일일이 나의 속마음을 털어놓아야 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이 나라를 위하여 나의 생활을 희생시켰다. 누구라도 나를 '일본의 협력자'라고 부르던지 나는 그들에게 나와 혹은 전세계에 내가 한 행동이 정당하다는 것을 굳이 증명할 필요가 없다. 인도네시아 해방사의 한 페이지는 나 수카르노의 피로 쓰여질 것이다. 그리고, 역사가 나의 정당함을 증명해 줄 것이다.

제국 호텔에서 거행된 방일(訪日) 환영 만찬회에 임석한 하타와 수카르노, 1943년 11월 11일
오른쪽 두번째가 난인(蘭印) 점령 당국의 최고 고문관 고다마 히데오(兒玉秀雄) 백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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