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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향수병 환자의 보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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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의 협력에 대한 수카르노의 변명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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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바해(海) 만구(灣口)를 통해 그리운 조국의 땅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정오의 햇볕이 따갑게 내리쬐는 가운데, 우리는 바다 냄새를 풍기는 크고 작은 배들이 줄지어 있는 곳을 지나 다시 부두에 연결시켜 만들어 놓은 양어장을 거쳐서 파사르 이칸(Pasar Ikan) 항구로 들어갔다. 항구의 입구가 어찌나 좁았던지, 두 척의 배가 간신히 서로 통과할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항구는 해산물을 파는 장사꾼들의 배로 들끓었는데, 바닷물이 몹시 더러웠다. 나뭇잎, 생선 대가리, 쓰레기들이 떠다녔으며, 생선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러나, 부축을 받고 돌계단을 올라서 육지에 발을 내려놓은 순간, 머릿속엔 '이것이야말로 내가 일찍이 본 것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다'라는 생각이 용솟음치듯 떠오르고 있었다. 우리들을 맞이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지나가던 어부 하나를 붙들고 말했다.

나의 처남이었던 안와르 초크로아미노토(Anwar Tjokroaminoto)와 반둥에서 나의 변호를 담당한 사르토노(Sartono) 변호사, 바타비아에 있었던 하타(Hatta)에게 연락해달라 부탁했다. 부두의 한 쪽 끝에 기울어져 가는 사무실 하나가 있었다. 일본 병사들이 들어오라며 손짓하면서 나에게 자리를 권했기에 그대로 앉은 채로 기다렸다. 안와르가 제일 먼저 달려왔다. 그는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부둥켜 안고, 누가 보는 것도 아랑곳없이 입을 맞추었다. 30분 가량 지나서 사르토노와 하타도 달려왔다. 하타와 나는 내가 [플로레스에] 유배되어 있는 동안, 단 한 차례도 서신 왕래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하고 싶은 말과 묻고 싶은 말들이 산더미 같았지만, 한 마디씩 질문을 던진 것외엔 서로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일본군의 점령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으로 보는가?'라며 하타가 물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일본군은 이곳에 오래 있게 되지는 않을거야. 그들은 전쟁에서 패배할 것이 분명해.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그들을 물리칠 수 있겠지. 표면상으로 공공연히 반대만 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고 믿네." 


이번에는 내가 질문을 던졌다.


"우리 동포들의 민족주의 정신은 어떠한 상태에 있는가?"

"전쟁 때문에 민족주의 정신에 영향을 미치고 있지는 않아. 모두들 벌써 '해방자'라는 일본군에 대해서 의심을 품기 시작했고, 형제 카르노(Bung Karno, 수카르노의 애칭 별명)의 귀환을 고대하고 있어요."


일본인들은 바타비아 시내의 가장 큰 거리에 소재한 호화로운 2층집 한 채를 나에게 내주었다. 잔디밭, 현관, 차고(車庫) 등 거의 없는 것이 없었다. 없는 것이 있다면, 네덜란드인들이 떠나가면서 일부러 깨뜨린 식기(食器)와 유리 그릇을 비롯한 깨지기 쉬운 집기들 뿐이었다. 아무도 내가 도착한 것을 몰랐다. 만약 알았더라도, 집회의 개최에는 매우 엄격한 규정이 적용되었으므로 환영 파티가 집에서 거행될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나는 그 집에서 '형제 카르노 영접 위원회'의 여러 위원들과 면회할 수 있었다. 그들의 안색은 기쁨으로 빛나고 있었으며, 저마다 무릎을 꿇고 나의 손에다 키스하면서 나는 그들의 손을 부여잡은 채 감격의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 나에게 거처할 장소를 마련하고자 노력한 것은 바로 이들이었다. 아흐마드 수파르조(Achmad Soebardjo)가 경위를 설명해 주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수용소로 붙들려 갔습니다. 그래서 거리에 나서기만 하면, 주인없는 저택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지요. 그런 집을 아내가 하나 찾았고, 사르토노 부인도 찾아냈습니다. 이 집도 2~3일 전에 발견한 것입니다."

"이건 정말이지, 훌륭한 저택인데..."

"방문객도 많을거라 예상되어서 방이 많은 큼직한 저택이 필요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당신께서 곧 돌아오신다는 소문이 퍼지더니, 마을 사람은 물론, 멀리 산악지대나 해안의 주민들까지도 모두 흥분되어 들떠 있답니다. 지금은 비록 가난하기는 해도, 그들은 당신을 한 번만이라도 만나 보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정말 당신께서 이곳에 본거지를 정하고, 그들의 영웅이 되어서 모든 지휘를 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날 저녁, 아내와 나는 새로운 집 근처에 있는 가로수가 넓게 우거진 바타비아의 부촌(富村)을 산책했다. 이 얼마나 오랜만인가! 그것은 거의 13년이나 되는 세월이었다. 밤중에 나는 하타의 집으로 가서 첫 전략 회담을 가졌다.


"자네와 나는 한동안 매우 심각한 논쟁의 시기를 가진 적도 있었네. 서로 불쾌해하며 지나쳐버린 시절도 있었지만, 우리는 이제 우리를 각자의 일보다 훨씬 더 중대한 일을 맡게 되었어. 당(黨)의 입장과 전략적 견지에서 우리는 이제 이견을 가질 여지가 없게 되었지. 우리는 일심동체로 공동의 투쟁을 위해 한 덩어리가 되어야만 해."


내가 이렇게 운을 떼자, 하타는 힘주며 동감한다고 답했다. 우리는 엄숙히 악수를 나누며, 손을 잡은 채 말했다.


"이것은 '드윗퉁갈(Dwitunggal)', 두 가지가 동시에 하나라는 인도네시아의 상징이야. 더불어 손잡고, 일하면서 우리 조국이 완전히 독립하는 그날까지 결코 헤어지지 말자는 우리들 사이의 엄숙한 맹세란 말이네."


향후의 활동 계획은 매우 순조롭게 짜여졌다. 우리 이외에 샤리르(Syahrir)가 동석했다. 우리는 두 가지 측면에서의 기능, 즉 표면에 내세워 할 수 있는 일과 지하(地下)에서 비밀리에 추진해야만 할 일, 두 가지가 있다는 점에 의견을 모았다. 두 가지의 어느 방면에서나 한 곳에서 할 수 없는 일은 상대측에서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바타비아에서의 첫날 밤, 나는 잠자리에 들었으나 흥분이 좀처럼 가시질 않았고, 아침까지 거의 뜬 눈으로 새우다시피 했다. 그러나, 나는 이튿날 이마무라 히토시(今村均) 장군을 만나야만 했다. 이마무라는 네덜란드 총독이 입주했던 궁전의 거실에 앉아 있었다. 내가 지금 서재로 활용한 바로 그 거실이기도 하다. 이마무라 장군은 문자 그대로의 무사(武士)였다. 살집이 별로 없었으며, 중간 정도가 조금 넘을까 말까하는 신장에다 점잖고, 고상한 풍모를 갖추고 있었다.

장군은 나에게 먼저 자리를 권하고는 자기도 착석했다. 그의 자세는 꽃아서 세운 듯이 곧았다. 나는 자바어로, 그는 일본어로 대화를 가졌는데, 통역이 말을 읊어주었다. 나는 혼자였지만, 이마무라의 옆에는 부관이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을 꺼냈다.


"내가 당신을 자바로 부른 것은 조금도 나쁜 뜻에서가 아닙니다. 당신의 의사에 거슬리는 일을 강요할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우리와의 협조를 원하든, 계속 방관적인 입장에 머무르든, 당신의 의견 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일본 정부가 인도네시아를 위하여 어떠한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나 이마무라는 원정군 총사령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귀국을 일본 정부의 관할하에 놓인 고도의 자치령으로 만들 것인지, 혹은 일본 연방의 하나의 구성체로서 자유를 얻도록 할 것인지, 아니면 완전한 주권국으로 독립을 이루게 될 것인지의 여부는 오로지 천황폐하께서 결정을 내리실 사안입니다. 나는 당신들이 어떠한 형태의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에 관련해서는 뚜렷한 언질을 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결정은 전쟁이 종결되기 이전까지는 밝혀지지 않을 것으로 압니다. 다만, 우리는 당신들의 목적이 무엇이고, 당신들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점에 있어서 당신들이 원하는 바와 우리가 원하는 바는 비교적 서로 합치되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장군. 우리가 증오하는 네덜란드인들을 축출하신데 대하여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나는 다년간 이를 달성하고자 애써왔고, 우리 조국은 수백년간에 걸쳐서 투쟁했음에도, 결국은 장군께서 이루어주셨군요."


이마무라가 말을 이었다.


"수카르노 박사, 내가 인도네시아에서 강력한 백인들을 어떻게 굴복시켰는지 얘기해 드릴까요? 그것은 기만 전술 덕분이었습니다. 순전한 기만 전술이었지요. 우리 부대가 자바에 상륙했을 당시, 남은 병력은 겨우 2~3개 대대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나마도 나는 이 병력을 분산시켜야 했소. 일부는 서부 자바와 중부에 투입시키고, 다른 일부는 바타비아와 반텐(Banten)에 진주시켰습니다. 내가 직접 지휘한 부대는 칼리자티(Kalijati)에 상륙했었죠."


그 순간,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감출 길이 없었다. 이마무라가 웃음을 머금으면서 자신의 전승(戰勝) 경과를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한테 자랑스럽게 설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마무라의 공훈담은 계속되었다.


"장병들 모두가 넝마를 걸치다시피 했었습니다. 무기는 있었지만, 마땅한 군복이 부족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내가 도착하기 조금 앞서 네덜란드 총독[그는 만주의 수용소로 이송되었다.]은 반둥으로 벌써 도망가 있었습니다."

"반둥은 산으로 둘러싸였기 때문에 방어하기 쉽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지요?"

"바로 그렇습니다. 나는 반둥으로 연락을 취하고, 그에게 칼리자티에서 평화 회담을 열자고 제안했습니다. 총독이 황급히 달려왔더군요. 내가 조그마한 방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큰 소리를 치기는 했지만 나를 후원할 만한 병력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나는 그자에게 '자, 그럼 항복을 하겠소, 하지 않겠소? 만약 항복하지 않는다면, 나는 당신들이 아주 전멸될 때까지 계속 포격하겠소!'라고 호통쳤지요. 그랬더니, 그는 부하들을 데리고 항복해 버렸습니다."

"지칠대로 지쳐버린 잔여 병력만 이끌었음에도 인도네시아의 폭군으로 기약없이 군림했을지 모를 네덜란드인을 몰아내셨으니, 우리들은 장군에 대한 감사를 영원토록 잊지 못할 것입니다."


내 앞에 마주 않은 득의양양한 정복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같은 연극을 연출하면서 필리핀의 영웅 아기날도 장군을 떠올렸다. 그는 스페인과 다년간 전투를 계속하다가 미국이 스페인 세력을 축출하자, 처음엔 미국인들에게 감사를 표명했으나 미국이 그대로 눌러앉기를 원하자, 그때는 미국인들을 몰아내고자 전력을 다했던 것이다.


"군정(軍政)은 얼마나 계속될 예정입니까?"

"전혀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아직 구체적인 계획조차 전혀 짜여있지 않았으니깐요."


나한테는 그 계획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최초의 행동을 개시했다.


"우리 국민을 군정 당국에 협력시키기 위해선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대민(對民) 업무는 인도네시아인이 직접 행정 분야에 배속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할 것입니다. 토착민이 아니고선 지리와 언어, 풍습을 어떻게 이해하겠소?"

"만약, 그렇게 하는 것이 번영과 복리를 촉진시키는 최선의 방법이라면, 인도네시아인을 점진적으로 행정 업무에 참가시키도록 하겠소. 일단, 정부의 각 부처 직위는 즉시 그들에게 개방될 것입니다."


정치적인 거래면에서 본다면, 나는 그보다 한 수를 더 앞서고 있었다. 그는 무기를 사용하는 일엔 능숙했지만, 군의 일개 지휘관에 불과했다. 그러나, 나는 정치적 지도자였다. 국가를 세우고, 다스리는 일은 나의 본래 임무에 속하는 일이었다. 나의 손 안에 그는 어린아이에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날 저녁, 나는 하타에게 나의 계획을 밝혔다.


"일본 정부의 부담으로 장차 행정을 맡을 관리를 양성할 수 있어. 그들도 명령을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명령을 내릴 줄 아는 요원으로 교육시켜야 해. 그들이 앞으로 장관도 되고, 국장도 되고... 언젠가 우리가 승리하여 독립을 선언하게 될 그날을 위하여, 그들의 손에 행정의 고삐를 맡겨야지. 관리없이 어떻게 정부를 운영해 나갈 수 있겠소? 이전엔 모든 분야의 행정 관리가 네덜란드인... 말단의 사소한 부문도 네덜란드인이 자리를 꿰어차고 있었어."


하타가 맞장구를 쳤다.


"우리 동족은 우체부 아니면 심부름꾼이 고작이었지. 언제나 비천한 일만 하고, 반(半) 노예나 다름없었어!"

"지금이야말로, 이 가난하고 언제나 짓밟힘당한 무지한 우리 동족들이 관리가 될 기회야. 그들이 정책을 결정하고, 사무를 처리하고, 명령도 내리는 훈련을 받게 될 것이야. 내가 씨를 뿌리면 일본인들은 그것을 가꾸어 주겠지."


나는 침을 뱉으면서 말했다.


"그러기에 조금이라도 식견있는 사람은 네덜란드를 증오했어. 그들도 협력을 요구했지만, 우리에게 이득을 보여준 것이 도대체 뭐란 말이야? 내덜란드인의 그 위선적인 행태는 생각만 하더라도 구역질이 나. 그들이 우리에게 해준 것이 과연 뭐였나? 나더러 일본군과 협력한다고 비난한 사람도 있어. 허나, 협력하지 못할 이유가 또 어디에 있나?! 우리 가까이 있는 것을 이용하는게 나에겐 가장 현명한 작전이기 때문에 나는 거기에 열중하고 있는거야." 


1942년 3월, 나는 새로운 조직체인 '푸테라(Putera)'를 이끌어 나가기 위해 처음으로 공식적인 임무를 맡게 되었다. 일본은 이 '인민 인력 동원본부'를 내가 그들의 전쟁 수행 능력을 뒷받침하는데 인도네시아인들을 규합시킬 수단의 일환으로 정식 승인해 주었다. 나는 이 조직을 순수 정치 조직을 보유할 수 없는 현재 시점에서 우리가 이용 가능한 차선의 수단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이 조직의 회장인 나의 임무는 민간에서 일어나는 말썽들을 수습하는데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식량 사정이었다. 일본군은 쌀을 닥치는대로 차압해버려 반드시 필요한 사람들 이외엔 1kg의 쌀도 얻을 수 없었다. 발리에서는 아사자가 발생하기까지 했다. 나는 많은 양의 파파야 열매를 확보해놓고, 1인당 2개씩 배급했다. 당국은 식량 부족에 대한 불평을 무마하고자 부락마다 스피커를 설치해 커다란 방송망을 구축했다.

덕분에 그때까지 수카르노의 이름만 들어왔던 사람들도 그 목소리를 직접 들어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식량 부족 사태로 유발될지 모르는 일본인들에 대한 증오심을 덜어주어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 나는 여기에 관해 일본을 변호하는 이야기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나의 '명령'은 보통 '연합국을 공격하고, 추축국을 찬양하라. 우리의 적인 영미(英美)와 네덜란드를 적대시하고, 일본 제국에 협력하자'는 식이었다. 나의 연설문은 선전부(宣戰部)에서 사전에 엄밀히 검토받았지만, 주의깊게 정독해 본다면 그중의 75%가 순수한 민족주의적 내용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총검을 가진 파수병 하나를 가리켜 '그는 자신의 조국을 사랑하기 때문에 저렇게 견디고 있는거요. 그는 자신의 민족을 위하여 싸우고 있소. 그래서 조국을 위하여 목숨조차 아까워하지 않는 것이오'라고 말했다.

이마무라 장군은 나의 연설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 그는 나의 비유가 정복된 나라들을 한데 열거해 놓은데 불과한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손이 닿을 수 없는 지역의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논설을 쓰거나, 여행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면 그는 신문 지면과 비행기를 마음껏 이용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는 나에게 직접 군중대회에 나가서 연설하도록 주선하기까지 했다. 5만명이 운집한 대회에서, 혹은 10만명이 운집한 대회에서도 연설했으며, 나는 단순히 이름 뿐만 아니라 직접 얼굴까지도 전국에 널리 선전할 수 있었다. 나는 이 일에 관해서만큼은 지금도 일본인들에게 감사해하고 있다. 내가 민중을 자각시키고, 고무하거나 감동시킬수록, 일본인들은 더욱 나의 협조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내가 이러한 지위 때문에 줄곧 편하게만 지냈다고 생각한다면 커다란 오산이다.

다른 사람들의 식량이 떨어져갈 무렵이면 우리 집에도 식량이 바닥나기 일쑤였다. 나는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직접 쌀을 구하러 사방을 다녀야만 했다. 전체 민족의 지도자로 일하는 나였지만, 가장 가난한 농부와 마찬가지로 몇되의 쌀을 구하고자 시골을 이리저리 헤매기까지 했다. 등화관제(燈火管制)가 실시되었을 당시의 일이다. 내가 어쩌다가 미처 집안의 등불을 끄지 못했던 적이 있었는데, 어둠속에 잠시 불빛이 새어 나가고 말았다. 나는 황급히 불을 껐지만, 이미 그때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히 들려오고 있었다. 아내가 뛰어나가 보니, 문간에 여러명의 일본 헌병들이 서 있었다. 아내가 누굴 찾아왔냐고 묻자, 대위 한 사람이 '집 주인이 누구냐'며 버럭 소리를 지르며 묻는 것이었다. 내가 밖으로 나가자, 헌병은 불빛이 샜다며 야단치더니 손으로 나의 뺨을 갈기기 시작했다.

아내가 아무리 사정과 애원을 해도, 그들은 아랑곳없이 마구 폭행을 계속했다. 이윽고 나는 얼굴이 터지고, 입술과 코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일체의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런 변명도 없이 다만 마음속으로 우리가 겪는 고통은 독립을 위한 밑거름이 될 수 있다, 반드시 참고 견디자,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 일어나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계속 걸어나가자고 되뇌면서 조용히 서 있었다. 나는 이날 저녁에 일어난 사태를 군정장관 나카야마(中山) 대좌에게 말했다. 그러자, 나카야마는 '그 대위는 수카르노 박사가 누구인지 몰랐기 때문에 그런 일을 저지른 모양입니다. 곧바로 그에 상응한 조치를 내리도록 하겠습니다'라며 심심하게 사과하면서 답했다. 이마무라 장군은 이따금 자신이 직접 민중에게 연설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청중은 거기에 대해 거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럴 때면 나는 열띤 어조로 그의 연설을 풀이하고, 간간이 수카르노식 표현을 그속에 삽입시켰다. 그러면, 청중은 열띤 반응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나의 발언이 끊어질 때마다 소리를 지르거나 박수를 쳤다. 현병대에선 이를 두고 차츰 의심하기 시작하더니, 결국 나를 헌병대로 끌고 가서는 고함을 질러가면서 위협을 가했다. 나는 이제 꼼짝없이 죽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통역을 데려다가 나와 대질시켰는데, 비록 그들이 고용한 통역이었지만 그는 나를 감싸주었다. 그는 내가 한 말이 모두 거짓이 아니었음을 보증해 주었다. 등골에서 식은 땀이 흐르는 수시간 동안의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나는 석방되었다. 어디를 가나 나의 배후엔 일본군 장교가 뒤따랐고, 비밀리에 나의 거동을 샅샅이 조사했다. 헌병대에선 가끔 예고도 없이 방문한 바람에 나는 한시도 마음을 놓고 지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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