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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사기사본말(宋史紀事本末) 87권, 이전(李全)의 반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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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종(寧宗) 가정(嘉定) 4년(1211) 11월, 금나라 익도(益都, 산동성 청주시)의 양안아(楊安兒)가 반란군을 일으켰다. 처음에 익도 사람 양안국(楊安國)은 어려서 건달이었다가 안장 재료를 파는 것을 생업으로 삼으니 고을 사람들은 '楊鞍兒'라 불렀고, 이윽고 스스로 '楊安兒'라 이름지었다. [金章宗] 태화(泰和)연간의 남침[=開禧北伐의 반격] 당시 산동에선 무뢰배들이 종종 서로가 겁략하며 취했는데, [조정에선] 주현(州縣)에 이들을 체포하라 명했다. 양안아는 당시 도적떼에 투신했다가 역시 항복을 요청했고, 군대에 예속되어 관위가 쌓여 방어사(防禦使)에 이르게 되었다. 몽고군이 중도(中都, 燕京)로 육박하자 금나라 사람들이 군대를 소집해 견고히 방어하여 결사적으로 싸우게 하면서 1천여명을 얻었고, 당괄합타(唐括合打)를 도통(都統)으로, 양안아를 부도통(副都統)으로 삼아 변방을 지키게 했다. 양안아는 계명산(雞鳴山)에 이르러 더이상 진격하지 않고, 달아나 산동으로 돌아와 장여집(張汝楫)과 함께 무리를 모아 주현을 위협해 공격했으며, 관리들을 죽여 약탈하니, 산동지방이 크게 소란스러워졌다.

가정 7년(1214) 12월, 금나라 유주(濰州, 산동성 유방시)의 이전(李全)이 반란군을 일으켰다. 이전은 유주 북해(北海) 농가(農家)의 아들로 머리가 뾰족하고, 눈매가 날카로웠으며, 권모술수로 아랫사람을 잘 대해주고, 궁술과 기마에 민첩한데다 철창(鐵鎗)도 능숙히 운반할 수 있었으니, 사람들은 그를 '이철창(李鐵鎗)'이라 불렀다. 개희(開禧)연간, 친척과 더불어 이미 복연수(復漣水)의 무리를 결성해놓고 있었다. 금나라 황제가 개봉(開封)으로 천도하면서부터 징세가 늘어나고, 심해졌다. 하북(河北) ・산동의 유민들은 험한 곳을 막아 요새를 보호했는데, [양안아가] 그 무리를 얻어 도적으로 삼아 고을들을 침공해 약탈했으며, 모두 빨간색 옷감을 거두어 상의로 착용하면서 서로를 식별하니 당시에 이를 '홍오적(紅襖賊)'이라 일컬었다. 이전과 둘째형 이복(李福)도 수천의 무리를 얻어 산동을 노략했는데, 유경복(劉慶福), 국안용(國安用), 정연덕(鄭衍德), 전사(田四), 우양(于洋), 어담(於潭) 등이 모두 이전에게 귀부했다. 가정 8년(1215) 2월, 금나라의 [山東宣撫使] 복산안정(僕散安貞)이 양안아를 익도에서 무찔러 패배시켰다.

양안아는 등주(登州)로 달아났는데, 자사(刺史) 경격(耿格)이 고을을 그에게 바쳤다. 양안아가 황제를 참칭해 관속(官屬)을 설치하고, 천순(天順)이라 개원하니 무리가 수십만에 달했다. 복산안정이 재차 산동행성(山東行省) 완안정(完顔霆), 경력(經歷) 황국(黃國) 등을 화모군(花帽軍)의 장수로 삼아 이를 토벌하여 패배시키니, 무리가 전멸당해 양안아는 배를 타고 바다로 들어가 우산(嵎山)에 이르렀다. 뱃사람 곡성(曲成) 등이 안아를 공격하자 안아는 바다에 떨어져 죽었다. 아들이 없었고, 여동생인 사낭자(四娘子, 楊妙眞)는 간특하고 사나워 기마와 궁술에 능했는데, 유전(劉全)의 잔당을 거두자 그녀를 받들어 '마님'이라 부르며 무리 1만여명을 더했다. 식량을 노략해 마기산(磨旗山)에 이르러 이전의 무리가 귀부해 양묘진과 사통하더니 남편이 되었다. 복산안정이 협곡석리가(夾谷石里哥)를 파견해 유이조(劉二祖)를 무찔러 참수하자 잔당이 곽의(霍儀)를 장수로 추대하고, 팽의빈(彭義斌), 석규(石珪), 하전(夏全), 시청(時青), 배연(裴淵), 갈평(葛平), 양덕광(楊德廣), 왕현충(王顯忠) 등이 송나라로 귀부해왔다.

가정 10년(1217) 가을 7월, 초주(楚州, 강소성 회안시) 지사 응순지(應純之)는 산동의 도적들이 귀부해오자 충의군(忠義軍)을 설치했다. 당시, 이전 등이 도서(島嶼)에 출몰하면서 금은보화를 쌓았음에도 식량을 얻지 못하자 서로 거느리며 사람을 잡아먹었다. 진강(鎭江) 무봉군(武鋒軍) 사졸인 심탁(沈鐸)은 산양(山陽)으로 도주해가 미곡상을 유치하며 이윤의 수십배를 벌었다. 응순지가 옥화(玉貨)로 [심탁의 양식을] 보상하면서 북방 사람들이 [금나라를] 버리고 귀순케 했다. 심탁이 순지를 설득해 동전(銅錢)의 회수를 빌미삼아 회하(淮河) 도강 금지령을 느슨히 하자, 이로부터 귀순자를 저지할 수 없게 되었다. 당초, 양안아가 아직 패망하기 앞서 송나라에 투항하려는 뜻을 가졌는데 정원(定遠)의 백성 계선(季先)이란 자는 대협(大俠) 유우(劉佑) 집안의 종복으로 양육되어 유우를 항상 수행하면서 산양에 의탁해 무리들을 통솔했는데, 양안아가 이를 보고 기뻐하며 군직에 임용했다. 양안아가 죽자, 계선은 산양에 이르러 심탁과의 인연으로 응순지를 만나 산동의 호걸들이 송나라가 돌아오는걸 바라고 있다며 귀띔했다.

응순지가 계선에게 명령해 동태를 염탐하고 여러 호걸들을 초유케 했으며, 심탁을 무봉군의 부장으로 삼아 고충교(高忠皎)가 각자 모집한 충의군의 민병(民兵)과 더불어 두갈래로 길을 나누어 금나라를 치게 하였다. 계선이 마침내 병사 5천을 이끌어 고충교에게 귀부하고, 병사를 연합해 해주(海州, 강소성 연운항시)를 공격했으나 군량의 원조가 이어지지 않자 퇴각하여 동해(東海)에 주둔했다. 응순지는 북군(北軍)이 자주 전첩(戰捷)을 거두자, 은밀히 조정에 소식을 알려 중원(中原)의 수복을 허락해달라고 청했다. 당시 송나라에선 매년 조금씩 풍년이 들고, 조야(朝野)가 무사하여 승상(丞相) 사미원(史彌遠)은 개희연간의 사태를 거울삼아 명확히 받아들이진 않았으나, 비밀 칙령으로 응순지를 위로해 대접하고, 충의군이라 호칭하며 나아가 통제를 듣도록 명하면서 충의군의 식량을 지급해주었다. 이때에 이르러 동해의 마량(馬良), 고림(高林), 송덕진(宋德珍) 등 1만명이 연수(漣水)로 몰려들자, 이전 등이 귀순할 생각을 가졌다. 11월, 이전과 그 형 이복이 금나라 청주(靑州)와 거주(莒州)를 공격해 탈취했다.

가정 11년(1218) 봄 정월 임오일, 이전이 무리들을 거느리고 귀부해왔다. 조서로 이전을 경동로총관(京東路總管)에 임명했다. 5월, 금나라 석주(石州)의 도적 풍천우(馮天羽)가 패사하자 패거리 국안용이 투항해와 조서로 국안용을 동지맹주사(同知孟州事)에 임명했다. 가정 12년(1219) 9월, 가섭(賈涉)이 회동제치사(淮東制置司)를 주관해 경동과 하북(河北)의 군마(軍馬)들을 통제하게 되었다. 처음에 산동에서의 귀순자가 나날이 증가했는데, 석규가 연수에서 계교로 심탁을 죽이고, 응순지마저 파직되어 떠나면서 권초주(權楚州) 양병(梁丙)은 이를 구제하지 않았다. 계선이 두달치 식량을 미리 빌려달라 간청해 그후에 부대 5천명을 거느리고, 마량 등 1만명과 나란히 밀주(密州)로 나아가 식량을 얻고자 했으나, 양병은 허락하지 않았다. 계선이 무리를 대신해 속히 이전을 파견해 청했지만, 양병은 역시 따르지 않았으며, 석규가 군무를 처리하게 했다. 석규가 군량 수송선을 탈취해 회하를 건너 크게 약탈하면서 초주의 남도문(南渡門)에 이르더니 성문을 불태워 거의다 없앴는데, 양병이 사람을 보내어 타이르자 중지시켰다.

당시, 가섭이 우이군(旴眙軍) 지사로서 [宋寧宗에게] 상서하여 이르기를 '충의군의 인원이 끊임없이 몰려와 일정한 숫자를 세울수 없습니다. 하나의 군대로 편성해 회하의 북안(北岸)에 주둔시킨다면, 안정되어 재능의 한계도 응당 무궁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굶주리면 사람을 씹어먹지만, 배가 부르게 되면 명령을 받드니 그 형세가 이와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때문에 조정에선 가섭에게 충의군의 병사를 통제하라 명했다. 가섭이 명령을 받들자 즉시 부익(傅翼)을 파견하여 석규와 양덕광을 역순(逆順)과 화복(禍福)으로 타이르니, 석규가 여기에 사죄했다. 가섭은 그 무리가 늘어나 반란을 생각하는걸 우려해 저주(滁州)와 호주(濠州)의 전투로 말미암아 석규와 진효충(陳孝忠), 하전(夏全)을 떼어놓아 양쪽에 주둔시키고, 이전이 요새 다섯군데를 통솔했다. 또한, 섬서의용법(陝西義勇法)으로 인원을 충당시키고, 여러 군대를 모아 능력자 3만명을 선발했는데 6만명을 채우지 못했다. 정규군은 이미 7만명에 도달했고, 우두머리로 하여금 객군을 감당케 했지만, 조정에선 매년 3~4할씩 군사비를 삭감했다.

이때에 이르러 강회(江淮)를 분할해 3사(三司)로 삼고, 가섭에게 회동(淮東)을 관리하도록 명했다. 이달에 금나라의 장림(張林)이 산동의 여러 고을을 가지고 이전에게 귀부해왔다. 처음에 몽고가 익도(益都)를 함락시켰지만 이곳을 방어하지 않은 채로 물러갔다. 익도부(益度府)의 사졸 장림과 그 패거리들이 관청을 복원시켜 금나라에 귀부하니, 그 공적으로 치중(治中)에 임명되었으나 험상스럽게 제멋대로 굴었다. 지부(知府) 전탁(田琢)이 산동에 체재하면서 과도하게 징세를 청구하자, 무리들의 인심을 잃었다. 장림이 그 패거리를 이끌고 전탁과 싸워 패배시키니, 전탁이 개봉으로 돌아갔다. 장림이 이윽고 익도에 거처하면서 산동의 여러 고을들이 장림한테 귀부했다. 장림은 송나라에 투항하고자 했지만, 미처 스스로 결단을 내리지 못했는데 이전은 제주(齊州)로부터 돌아온 기회에 장림의 의도를 간파하고, 청주성(靑州城) 밑으로 병사를 전진시켜 사람을 보내어 송나라의 위덕(威德)을 설명해주면서 장림에게 서둘러 귀순할 것을 권고했다. 장림은 이전이 벌써 현혹시킨다며 두려워해 수락치 않고, 결정을 미루었다.

이전이 앞장서서 청주성으로 들어갔고, 몇 사람만이 그를 따랐다. 장림이 성문을 열어 청주성을 바쳤는데, 이전과 상견하자 매우 기뻐하면서 의탁을 청하고, 주연을 베풀어 의형제를 맺었다. 이전이 장림의 주요 장령들을 얻고나서 귀순의 표문을 올리고, 청주와 거주(莒州), 밀주(密州), 등주(登州), 래주(萊州), 유주(濰州), 치주(淄州), 빈주(濱州), 체주(棣州), 영주(寧州), 해주(海州), 제남(濟南) 12개군의 호적서를 가지고 돌아와 표문의 언사로 보고하길 '총 70개 성(城)이 제나라를 온전케 하여 3백년 옛 주인에게 돌아왔습니다'라고 했다. 조서로 장림에게 무익대부(武翼大夫) 안무사(安撫使) 겸 경동총관(總管)을 수여했다. 12월, 이전이 사주(泗州)를 습격했다 함락시키지 못하자 돌아왔다. 이무렵, 폭설이 내려 회수(淮水)가 얼어붙었는데 이전이 가섭에게 요청하여 이르기를, '사주가 강물로 가로막힌걸 매번 한스럽게 여겼는데, 지금은 평지(平地)와 같습니다. 청컨대, 제가 전력으로 사주의 동성(東城)과 서성(西城)을 탈취하겠습니다'라고 하자, 가섭이 허락했다. 이전이 장창병 3천을 따라 밤중에 회하를 건넜다.

비밀리에 사주 동성으로 나아가 해자의 얼음물을 딛고 성밑에 이르렀는데, 금나라 사람이 숨은 채 방비하지 않았다. 갑자기 성위에서 횃불 수백개가 가지런히 올려지자, 이전이 멀리서 바라보며 '도적 이삼(李三)아, 너는 성을 훔치려 하느냐! 하늘이 컴컴하니 특별히 비춰지는구나'라고 하면서 사주의 방비가 갖추어졌음을 알고선 병사들을 이끌고 돌아왔다. 가정 13년(1220) 6월 임오일, 가섭이 연수충의군(漣水忠義軍) 부도통 계선을 꾀어내 살해하자, 부하들이 석규를 우두머리로 추대하며 가섭을 막았다. 당초 이전은 화호피(化湖陂)의 전투로부터 제장들을 업신여긴 마음을 품었는데, 이미 계선의 명성이 높아지자 몰래 가섭과 결탁해 계선이 관리의 소임을 다하지 못하여 모반할 것이라고 참소했다. 가섭이 그말을 믿고선 계선에게 추밀원으로 건너가 사정을 논의해보자고 명령해 그를 길가에서 죽이고, 통제(統制)인 진선(陳選)을 보내어 연수에서 계선의 무리를 거두게 했다. 계선의 부장 배연(裴淵), 송덕진(宋德珍), 손무정(孫武正), 왕의심(王義深), 장산(張山), 장우(張友) 여섯명은 진선을 저지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계선의 부장들이 비밀리에 우이(旴眙)에서 석규를 맞아들여 통사(統帥)로 추대하니, 초주성(楚州城)에 알렸음에도 가섭이 깨닫지 못하자 연수로 들어갔다. 진선이 돌아오자, 가섭은 부끄럽게 여겨 석규의 군대를 6개로 분할하고자 획책하여 조정에 무예를 갖추고 드러낸 경동로(京東路) 검할(鈐轄)의 임명 도장을 6개씩 만들어달라며 간청하고, 배연 등에게 수여해 계선의 무리를 공중분해시키려 했다. 배연 등은 명령을 따랐으나, 실제론 가섭의 명령은 받들지 않아 가섭이 매우 두려워했다. 조서로 석규를 연수충의군 검할로 삼았다. 8월에 금나라의 장청현령(長清縣令) 엄실(嚴實)은 주장이 되었으면서도 [송나라와 내통한다고] 의심받자, 가솔들을 데리고 청애(靑涯)의 산성에서 방어하며 익도의 장림(張林)한테로 도피하고자 했다. 조공(趙拱)이 송나라 조정의 명령을 동경(東京, 개봉)에 초유하기 위해 청애를 통과했는데, 엄실이 송나라로 내부하길 희망한다고 가섭이 그 소식을 들었다. 엄실도 병사를 4개로 나누어 이르는 주현(州縣)마다 투항하니, 이로부터 태행(太行)의 동쪽은 엄실이 거두어 통제하게 되었다.

무릇 위주(魏州)와 박주(博州), 은주(恩州), 덕주(德州) 회주(懷州), 위주(衛州), 개주(開州), 상주(相州) 등의 고을이 엄실에게 귀부해왔다. 가섭은 재차 조공을 파견해 엄실을 회유하고, 병사 2천명을 나눠주었다. 이전 역시 엄실한테 가겠다 청했지만, 가섭은 불가하다며 막았고, 초주와 우이의 충의군 1만명을 거느려 순시케 했다. 조공이 이전에게 설명하며 이르기를 '장군께서 병사를 이끌고 황하를 건너가 쓸데없이 돌아오기만 한다면, 무예를 선보일 수 없소. 지금, 동평(東平)을 취한 승세에 편승했으니 가능하겠나?'라고 했다. 이전이 장림의 군사와 연합해 수만명을 얻고 동평성(東平城) 남쪽을 기습했다. 금나라의 행성(行省) 몽고강(蒙古綱)이 군사를 거느리며 굳게 지켰는데, 이전과 장림이 문수(汶水)를 끼고 진영을 차렸다. 다음날, 금나라 감군(監軍) 왕정옥(王庭玉)이 기병 3백명을 데리고 갑자기 도착했다. 이전은 말위에서 기분이 좋아져 장수의 장막앞으로 기병을 내보내 수명을 죽이고, 그 말을 빼앗아 북쪽 산골짜기 밑에까지 추격해갔다. 금나라 장수 알불답(斡不答)과 마주치자 매복해있던 거센 군사가 나왔다.

곁에 비단 깃발을 낀 여장수가 말을 탄채로 창을 가지고 돌격해오자, 이전은 피할 겨를이 없었다. 제장들이 구하러 달려온 덕분에 이전은 빠져나갈 수 있었으며, 보장청(保長清)으로 퇴각했는데 정예병사의 태반이나 상실해버렸고, 통제 진효충도 전사했다. 이전이 겁에 질려 진강군(鎭江軍) 5백명을 이끌고 울분을 느끼면서 조공으로 하여금 먼저 돌아가도록 했다. 남은 무리들에겐 창주(滄州)의 길에서부터 소금의 이익을 빌린 것으로 구제하고, 위로했다. 조금 있다가 초주로 귀환했다. 장림이 창주를 공격하자, 왕복(王福)이 성을 가지고 투항했다. 겨울 10월, 금나라는 시청(時靑)을 제주선무사(濟州宣撫使)로 삼았다. 애당초 시청과 숙부 시전(時全)이 함께 홍오적이 되었으나, 양안아와 유이조(劉二祖)가 패망했음에도 시청은 사면받아 제주의군(義軍) 만호(萬戶)로 임명되고, 나중에 이전한테 투항해 송나라로 귀순해와 구산(龜山)에 거처하니 무리가 수만명에 달했다. 이때에 이르러 금나라 원수부가 사람을 보내어 그를 부르자, 시청은 서한으로 비주(邳州)를 빌려 노인과 어린이를 주둔시켜 달라고 간청했다.

마땅히 우이(旴眙)를 기습하고 탈취해 회남(淮南)을 모두 평정함으로써 금나라에 속죄하겠다고 요청하니, 금나라 황제가 이 명령을 내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청이 또다시 금나라로부터 귀순해오자 그자를 경동검할로 임명했다. 12월, 연수충의군 통할(統轄) 석규(石珪)는 자신이 연수로 들어온 것이 가섭의 본의가 아니었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불안해했다. 이전이 가섭에게 다시금 석규를 토벌하겠다고 청하자, 가섭이 마침내 이전에게 초주성의 남도문에서 무리를 통솔해 나열케 하고, 회음(淮陰)의 전함(戰艦)에 탑승해 회안(淮安)으로 이동하자 석규가 이를 목도하고선 방비를 갖추었다. 이전이 한 장수에게 명령해 석규의 군대를 회유하면서 투항자에겐 봉급과 식량을 늘려주겠으나, 투항하지 않는 자에겐 지급을 중단시키겠다며 겁박하자 무리들의 마음이 흩어졌다. 석규는 형편이 바닥나 배연을 죽이고, 손무정 ・송덕진과 함께 몽고에 투항했다. 석규가 이미 떠나버리면서 연수의 무리들은 소속처가 없었는데, 이전이 장령들을 겸병해 가지겠다고 요구하니, 가섭은 물리치지 못한 채 마침내 이전에게 맡겨버렸다.

가정 14년(1221) 봄 정월, 이전이 산동으로부터 귀환하자 전(錢) 6만민(緡)을 하사했다. 시청이 사주의 서성(西城)에 입성했다. 2월, 금나라 사람이 사주를 구원하러 오자 시청이 패배하여 돌아왔다. 11월, 경동안무(京東安撫) 장림이 반역하여 몽고에 투항했다. 이에 앞서 이전이 이미 연수의 충의군 장령들을 겸병하게 되자, 교만함이 더해져 조정을 업신여기기 시작했다. 또한, 금산(金山)을 유람하며 국가를 위해 희생된 전몰자들을 위해 사찰에 제사를 드리는데, 진강부(鎭江府) 지사 교행간(喬行簡)이 이전에게 와서 선박을 합류시키고, 크게 연주하며 연회를 베풀었다. 이전이 돌아오면서 그 무리들한테 이르기를, '강남(江南)의 수려함은 견줄만한 상대가 없으니, 너희들과 반드시 한번쯤은 도달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전함들을 건조하기 시작했으며, 선박의 이익을 다투어 모색했다. 교서(膠西, 산동성 남부)는 마땅히 [금나라의] 등주(登州, 용구시), 영해주(寧海州)와 인접하여 [남북에서 산출된] 온갖 재물이 몰려들었으니, 이전은 형인 이복(李福)으로 하여금 그곳을 지키게 하면서 소굴로 삼고자 하였다.

당시, 호시(互市, 榷場)이 개설되면서부터 북방 사람들이 오히려 남방의 재화를 중시했기에 가격이 10배나 올랐다. 이전은 장사치를 유인해 산양(山陽)에 이르게 하고, 선박에 탑재된 화물들을 절반으로 나누어 회하로부터 바다로 운반해 교서에 도달케 했다. 이복이 수레를 갖추어 그 절반을 세금으로 거두고, 여러 고을에 가서 살피며 무역했다. 마부들이 모두 장림에게 힘써 재촉하자, 장림은 이를 견디지 못했다. 장림의 재산은 염전 6곳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이복이 자기 동생한테 기댄 은혜가 있으니 그것을 반씩 나누자고 했으나, 장림은 이복이 멋대로 염전을 분할하는걸 허락치 않았다. 이복이 노하여 '배은망덕이 이와 같구나! 도통(都統)과 더불어 군사를 이끌고 네놈의 수급을 가져갈 것이야!'라고 일갈하자 장림이 두려워해 그 패거리인 이마아(李馬兒)가 몽고로 귀순하라며 설득하자, 장림이 이내 경동의 고을들을 가지고 몽고의 장수 무칼리(木華黎)에게 투항했다. 이복이 낭패하여 도주해 초주로 돌아왔는데, 장림은 오히려 가섭 앞으로 서한을 보내 반역한 것이 아니며, 진상은 이복 때문에 빚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가정 15년(1222) 2월, 이전이 사주(泗州)를 수복했다. 여름 4월, 제남부(濟南府) 지사 종빈(種贇)이 장림을 토벌하자, 장림이 패배하여 도주하고 이전은 청주(靑州)로 입성해 거처했다. 12월에 이전을 보녕군절도사(保寧軍節度使) 겸 경동로진무부사로 삼았다. 당초 이전이 전공(戰功)을 세웠었기에 승상 사미원은 이전의 관작을 더해주고자 했지만, 가섭이 중지시켰다. 이전한테 부월(斧鉞)을 더해주기에 이르자 가섭이 탄식하며 '조정에선 관작만으로 그 마음을 얻을 수 있다 믿지만, 장수가 교만할수록 권고가 불가하다는걸 어찌 알겠는가?'라고 하였다. 가정 16년(1223) 6월, 회동제치사 가섭은 이전이 교만하고 포악해 통제하기 어려워지자 조정으로 귀환을 힘써 요청하다 도상(道上)에서 죽었다. 앞서, 가섭은 충의군 병사들을 통제하고자 적조종(翟朝宗)으로 하여금 진강부사(鎭江副司) 8천명을 통솔해 초주성 가운데 주둔하고, 직속의 1만명을 나누어 조방영(趙邦永)과 고우(高友)에게 명령하여 5천명을 통솔해 서성(西城)에 주둔시켰으며, 왕휘(王暉)와 어담(於潭)은 나머지 5천으로 회음(淮陰)에 주둔케 했다.

이전은 진강(鎭江)의 병사를 가벼이 여겼지만, 막사앞의 충의군은 꺼려해 누차 고우 등의 용맹을 칭찬하고 군사가 출동해 마주치면 반드시 따라가게 해달라며 요청했으나, 가섭이 불허했다. 이전은 매일 부하들과 연회를 베풀면서 나란히 가섭의 직속 장교들까지 초청해 이로부터 직속군대도 이전에게 예속되고 싶어했으나, 미처 합하진 않았다. 가섭이 사망하면서 구수매(丘壽邁, 丘嵩의 아들)가 장수들의 일을 다스리게 되자, 이전이 '충의군은 질서가 없으며, 장부는 소홀히 다루고도 거칠어서 별도로 새로운 장부를 두는 것만 못합니다. 부대 하나는 조정에 헌납하고, 하나는 거듭 병영을 통제하게끔 시키는 대신, 나머지 하나는 온전히 남겨둘 것인즉, 여러가지 공과(功過)를 고려해보건대 폐단을 말소하도록 넘겨주실 것을 청합니다'라고 했다. 구수매가 이를 따랐으며, 이전이 이미 몰수한 군사와 충의군 직속을 통합해 나란히 통솔하게 되었음에도, 구수매는 깨닫지 못했다. 8월에 이전이 비주(邳州, 강소성 비주시)를 공격했으나 이를 함락시키지 못하자, 청주로 다시 돌아왔다. 12월, 허국(許國)을 회동제치사로 임명했다.

처음에 허국이 회서도통(淮西都統)에 임명되었음에도 자택에서 칩거하면서 제사만 지냈는데, 가섭과 다투어 이를 대신하고자 이전은 필시 반역할 것이라며 수차례 언급했다. 가섭이 사망하자 허국을 조정으로 초치해 회견했는데, 허국이 상소하기를 이전의 간악한 음모가 갈수록 심해져 이미 반역의 형상을 드러냈으나, 호걸없이는 소멸시킬 수 없기에 대개 스스로 판다고 주장했다. 마침내 허국의 문계(文階, 官階)를 바꾸어 회동안무제치사(淮東安撫制置使) 겸 초주 지사로 임명하니, 명령이 내리자 들은 사람들이 경악했다. 회동참모(參幕) 서희직(徐晞稷)은 병영을 열려는 뜻이 있었는데 허국이 기용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선 허국의 상소를 베끼어 주석까지 달아 이전에게 부치니, 이전이 좋아하지 않았다. 가정 17년(1224) 윤(閏)8월 3일, 영종(寧宗)황제가 붕어하고, 이종(理宗)황제가 즉위하였다. 이종 보경(寶慶) 원년(1225) 2월, 초주의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처음에 허국이 진지에 도착하면서 이전의 부인 양씨(楊氏)가 교외로 마중나갔으나, 허국이 고사하여 만나주지도 않자 양씨는 민망해하며 돌아왔다.

허국이 이미 업무를 돌보는데, 북방의 군사를 엄격히 통제하고 남방 군사들과 경합시키면서 옳고 그름없이 앉아서 남방 군사들만 편애하니, 포상하는데도 8~9할이나 삭감시켰다. 이전이 청주로부터 허국에게 서한을 발송해오자, 허국이 무리들한테 자랑하며 이르길 '이전이 나의 양육을 받들고 있으니, 내 위엄이 간략히 드러날지라도 쉴새없이 바쁠 것이다'라며 떠벌렸다. 이전이 청주에 체류한지 오래되어 허국의 서한이 도달하지 않자, 수차례 물품을 두텁게 보내면서 이전에게 귀환을 요구했다. 이전의 당여 유경복(劉慶福)도 심부름꾼에게 허국의 의향을 떠보도록 했는데, 허국이 좌우(左右)에 말하면서 탐색자한테 '제치사는 너희들을 해칠 마음이 없다'며 유경복으로 하여금 이전에게 알려줬다. 이전이 장교들을 소집하여 '나는 병영을 통제하는데 불참했으니, 잘못은 나한테 있다. 지금 생사(生死)를 가늠할 수 없지만, 반드시 돌아갈 것이다'라고 하면서 이윽고 초주로 귀환했다. 8월에 허국을 알현하는데 접대관이 이전에게 '절도사라면 뜰에서 종종걸음쳐야 하지만, 제치사라면 의례를 생략해야 한다'라고 주의를 주었다.

안뜰에 도착해 이전이 종종걸음치는데, 허국은 단정히 앉아 이전의 인사를 받으면서도 중지시키지 않았다. 이전이 물러나와 진노하여 이르기를, '나 이전은 본조(本朝, 宋나라)에 귀순해 많은 사람에게 절을 올렸으나, 다만 너희가 우리들과 더불어 본래 문신(文臣)이 아니었다는게 한스럽다. 너희가 회서도통으로 하여금 가제사(賈制帥, 賈涉)께 인사드렸을적엔 역시 배명을 면제받았다. 너희들은 무슨 공훈을 세웠길래 하루아침에 우리들 위에 올라앉아 가차없어졌는가? 나는 성심으로 조정에 충성해 반역하진 않는다'라고 하였다. 허국이 연이어 성대한 연회를 이전에게 베풀어주고, 노고를 버리어 후대함을 더해주었음에도 이전은 끝내 좋아하지 않았다. 유경복이 허국의 막료 장몽선(章夢先)을 배알하는데 장몽선이 장막으로 모습을 가린 채 인사드릴 것을 명하자, 유경복도 진노했다. 이전이 벌써 청주로 돌아가려 하자, 허국이 꺼려해 번거롭게 잔류시키고선 스스로 헤아려 '저들이 참배한 것으로 다투고, 참배로 뜻을 얻는다면 나로서도 무엇이 아깝겠는가?라면서 몸소 낮추는 행위를 개선해 의례로 삼았다.

집회를 여는 사이에 서찰을 내어 사안을 진술케 하고, 허국이 그 세세한 것까지 살피며 판단해 이를 따르자, 이전은 즉시 자리에 앉아 재배(再拜)하고, 사례하였다. 이로부터 활동 ・휴식하는데 반드시 간청하면서 절을 올리고, 요청을 얻었다. 허국이 크게 기뻐하여 집안 사람들한테 이르기를 '내가 이 오랑캐를 굴복시켰다'고 하였다. 이전이 청주로 떠나자, 허국은 양회(兩淮)의 마보군(馬步軍) 13만명을 소집해 초주성 외곽에서 크게 사열해 북방 사람들의 마음을 꺾고자 했다. 이전의 처(妻) 양씨와 그 군관들이 잔류해 있었는데, 이미 허국의 모의를 두려워해 내부로부터 방비를 갖추었다. 나중에 이전이 유경복을 파견해 초주로 돌아가 소란을 일으킨 한편, 호주(湖州, 절강성 오흥현)에서 반임(潘壬)의 일이 탄로남[史彌遠에 의해 폐출된 태자 趙竑을 복위시키려다 발각, 주멸당한 사건]을 맞아 이전의 무리가 더욱 불안해했다. 양씨가 미혹하고 가르치며, 어느 망령된 남자를 길러 사람들한테 '이분이 종실(宗室)이시다'라고 지목했다. 또한, 동료 부하들에게 이르길 '명령을 모아 너희들을 조사(朝士, 朝臣)로 삼노라'며 떠벌렸다.

유경복이 비밀리에 우이(盱眙)의 4군(軍)과 약조해 반란에 응하게 만드려 했으나, 4군은 따르지 않았다. 이리하여 경복은 모의를 중단하고 허국에게 단지 유쾌하게 굴었다. 계의관(計議官) 구몽옥(苟夢玉)이 이를 눈치채 허국에게 보고했으나, 허국은 '단순히 반역하는 것이라면 나를 살해할 터인데, 내가 어찌 문유(文儒)로써 군사란 것들을 알지 못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구몽옥이 화(禍)가 자신에게 미치는걸 두려워해 우이로 가서 격문을 구하고, 유경복에게 '제치사가 그대를 해치려한다'며 일러주자 두차례 스스로 결탁하여 계책을 모의했다. 여기에 이르러 허국은 새벽에 일어나 업무를 봤는데, 반란군이 칼을 채우고 안뜰에 나타나자 사람들이 놀라 달아났다. 허국이 사납게 '무례함은 얻을 수 없다'며 외쳐댔으나 화살이 이마에 명중해 유혈로 얼굴을 적시는 가운데 도망쳤다. 난병(亂兵)들은 허국의 가족을 모조리 죽이고, 관청을 불태워 양사(兩司)에 축적된 재물도 죄다 반적들의 차지가 되었다. 허국이 친위병사 수십명의 도움으로 성루(城樓)에 올라가 밧줄을 타고 달아났는데, 길가 사당에 은신하며 묵었다.

반적들이 통판(通判) 요충(姚翀)을 옹립해 초주에 입성(入城)하고, 양군(兩軍)을 대접하며 군영으로 돌아가게 했다. 이날, 유경복이 장몽선(章夢先)을 먼저 죽임으로써 치욕을 앙갚음했다. 다음날, 허국이 길가에서 목을 매어 죽었다. 소식을 전해들은 사미원(史彌遠)은 변고에 몹시 두려워하면서도, 애써 감추면서 서희직(徐晞稷)이 일찍이 초주의 지방관으로 해주(海州)를 방어해 이전의 환심을 샀기에 제치사직을 수여하고, 이전을 다독여 굴복시키라 명했다. 이전은 허국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청주로부터 초주로 돌아와 유경복을 제어하지 못한 것을 거짓으로 책망하고, 충의군의 다툼을 중지시켜 수명을 참수하고선 표문을 올려 처분을 기다리니, 조정에선 이를 불문에 부쳤다. 양주(揚州)지사 조범(趙范)이 무너진 사졸들 가운데서 제치사 인장을 얻었는데, 이를 서희직한테 넘겨주었다. 서희직이 당도하자, 이전은 초주성문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배명하니 서희직이 내려와 중지시켰고, 반역의 무리가 기뻐했다. 서희직이 도착하면서 이전을 '은부(恩府)'로, 양씨를 '은당(恩堂)'으로 호칭해주며 수족들을 반대로 놓았다.

5월, 이전이 산동에서 팽의빈(彭義斌)에게 편지를 띄워 이르기를, '허국이 모반했다가 주살당했다. 그대의 군대도 나란히 나의 통제를 들어야 할 것이다'라고 하자 팽의빈이 크게 욕하면서 '역적이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배반하고, 제치사를 함부로 살해하다니 내가 반드시 이 원수를 갚아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편지를 가져온 심부름꾼을 참수하고, 남쪽을 향해 하늘에 고하며 무리들과 맹세하니, 바라본 사람들이 분격했다. 그리하여 이전이 청주로부터 동평(東平)을 공격했다가 함락되지 않자, 은주(恩州, 산동성 평원현)를 공격했다. 팽의빈이 병사를 출격시켜 함께 싸우니 이전이 패퇴했고, 군마 2천마리를 노획하였다. 유경복이 병사를 이끌고 이전을 구원했으나, 역시 패하였다. 이전이 보산(保山)의 산채로 퇴각해 충의군의 이북 산양(山陽)을 뽑아버렸다. 양씨와 유전(劉全)이 모두 달려와서 구원하려는걸 기회삼아 이전이 사람을 보내어 서희직에게 서찰로 평의빈과 대신 강화를 맺어달라며 요구했으나, 이내 중지시켰다. 팽의빈이 연강(沿江)제치사 조선상(趙善湘)에게 서한을 전달해 설명하기를...



"반적 이전을 주살하지 않으면 회복을 이룰 수 없습니다. 단지 병사들을 파견해 회하(淮河)를 장악해야 하며, 연주(漣州)와 해주로 나아가 웅거할지라도, 몰아세워 그 남쪽의 도로를 차단시킨다면 역적을 반드시 잡을 수 있습니다. 역적을 평정한 후엔 1경3부(一京三府)를 수복하고, 다음으로 저 팽의빈이 하북(河北)에서 교전하며, 우이(旴眙)의 제장과 양양(襄陽)의 기병들이 하남(河南)에서 싸운다면, 신주(神州, 中原)를 수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이의 4총관(總管)에게도 각자 사신을 파견해 서한을 전달했으며, 역적을 토벌하는데 협조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양주 지사 조범(趙范)에게도 역시 이같이 말했다. 사미원이 조범에게 유시(諭示)하길 지위를 벗어나 군사를 함부로 다루지 말라면서 각자 안정의 복(福)을 누리라 하였다. 조범이 재차 서한으로 힘써 논의하기를...



"지금, 위로는 한 사람으로부터 아래로는 공경(公卿)과 백관(百官)들에 이르기까지, 또한 아래로는 사대부와 서민, 군인과 관리에 이르기까지 비록 선생(先生, 史彌遠)의 속내도 [이전이] 반역함을 알고 계셨을 터이나, 화적(禍賊)이 반드시 배반한다는걸 모르진 않았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이를 인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선생께선 이를 알면서도 홀로 말을 삼가고 계십니다. 말을 삼가는게 참으로 옳다지만, 내부로는 와신상담(臥薪嘗膽)의 뜻이 없고, 외부로는 전승(戰勝)을 거두어 공격하고 탈취해 방비함이 없습니다. 선생께선 애써 감추어 말을 삼가며 천천히 상기해 이를 통제하시면서, 이같은 방략(方略)을 고상히 여기고 계십니다. 그러한데, 서희직의 책무란 안무(按撫)하는 것이고, 조범의 책무란 진지를 방어하는 것입니다. 서희직이란 자의 책무는 갑옷을 제작하는 사람의 일이며, 조범이란 자의 책무는 화살을 제작하는 사람의 일입니다. 저 조범은 이미 사람을 부상당하게 하진 않을까하는 일을 책임지었기에 염려하고 있으며, 부상자의 고통을 억제하거나, 부상자의 발언을 미워함을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역적들은 조범이 방비를 갖추는걸 보고선 반드시 그 간사함을 제멋대로 굴어 얻지는 못할까 꺼려하면서, 다른날에 장차 반드시 조범을 '첫 화근을 격변시키게 만든 인물'로 지목하여 조정을 겁박해 조범을 내쫓도록 만들 것입니다. 선생께선 처음엔 믿지 않으시겠지만, 좌우(左右)와 공경 ・사대부들이 수근거리면 선생은 장차 반드시 '조범 하나를 아낌으로서 화근을 늦추지 못했구나!'라고 일컬으면서 조범을 결박시켜 역적들한테 넘겨줄 것이고, 마침내 조범을 송나라의 조착(晁錯)으로 만들어버릴 것입니다. 비록 그러할지라도, 조범을 역적들한테 넘겨줌으로써 과연 국가의 화근을 늦출 수만 있다면야, 조범이 죽은들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속담에서 '집 지키는 개라면 도적도 미워한다'고 했습니다. 도적은 번견(番犬)이 있는걸 보게되면 반드시 주인에게 개를 가리켜 꼬집으면서, 먼저 쫓아내도록 만든 다음, 문을 뚫고 들어가 간사하게 구는데 거리낌이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번견을 죽인다는건 도적을 그치게하는데 참으로 무익한 것입니다. 욕망을 가엾게 여기면서, 한가로운 자와 특별한 자를 임명하여 보내야 합니다."

사미원이 듣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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