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선의 치(仁宣之治)'라고 불린 인종(仁宗) 홍희제(洪熙帝)와 선종(宣宗) 선덕제(宣德帝)의 양(兩) 시대(1425~35)는 일반적으로 연속된 시대라 보고, 명 왕조가 창업에서 수성(守成)으로 이행되는 시대로 이해하여 왔다. 중국의 맹삼(孟森)은 일찍이 1930년대에 두 황제의 재위 기간을 일괄하여 하나의 시대로 볼 수 있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첫째로 인종의 재위 기간이 1년도 채 되지 않았고, 둘째로 그 즉위가 영락제의 총애를 받고 있던 장자(長子, 훗날의 선덕제)의 존재에 의해 가능했으며, 인종의 선정(善政)이 선종에 의해 잘 계승되었다는 점을 들었다. 이러한 이해는 정치사 뿐만 아니라 사회 ・ 경제사 분야에도 잘 나타나 있다. 국가 재정 면에서 '인선의 치' 시대는 명조(明朝) 국가가 그 기반으로 삼아 온 강남의 '납량호(納糧戶) 지배'에 대한 동요를 자각하고, 일련의 개혁이 이뤄졌던 시기이다.
그렇지만, 수성 시대의 기점에 있는 이 두 황제의 자질은 분명히 차이를 보이면서 서로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음도 사실이다. 아직 수도가 남경에 있었던 시기, 영락제는 황태자 주고치(朱高熾)와 한왕(漢王) 고후(高煦) ・ 조왕(趙王) 고수(高燧)의 3형제 및 황태손 첨기(瞻基)에게 태조 주원장의 능묘인 효릉(孝陵)을 참배하도록 한 적이 있었다. 원래 황태자는 몸이 비만한데다 발에 병까지 도져 있었는데, 때마침 비도 주룩주룩 내리고 있어서 곁에서 내관의 부축을 받았으나 자주 넘어지곤 했다. 이처럼 황태자의 흉측한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뒤따라가던 한왕 고후가 '앞에 가는 사람이 넘어지니, 뒤에 가는 사람은 조심해야지[前人蹉跌, 後人知警]'라고 야유했다. 그러자 황태손이 '뒤에 있는 사람은 더 조심해야지[更有後人知警也]'라고 맞장구치자, 고후는 뒤돌아보며 안색을 바꾸었다고 한다.
온후한 황태자와 아버지 영락제를 닮아 무인(武人) 기질이 다분했던 동생 한왕, 그리고 숙부 한왕을 능가할 정도로 예민한 성격의 황태손. 병약한 형을 대신해 황위 계승권을 얻으려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한왕을 둘러싼 이 일화는 부자(父子)지간임에도 홍희제와 선덕제 두 황제 사이에 개인적 자질의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By 아라미야 마나부(新宮学) 著 <홍희에서 선덕으로(洪熙から宣德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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