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론 주어는 없습니다.ㄳ
"역사는 항상 보복을 수반한다. 보복이 없는 역사란 없다. 그래서 역사를 다룰 때엔 항상 조심해야 한다."
한일(韓日) 정부간 위안부 협상에 대해서 국내의 한 전문가는 '역사를 국유화 ・사유화할 수 있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오만과 불통이 빚어낸 참사'라고 규정했다. 소녀상 철거와 재단 운영비 10억엔 지원, 그리고 위안부 이슈를 다시는 내외적으로 재점화시키지 않겠다는 취지의 '불가역적(Irreversible) 해결' 문구가 조건부였다는 일본측의 폭로전이 병신년(丙申年) 새해 벽두를 강타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참사'가 한국 사회를 어디로 끌고 갈지는 예측 불허다. 심지어 '앙시앵 레짐의 내파(內波)'라는 말마저 나온다. 박근혜 대통령이 자신도 모르게 선친이 구축한 한국 사회의 '구질서'를 무너뜨리는 계기가 되리란 지적이다. 한일협정이 거기에 반대한 '6.3세대'를 양산했고, 그들이 4반세기 후 87년 체제를 이끌어냈다는 점을 상기하자면, 다소 앞서간 예측이지만 전혀 터무니없는 주장만은 아니다.
따라서 '12.28 위안부 타결' 이후로 한국의 미래는 향후 몰려올 내우외환의 혼돈 속에서 6.3세대와 비견될 새롭고도 참신한 세력이 등장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도의적 ・명분론적 입장에 기반해 역사는 '당사자 해결'이 원칙으로 간주되어 왔다. '영토는 국제 분쟁이기 때문에 제3자가 관여할 수 있더라도, 역사 문제는 그렇게 녹록치 못하다'는 것이 불문율이다. 그런데 이를 깨뜨리고, 미국이 또다시 한일간 역사 문제에 깊숙이 발을 들여놨다. 1965년 국교 정상화 당시 미국의 역할에 대해서야 이미 소상히 밝혀졌으나, 이번 협상에 대해선 '당연히 개입했겠지'라는 수준 이상으로 아직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선후 정황상 미국은 어김없이 분명히 개입했으며, 아베 총리와 일본 우익을 설득해가는 과정에서 '큼지막한 선물'까지 줬다. 그 댓가로 미국은 무엇을 얻었을까?
한국을 끝없는 과거사의 저주 속으로 밀쳐넣은 댓가로 한국의 중국 경사와 역사 공조를 와해시키고, 기존의 한미일 3각 공조로 고분고분 복귀한 한국을 얻게 되었을까? 협상 과정과 결과를 냉정하게 분석해보면, 미국 역시 불안하다. 오히려 한계를 드러냈다는 점에서 또다른 후유증이 예상된다. 미국의 '앙시앵 레짐'도 흔들릴 위기에 처한 것이다. 위안부 협상의 막후에 미국이 버티고 있다는 사실이 극명히 드러난 것은 작년 6월 12일자 박근혜 대통령의 <워싱턴 포스트> 인터뷰 기사였다. '위안부 문제에 상당한 진전이 있었고, 현재 협상의 마지막 단계에 와 있다'는 대통령의 다소 뜬금없는 낙관론은 어디서 나왔나? 출처를 추적하다 보니, 미국이라는 존재가 떠올랐다. <워싱턴 포스트>가 청와대에서 박 대통령을 인터뷰했던 6월 11일 바로 그날, 동경에서는 한일간 국장급 회담이 열리고 있었다.
당시의 회담 수준이 '상당한 진전'이나 '마지막 단계'를 거론할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통령이 다른 복수의 극비 채널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는 점이 확인된 것이다. 그 채널이 어딘가에 대해서 비슷한 시기에 미국을 방문중이던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한일관계 개선을 위하여 격려해주는 많은 채널, 다양한 지원들'이라고 얼버무렸으나, 한일 양국간의 외교 채널 말고도 별도의 흐름이 존재한다는 것은 부인하지 않았다. 이상덕 외교부 동북아 국장의 얘기는 보다 직설적이다. 위안부 협의의 성격상 가시적인 것보다 뒤에서 조정하는 것이 많다는 의미에서 'Behind the scenes(무대 뒤에서)'라는 외교적 용어를 사용하기도 했었다. 무엇보다도, 작년 5월 18일 존 케리 미(美) 국무장관의 방한 당시의 서울 발언을 환기하자면, 박 대통령이나 외교부 당국자들이 낙관론을 제기했던 근거를 발견할 수 있다.
그날 오전에 윤병세 장관과 회담을 마친 후, 케리는 공동 기자회견에서 '일본군이 성적(性的)인 목적에서 여성들을 인신매매한 것과 관련해 미국은 거듭 입장을 밝혔다. 이는 끔찍하고, 지독한 인권 침해다'라며 일종의 '폭탄 선언'을 내놓았다. 이 발언은 아베 총리가 3월 25일자 <워싱턴 포스트> 인터뷰를 비롯해 4월 하순의 국빈급으로 대접받았던 방미 기간에 쏟아낸 위안부 관련 주장을 반박한 것이다. 아베는 당시 위안부에 대해서 '인신매매의 희생자'라고만 언급함으로써 이들이 민간업자에 의해 매매되었을 뿐, 일본 정부[=내각]나 군(軍) 당국은 이 과정에 직접 개입하지 않았다는 점을 미국인들의 뇌리 속에 심어주고자 했다. 일본 국내에서 이러한 시각은 총리 측근인 에토 세이이치나 하기우다 관방 부(副)장관을 필두로 정권 상층부내 강경파 세력들과 '일본 회의'등 우익 집단의 입장이다.
금번의 협상 결과와 비교하기 위해서라도, 아베와 우익 인사들의 시각을 좀 더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의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이들은 위안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 것까진 아니며, 물론 위안부 모집과 동원 과정에서 일본 정부나 군부의 직접적인 책임은 없다고 강변해 왔지만, 끌려온 이후의 인권 유린이나 강제성 여부에 대해선 '전시(戰時)'라는 특수한 상황이었던 만큼, 일부 인정하고 사죄할 수 있다는 견해를 수용하는 나름의 유연성을 한편으로 견지해 왔다. 즉, 위안부 사안과 관련해 일본 정부나 우익이 어떠한 경우에서라도 절대로 무조건 사과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모집 동원은 조선인도 다수 관여된 민간업자가 담당한 것이기 때문에 정부 차원에서의 '직접적인 책임'은 없으되, 동원된 후에 발생한 인권 유린에 대해선 도의적 차원에서 사과할 수 있다는 논리다.
반면 한국 정부나 정대협, 위안부 피해자들은 동원 및 모집의 과정에서부터 일본 정부와 군 당국이 깊이 개입했고, 강제성을 띠고 있다는 점을 반드시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사죄와 배상은 당연히 순차적으로 이어지는 절차다. 일본 국내에서도 주로 좌파가 이같은 입장인데, 고노 담화의 주역이었던 고노 요헤이 전(前) 관방장관 역시 동원 및 모집 과정에서의 포괄적인 책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베 총리는 고노 담화를 계승한다고 립서비스로만 얘기했을 뿐, 실제로 자신이 인정하고 싶은 부분만 하는 편의적 태도를 취해왔다. 이처럼 위안부와 관련한 기존의 쟁점을 놓고 본다면, 케리의 발언 맥락이 잡힌다. 그는 분명 '일본군이 성적인 목적으로 여성들을 인신매매했으며, 여기에 미국은 거듭 입장을 밝혔다'라고 말했다. 그가 언급한 '미국'엔 당연히 오바마 대통령까지 포함된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한국 정부나 피해자들의 주장은 미국의 입장과 비슷했던 셈이다. 대통령이나 외교부 당국의 낙관론은 이러한 배경에서 연유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박 대통령이 '협상의 마지막 단계에 왔다'고 한 것은 다분히 8.15 광복절을 겨냥한 것이었다. 아베 총리가 종전 70주년 담화를 준비중인데, 그전에 위안부 협상이 타결되어야만 한다는 주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동경의 분위기는 '총리가 여전히 인신매매설을 고수하고 있는데다, 정부나 군의 책임 문제에 대해선 완강하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교착 국면으로 흘러간 협상이 재점화된 것은 주지하다시피 10월 16일, 박근혜 대통령의 방미가 계기였다. 오바마가 박 대통령 면전에 한일관계를 시급히 개선하라며 다그치자, 박 대통령도 금년내로 매듭짓기를 원한다며 한국이 수용할 만한 명분이 있어야 한다는 취지로 답했다고 한다.
당시만 하더라도 박 대통령은 미국이 한국과 비슷한 시각이라고 보면서 한일관계 개선을 원한다면, 미국이 아베를 적극적으로 설득해 연말까지 답을 가져오라는 식으로 역공을 취한 셈이다. 이러한 정황은 보름 후 11월 2일의 한일 정상회담에서 박 대통령이 아베 총리에게 국교 정상화 50주년인 올해 안으로 조기 타결을 압박하자, 총리가 난색을 표명했다는 데서도 드러난다. 결국 양측은 시한을 못박지 않은 채 '협의를 가속화하기로 했다'는 모호한 합의문을 발표했다. 이상덕 동북아 국장은 브리핑에서 바로 이 정상회담이 '연내 타결의 모멘텀을 마련한 중요한 계기였다'고 밝혔다. 워싱턴 사정에 외교 소식통은 미국이 위안부 협상에 적극 개입한 시점을 2015년 11~12월이라고 특정했다. 한일 정상회담 직후부터였다는 뜻이다. 기존 흐름에서 분명해졌듯이 미국의 1차 교섭 대상은 일본이었다.
특히 위안부 문제에서 일본 정부와 군 당국의 역할 문제가 핵심 쟁점인 만큼, 이점에 있어서 완강하게 버티는 아베 총리가 핵심 교섭 대상일 수밖에 없었고, 총리의 배후엔 우익이 버티고 있었다. 미국의 대일 교섭은 주일(駐日) 미국 대사관을 거점으로 별도의 전문 협상팀이 구성되어 총리 관저와 일본 외무성 ・자민당 등 모든 채널을 필사적으로 총동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일 교섭 과정에서 미국이 절치부심 꺼낸 카드가 바로 일본의 유엔 안보리 상임 이사국 진출 문제였다. 이와 관련해 앞의 소식통은 '일본 정부가 미국의 의향을 수용하지 않을 경우엔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역할, 특히 안보리 상임 이사국 진출에 대해서 미국으로서도 책임질 수 없다고 압박을 가했다'면서 안보리 진출이 대일 설득에서 '결정적 변수'였음을 밝혔다. 유엔 안보리 진출은 본래 일본 외교의 최대 숙원 사업이기도 하다.
따라서 언뜻 보면, 미국이 이를 가지고 일본 외무성을 압박한 것처럼 보이지만, 기실 일본 외무성은 재계와 더불어 애초부터 미국과 생각이 비슷했다. 아베 총리와 우익, 그리고 외무성과 재계 모두가 일본이 보통국가화로 나아가야 한다는 대국적 전략 및 목표에 대해선 동일한 입장이다. 다만, 위안부나 남경(南京) 학살 같은 과거사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점에서 견해가 갈린다. 아베나 그를 뒷받침한 우익들은 군사대국이 되려면 일본 국민의 명예[명예는 중세 이래 武家사회에서 최고의 덕목으로 자리매김해왔다]와 자부심에 자칫 상처를 줄 수도 있는 종군 위안부나 남경 대학살에 필요 이상으로 얽매여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반면, 외무성이나 재계는 일본이 과거사에 붙들리면 붙들릴수록, 아시아에서조차 인정받을 수 없다는 계산에서 어느 정도 털어내고 가자는 시각이다.
결국엔 목표는 같은데, 과거사를 지우자는 쪽과 털고 가자는 쪽의 대립이다. 그러는 동안, 미국은 위안부 협상에서 한국측 주장을 들어주는 척 생색을 내면서 일본 외무성을 앞세워 아베 총리를 압박하는 모양새를 취해왔다. 그런데, 이번엔 단순한 압박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의 안보리 상임 이사국 진출이라는 구체적인 카드까지 제시한 것이다. 그것은 압력 카드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위안부 협상만 타결지으면 안보리 진출을 미국이 후원해 주겠다는 점에서 압력 효과를 상쇄시키고 남을 선물이기도 하다. 마침내 위안부 협상은 미국이 일본 외무성과 보조를 맞추며 안보리 건수로 총리 관저를 설득해 협상 골자를 받아내고, 그것을 야치 쇼타로 NSC 사무국장이 청와대 비서실과의 채널을 통해서 협의한 후 박근혜 대통령이 윤병세 장관에게 지침을 하달해 협상을 진행한 모양새가 된 셈이다.
그 결과가 바로 12.28 위안부 합의 내용이다. 그 가운데서도 첫번째 합의 내용이 가장 중요한데, 즉 '위안부 문제는 당시 군의 관여하에 다수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힌 문제로서 이러한 관점에서 일본 정부는 책임을 통감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이 '군의 관여'라는 네 글자다. 오랫동안 일본 정부나 군 당국의 개입을 부인해왔던 아베나 우익의 완강한 태도를 상기하면 진일보한 듯한 느낌을 준다. 문제는 정작 '무엇에 대한 관여'인지가 쏙 빠져 버렸다는 점이다. 종군 위안부 모집과 동원, 위안소 운영, 위안소 내부에서의 비인간적 처우 등 어느 방면에 방점을 두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 상술한대로 아베와 일본 우익은 '전시(戰時)라는 특수한 상황이었던 만큼, 동원 후 인권 유린이나 강제성 여부에 대해선 도의적인 차원에서 사죄할 수 있다'는 입장을 이전부터 견지해왔다.
한마디로 '위안부로 끌려온 이후의 군의 관여'였다는 식으로 물타기를 해버리면 사실상 기본 주장과 다를 바 없는 얘기가 되버린다. 가장 중요한 첫번째 책임의 범위부터가 이처럼 모호하니, 그 구절에 이어지는 정부 책임이라던지 두번째 총리의 사과도 기존과 달라진 것이 아니다. 그리고 세번째 '한국 정부가 재단을 설립하고, 10억엔의 기금을 일본 정부가 출연한다'는 항목에 대해 우리 외교부는 과거의 안(案)보다 진전된 해법이라며 자화자찬하지만, 이미 소녀상 철거와 그보다 휠씬 휘발성 강한 '불가역적 해결'이라는 북핵 회담에서나 사용될 법한 문구로 일본 정부가 한국 정부를 북한과 비슷한 수준인 국제 외교가의 보편적 상식과는 동떨어진 신용 불량형의 '사기(詐欺) 집단'으로 간주한고로, 예의 주시한다는데 동의해 준거나 다름없다는 점에서 '최악의 패착'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버렸다.
'위안부 피해자들이 투쟁해 온 20여년 역사를 10억엔에 팔아 치웠다'는 원성과 비판이 난무해 끊이질 않고 있으며, 그조차도 내외적으로 다시는 공론화시키지 않겠다는 불가역적 조건으로 못박았다고 한다면, 과연 박근혜 정부는 물론 후임 정권들이 감당할 수 있는 문제인지 알 수가 없다. 반면, 이번 협상의 댓가로 아베와 일본 우익은 자신들을 짓눌러온 위안부 문제라는 과거사의 족쇄로부터 해방되고, 미국의 보증까지 확약받으면서 향후 유엔 상임 이사국 진출의 측면 지원이라는 날개 또한 달게 되었다. 중국의 반발이야 예상되었던 바, 이 문제를 놓고 한국 정부는 아예 설 자리가 없어졌다. 한국 뿐만 아니라, 미국의 입지도 좁아졌다. 위안부 협상이 미국으로선 안보리 카드의 상당한 외교 자원까지 동원했던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베를 완전히 제어하는데엔 사실상 실패했기 때문이다.
아베 정권의 질주가 과연 여기서 멈출 것인가는 또다른 문제다. 이미 재작년 TPP 교섭차 대일 요구 강화에 주안점을 두고 방일했던 오바마한테 골탕만 안겨준 이래 아베와 측근 세력들은 오바마의 미국을 내심 우습게 여기는 눈치다. 자민당이 작년 11월, 총리실 직속으로 '전쟁 및 역사 인식 검증 위원회'를 신설한 것이야말로 결정적 근거다. 종전 후 극동 군사재판을 위시로 미국 등의 연합국이 구축한 전후 질서를 재검증해서 뒤집을 수도 있다는 의향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엊그제 북한의 4차 핵실험까지 겹치면서 개헌(改憲) 작업의 여론 설득용 재료로 더할 나위없이 안성맞춤인 북풍(北風) 호재를 발판삼아 우익계 군사 전문가들은 한동안 잠잠했던 일본의 핵무장 논의를 다시 꺼내드는가 하면, 워싱턴 보수 정계 일각에서조차 여기에 동조하려는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는 실정이다.
위안부 협상 타결은 결국 한국은 차치하고, 미국의 전후 '앙시앵 레짐'까지 뒤흔드는 기폭제가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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