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唐)나라 문종(文宗) 개성(開成) 3년(838), 토번(吐蕃)의 이태찬보(彝泰赞普)가 죽자 그 아우인 달마(達磨)가 섰다. 이태는 병이 많아지자 정사를 대신(大臣)에게 위임하였고, 때문에 겨우 스스로를 지켰을 뿐으로 오랫동안 변방의 근심이 되지 못했다. 달마는 거칠고 음란한데다, 잔학(残虐)하여 나라 사람들이 붙지 않았으며, 재앙과 이변도 서로 이어져 토번은 더욱 쇠퇴하였다. 무종(武宗) 회창(會昌) 2년(842) 겨울 12월 정묘일, 토번이 신하 논보열(論普熱)을 파견해와 달마찬보(達磨赞普)의 죽음을 고(告)하자, 장작소감(將作少監) 이경(李璟)을 조제사(弔祭使)로 임명하라 명했다. 유면(劉沔)이 군사를 운주(雲州, 산서성 대동시)로 이전할 것을 상주(上奏)하였다. 당초 토번의 달마찬보는 영행(佞幸, 아첨하거나 총애하는)의 신하가 있으면 재상으로 삼았는데, 달마가 죽자 아들이 없었다.
아첨하던 재상이 비(妃) 침씨(綝氏)의 오라버니 상연력(尚延力)의 아들 걸리호(乞離胡)를 세워 찬보(赞普)로 삼으니 겨우 3세로 재상과 비(妃)가 함께 국사를 관장했으며, 토번의 노신(老臣) 수십명은 모두 정사에 참여할 수 없었다. 수상(首相) 결도나(結都那)가 걸리호를 알현해 배례하지 않으면서 '찬보의 종족(宗族)이 매우 많은데 침씨의 아들을 세웠으니, 나라 사람들 누가 그 명령에 복종하고, 귀신도 누가 그 제사를 받겠습니까? 나라가 반드시 망할 것입니다. 근년에 재앙과 이변이 많아짐은 이 때문이오. 늙은이는 권력이 없고, 혼란을 바로잡아 앞선 찬보의 덕(德)에 보답치 못했으니, 죽음이 있을 따름입니다!'라고 말하고선 칼을 뽑아 얼굴을 긁고, 통곡하며 나왔다. 재상이 그를 죽이고, 가족마저 주멸시키자 나라 사람들이 분노했으며,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해 책립(冊立)을 구하지도 않았다.
낙문천 토격사(洛門川討擊使) 논공열(論恐熱)은 성품이 사납고 잔인한데다 모략을 꾸미는 것이 많았는데, 거느린 무리들에게 고하며 '도적이 국족(國族)을 버리고 침씨를 세웠으며, 오로지 충량(忠良)한 이들을 해치면서 신하들을 위협하고 있다. 또한 대당(大唐)의 책명(冊命)도 없었는데 어찌 찬보라 부르겠는가? 나는 마땅히 너희들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들어가 침비(綝妃)와 용사한 자들을 주멸해 국가를 바로잡겠다. 천도(天道)는 순함을 도우니, 공적을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고 말했다. 마침내 3개 부락을 설득하여 기병 1만명을 얻었으며, 이해에 청해(靑海)절도사와 동맹하며 거병했고, 국상(國相)을 자칭했다. 위주(渭州)에 이르러 국상 상사라(尙思羅)와 만나자 박한산(薄寒山)에 주둔했는데, 논공열이 그를 공격하매 상사라가 치중(輜重)을 버린 채 서쪽의 송주(松州)로 달아났다.
논공열이 마침내 위주를 도륙해 버렸다. 상사라가 소비(蘇毗) ・토욕혼(吐谷渾) ・양동(羊同) 등의 병사 도합 8만명을 일으켜 도수(洮水)를 지켰고, 다리를 불태워 막았다. 논공열이 도착하자 강을 사이에 두고 소비 등에게 이르길 '적신(賊臣)이 국가를 어지럽혀 하늘이 나를 보내 그들을 주멸케 하셨는데, 너희들은 어찌하여 역적을 돕는가? 나는 지금 이미 재상이 되었고, 국내의 병사들도 모두 내가 통제하여 얻었으니, 따르지 않는다면 너의 부락을 멸하겠다!'라고 하였다. 소비 등이 의심하면서 싸우지 않자 논공열이 날쌘 기병을 이끌고 강을 건넜으며, 소비 등이 모두 투항했다. 상사라가 서쪽으로 달아나자, 추격하여 붙잡아 죽였다. 논공열이 그 무리들을 모두 병합하니 도합 10여만명이었고, 위주로부터 송주에 이르기까지 지나가는 곳마다 잔혹하게 죽이고 없애면서 시체가 서로 베개처럼 깔렸다.
회창 3년(843). 토번의 선주(鄯州)절도사 상비비(尙婢婢)는 대대로 토번의 재상으로 상비비는 독서를 좋아했으나, 벼슬에 나가는 것을 즐기지 않아 나라 사람들이 공경했다. 40여세에 이태찬보가 강제로 기용해 선주에 진수하도록 했다. 상비비는 관후(寬厚)한데다, 침착하고도 용맹하여 모략이 있었으며, 사졸들을 훈련시키니 대부분이 날쌔고 용감하였다. 논공열이 비록 의병이라 이름했지만 실제로는 나라를 찬탈할 것을 모의했고, 상비비를 시기해 배후가 기습당함을 두려워해 먼저 그를 죽이려 하였다. 6월에 군사를 크게 일으켜 상비비를 치는데 정기(旌旗)와 가축들이 1천리(里)나 끊어지지 않았다. 진서(鎭西)에 당도하자 큰 바람이 불고 천둥번개가 치면서 저절로 불이 일어나 비장(裨將) 10여명과 가축 1백마리가 타죽었다. 논공열이 그것을 싫어하여 머뭇거리며 진격하지 않았다.
상비비가 수하들에게 이르길 '논공열이 오면 나를 땅강아지와 개미처럼 보면서 도륙하는 것조차 부족하다 여긴다. 지금 천재(天災)를 만나 망설이며 나아가질 않으니, 우리가 맞이해 굽혀서 물리치는 것과 같지 않으며, 그자의 뜻을 더욱 교만하게 만들어 대비하지 않게끔 한 연후에 도모할 수 있겠다'고 하였다. 이윽고 사신을 파견해 금백(金帛)과 소[牛], 술을 가지고 [상비비의 군사들을] 호사(犒師, 대접)하도록 하고, 또한 편지를 부치며 이렇게 말했다.
"상공(相公, 論恐熱)께서 의병을 일으키시어 국난(國難)을 구제하니 모든 경내(境內)에서 누구인들 바람이 향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한 사람을 보내시어 절간(折簡, 죽간 편지)을 내리신다면 감히 명령을 받들지 않거니와, 하필이면 먼 곳에서 사졸과 무리를 욕보이며 친히 번(藩)까지 내려오셨습니까? 상비비는 자질과 성격이 어리석고 경박하며 오로지 독서를 좋아합니다만, 돌아가신 찬보께서 번의 구석을 내리셨기에 성심으로 점거하지는 않았고, 밤낮으로 부끄럽고 근심한 나머지 퇴거할 것만을 요구했습니다. 상공께서 만약 해골(骸骨, 사직 청원)을 가지고 내려주시어 전리(田裡, 고향)로 돌아감을 들어주신다면, 마침내 평생의 본래 원해왔던 바를 들어주시는 겁니다."
논공열이 편지를 받아 기뻐하면서 제장한테 두루 보여주며 '상비비는 단지 서적만 잡고 있는데, 어찌 용병(用兵)을 알겠는가! 내가 나라를 얻기를 기다려 재상으로 지위를 맡겨서 집안에 앉혀도, 역시 쓸만한 곳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다시 서한으로 근후(勤厚)하게 답하고, 군사들을 이끌고 돌아갔다. 상비비가 듣고선 넓적다리를 치고 웃으며 '우리나라에 군주가 없으면 대당으로 돌아갈 것이지, 어찌 이런 개나 쥐같은 놈을 섬기겠는가!'라고 말했다. 가을 9월, 논공열이 대하천(大夏川)에 주둔하자 상비비가 장수 방결심(厖結心)과 망라설려(莽羅薛呂)를 파견하여 정예병 5만을 거느리고 논공열을 쳤다. 하주(河州)의 남쪽에 이르러 망라설려는 군사 4만을 험준한 곳에, 방결심은 1만을 미루나무 숲에 숨기고 기병 1천명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 화살에 편지를 묶어 날려보내 그를 욕했다.
당조(唐朝)와 토번의 화평 조약문을 석각한 당번회맹비(唐蕃會盟碑) 탁본, 서기 823년 건립되었다.
논공열이 노하여 병사 수만을 데리고 추격하니 방결심은 거짓으로 패주하고, 때때로 말[馬]이 부족하여 나아가질 못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논공열이 더욱 급하게 추격해 눈치채지 못하며 수십리를 가는데, 매복한 병사들이 일어나 돌아가는 길을 끊어버리고 협공했다. 마침 큰 바람이 모래를 날리고 계곡이 모두 넘치자, 논공열이 대패하여 시체가 50리나 엎어졌으며, 익사한 자는 셀 수 없었고, 논공열은 단기(單騎)로 달아나 돌아갔다. 회창 4년(844), 조정에서는 토번이 내란에 처하자 하주와 황주(湟州)를 수복할 것을 논의했는데, 마침내 급사중(給事中) 유몽(劉濛)을 순변사(巡邊使)로 임명해 먼저 무기와 미숫가루 양식을 준비하도록 하였고, 토번의 무리가 적다는 것을 들어 염탐케 했다. 토번 논공열의 장수였던 급장풍찬(岌藏豐贊)이 논공열의 잔인함을 미워해 상비비에게 투항하였다.
논공열이 군사를 일으켜 선주에서 상비비를 공격하는데, 상비비가 군사를 나누어 다섯 길로 삼고선 막도록 하였다. 논공열이 퇴각하여 동곡(東谷, 감숙성 임하현)을 지키자, 상비비가 목책(木冊)을 만들어 그를 포위했다. 논공열이 포위를 돌파하고 달아나 박한산을 지켰고, 나머지 무리들은 모두 상비비에게 항복해 버렸다. 회창 5년(845), 토번의 논공열이 재차 여러 부족을 규합시켜 상비비를 공격하였다. 상비비가 방결장(厖結藏)을 파견해 군사 5천을 데리고 그를 막았으며, 논공열이 대패하여 기병 수십명과 함께 달아났다. 상비비가 격문을 하주와 황주에 전달해 논공열의 잔학한 죄를 헤아려 '너희들은 본래 당나라 사람으로 토번에 군주가 없으니, 서로 당으로 돌아가 논공열에게 여우나 토끼처럼 사냥감이 되지는 말거라'고 일렀다. 이에 여러 부족들이 논공열을 따르는 것에서 점차 떠나갔다.
선종(宣宗) 대중(大中) 원년(847) 여름 5월, 논공열이 무종(武宗)의 상(喪)에 편승해 당항(党項)과 회골(回鶻)의 남은 무리들을 꼬드겨 하서(河西)를 침범했다. 조서로 하동(河東)절도사 왕재(王宰)에게 대북(代北, 산서성 이북)의 제군(諸軍)을 데리고 논공열을 치도록 하였다. 왕재가 사타(沙陀)의 주사적심(朱邪赤心, 李國昌)을 선봉으로 삼아 인주(麟州, 섬서성 신목현)로부터 황하를 건너 염주(鹽州, 섬서성 정변현)에서 논공열과 교전해 격파하고, 패주시켰다. 대중 2년(848) 겨울 12월, 봉상(鳳翔)절도사 최공(崔珙)이 토번을 격파하고, 청수(淸水)를 함락시켰다며 상주했다. 청수는 일찍이 진주(秦州)에 예속되었는데, 조서로 본주(本州)가 아직 수복되지 않아 임시로 봉상에 예속된 것이다. 논공열이 그의 장수 망라급장(莽羅急藏)을 파견해 군사 2만을 데리고 서쪽의 변경을 공략케 하였다.
상비비가 장수 탁발회광(拓跋懷光)을 파견해 남곡(南谷)에서 쳐서 대파하자, 망라급장이 항복했다. 대중 3년(849) 봄 2월, 논공열이 하주에, 상비비는 하원군(河源軍)에 진영을 차렸다. 제장들이 논공열을 치려고 했으나, 상비비는 '불가하다. 아군이 승세를 몰아 적(敵)을 가벼이하면, 저들은 막히고 어려워져서 죽음에 이를 것이니, 싸우면 필시 불리하다'고 했지만, 제장들이 따르지 않았다. 상비비는 분명 패배하리라 알고 하교(河橋)를 점거한 채 대기하였고, 제장들이 과연 패하였다. 상비비가 남은 무리를 거두어 다리를 불사르고 선주로 돌아갔다. 토번의 진(秦) ・원(原) ・안락(安樂) 3주(州)와 석문(石門) 등 7관(關)이 투항해오니, 태복경(太僕卿) 육탐(陸耽)을 선유사(宣諭使)로 임명해 조서로 경원(涇原) ・영무(靈武) ・봉상 ・빈녕(邠寧) ・진무(振武)에서 모두 군사를 내어 응하고, 접대하였다.
여름 6월, 경원절도사 강계영(康季榮)이 원주(原州) ・석문 ・역장(驛藏) ・목협(木峽) ・제승(制勝) ・육반(六盤) ・석협(石峽) 6관(關)을 탈취하였다. 가을 7월 정사일, 영무절도사 주숙명(朱叔明)이 장락주(長樂州)를 빼앗았다. 갑자일엔 빈녕절도사 장군서(張君緒)가 소관(蕭關, 감숙성 동심현)을 빼앗았다. 갑술일, 봉상절도사 이빈(李玭)이 진주(秦州, 감숙성 진안현)를 탈취하였다. 조서로 빈녕절도(邠寧節度)에서 임시로 군사를 영주(寧州, 감숙성 영현)로 이동시켜 하서에 호응하면서 접하도록 했다. 8월 을유일, 장락주를 고쳐서 위주(威州)로 삼았다. 하주와 농주(隴州)의 노약자 1천여명이 대궐에 도착하자 기축일에 황상(皇上, 唐宣宗)이 연희문(延喜門) 누각에 올라 그들을 보고선 기뻐하며 소리쳤고, 춤추고 뛰면서 호복(胡服)을 벗어 관대(冠帶)를 입으니, 보던 자들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
조서로 '백성들을 모아 3주(州)와 7관(關)의 전토(田土)를 개간하여 5년간 조세를 받지 않겠다. 지금부터 경성(京城, 長安)의 죄인 가운데 유배자는 모두 열 곳으로 귀양 보낼 것이다. 4도(道)의 장리(將吏) 가운데 진수지(鎮戍地)에서 전토를 운영하는 자는 관(官)에서 소[牛]와 종자를 지급해 줄 것이며, 온지(溫地)의 염리(鹽利, 소금 이익)는 변경을 구제할 수 있으니 탁지(度支)에 처리를 위임한다. 그 3주와 7관에 진수한 병졸들에겐 모두 의복과 식량을 배(倍)로 지급해 줄 것이며, 이어서 2년에 한 번씩 교대한다. 도로에 보책(堡柵)을 세워두어 장사꾼이 왕래하거나 교역함과 수졸(戍卒)의 자제가 통하여 집안 소식을 전달하는데 있어서 관진(關鎭)에서 구류해 어렵지 않게끔 하라. 그 산남(山南) ・검남(劍南) 변경에서 토번에 함몰된 주현(州縣)이 있다면, 역시 힘을 헤아려 수복시켜라'고 하였다.
겨울 윤(閏)11월 정유일, 재상이 하황(河湟)을 수복해 승리한 것으로 존호(尊號)를 올리겠다고 청했다. 황상은 '헌종(憲宗)께선 항상 하황을 수복할 뜻이 계셨으나, 중원에서 바야흐로 용병(用兵)했으므로 이루지 못하고 붕어하셨다. 지금 드디어 선대(先代)의 의지를 이루었을 뿐이니, 그것을 논의하여 순종(順宗)과 헌종 2묘(二廟)에 존호를 더하여 공렬(功烈)을 빛내거라'고 말했다. 안록산(安祿山)의 난(亂)이 하주의 서쪽에 미치자, 선주(鄯州) ・무주(武州) ・질주(迭州) ・탕주(宕州) 등의 고을이 모두 토번에 함몰당했고, 대종(代宗) 보응(寶應) 원년(762)엔 또한 진주(秦州) ・위주(渭州) ・임조(臨洮)가, 광덕(廣德) 원년(763)엔 다시 하주 ・난주(蘭州) ・민주(岷州) ・곽주(廓州)가, 덕종(德宗) 정원(貞元) 2년(786)엔 안서(安西)와 북정(北庭) ・농우(隴右)의 주현들마저 모두 함락당해 없어진 것이다.
대중 4년(850) 봄 2월, 진주를 봉상에 예속시켰다. 가을 9월에 토번의 논공열이 승려 망라인진(莽羅藺眞)을 파견해 군사를 거느리고 계항관(雞項關, 청해성 순화현) 남쪽에 다리를 건설했으며, 상비비의 군사를 백토령(白土嶺)에서 공격했다. 상비비가 장수 상탁라탑장(尚鐸羅榻藏)을 파견해 군사를 데리고 임번군(臨蕃軍, 청해성 서녕시 서쪽)을 점거하여 막도록 했으나 불리해지자, 재차 마리비자(磨離羆子)와 촉노공력(燭盧鞏力)을 파견해 군사를 거느리고 이우협(氂牛峽)을 점거해 막도록 하였다. 촉노공력이 요청하길 '군사를 멈추어 험한 곳을 막아 더불어 싸우지 말고, 기습병으로 양도(糧道, 군량 보급로)를 끊어버려 나아가 싸울 수 없도록 만들면서 퇴각하더라도 귀환하지 못하게 한다면, 달포가 지나기 전에 그 무리들은 반드시 무너질 것입니다'라고 했으나, 마리비자가 따르지 않았다.
촉노공력은 '나는 차라리 쓸모없는 사람이 될 바에야 패군지장(敗軍之將)이 되진 않겠소!'라고 말하고, 병을 칭하며 선주(鄯州)로 돌아가 버렸다. 마리비자가 맞서 싸우다 패사(敗死)했으며, 상비비는 식량이 부족해지자 탁발회광을 잔류시켜 선주를 지키게 하고, 부락 2천여명을 거느려 감주(甘州, 감숙성 장액현) 서쪽의 수초(水草)지대로 나갔다. 논공열은 상비비가 선주를 포기했다는 소식을 듣자 스스로 경기(輕騎) 5천을 데리고 그를 추격하였다. 과주(瓜州, 감숙성 안서현)에 이르러 탁발회광이 선주를 지키고 있음을 듣고선 마침내 하서의 선주와 곽주 등 8주(州)를 크게 약탈하는데, 그곳의 정장(丁壯, 壯丁)들을 죽이거나 파리한 노인과 아녀자의 코와 팔꿈치를 베었으며, 창[槊]으로 젖먹이들을 꿰어 희롱하고, 민가도 불살랐다. 5천리(里) 사이가 적지(赤地)가 되어 대부분 없어졌다.
대중 5년(851) 봄 2월 임술일, 천덕군(天德軍, 내몽고 烏拉特前旗)에서 상주하여 섭(攝) 사주자사(沙州刺史) 장의조(張義潮)가 사신을 파견해 투항해왔다. 장의조는 사주 사람으로 이무렵 토번이 크게 혼란해지자, 은밀히 호걸들과 관계를 맺어 스스로 반역하여 당나라에 귀부할 것을 모의했다. 어느날 아침, 무리를 거느리고 갑옷을 입혀서 주문(州門)에서 떠들어대니, 당나라 사람들이 모두 거기에 호응하였고, 토번의 지키던 자는 놀라서 달아났다. 장의조가 마침내 섭주사(攝州事) 표문을 받들고 투항해 온 것이다. 장의조를 사주방어사(防禦使)로 삼았다. 토번의 논공열이 잔학했기에 부족들이 많이 배반하였다. 탁발회광이 사람을 시켜서 그들을 꼬드겨 유세하자, 무리들은 혹은 흩어져 부락으로 돌아가거나 탁발회광에게 항복했다. 논공열은 형세가 고독해지자 무리들한테 뱃심 좋게 말했다.
"내가 지금 당나라에 입조(入朝)하여 군사 50만을 빌려와 불복하는 자들을 주멸시키고, 연후에 위주(渭州)를 국성(國城)으로 만들어 당의 책봉을 요청해 나를 찬보(贊普)로 삼게 한다면, 누가 감히 따르지 않겠느냐?!"
5월에 논공열이 입조하자, 황상은 좌승(左丞) 이경양(李景讓)을 보내어 예빈원(禮賓院)에 가서 원하는 바를 물었다. 논공열의 기색은 교만하고 거만한데다, 말씨가 허황되면서 하위(河渭)절도사로 임명해 줄 것을 요구했다. 황상이 허락하지 않았고, 삼전(三殿)으로 불러 대면하는데 평상시의 호객(胡客)처럼 하면서 위로하고 하사해 돌려보냈다. 논공열이 앙심을 품고 낙문천(落門川)으로 다시 돌아가 옛 무리들을 모아 변경의 우환을 만들고자 했다. 마침 비가 오랫동안 내리면서 식량이 떨어지자, 무리가 점차 흩어지더니 3백여명만 남았으며, 곽주로 달아났다. 겨울 10월에 장의조가 군사를 일으켜 부근의 과(果) ・이(伊) ・서(西) ・감(甘) ・숙(肅) ・난(蘭) ・선(鄯) ・하(河) ・민(岷) ・곽(廓) 10주(州)를 경략해 평정하고, 형 장의택(張義澤)을 파견해 11주의 도적(圖籍)을 받들고 들어와 조견했다.
이로부터 하황(河湟)의 땅은 모두 당나라에 편입되었다. 11월, 사주(沙州, 돈황)에 귀의군(歸義軍)을 두어 장의조를 절도사 ・11주 관찰사(觀察使)로 임명했으며, 또한 장의조의 판관 조의금(曹義金)도 귀의군의 장사(長史)로 삼았다. 대중 7년(853), 탁지(度支)에서 상주하기를 하황이 평정되어 매년 천하에서 납부된 금전(金錢)이 925만여민(緡)으로 550만여민은 조세(租稅)이고, 82만여민은 각고(榷酤, 술 전매)한 것이며, 278만여민은 소금의 이익이라고 하였다. 대중 11년(857) 겨울 10월 기사일, 진성(秦成, 秦州)방어사 이승훈(李承勛)을 경원(涇原)절도사로 삼았다. 이승훈은 이광필(李光弼, 肅宗代 安史의 난을 토벌한 거란족 출신 명장)의 손자이다. 이보다 앞서 토번의 추장(酋長) 상연심(尙延心)이 하주와 위주(渭州) 2주에서 부락을 가지고 투항해 왔는데, 무위장군(武衛將軍)으로 임명했다.
이승훈이 그 양마(羊馬)의 부유함을 이롭게 여기어 유혹해 봉림관(鳳林關)으로 들어와 진주 서쪽에 거주하게 했다. 이승훈은 제장과 함께 상연심을 붙잡을 것을 모의해 모반했다고 무고하면서 재산을 죄다 빼앗고, 무리들은 거칠고 먼 곳으로 이주시키려 했다. 상연심이 눈치채고, 이승훈의 군대가 연회를 벌이는데 좌중에서 말했다.
"하주와 위주 2주의 땅이 비었고, 사람도 드문 것은 굶주림과 역병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당나라 사람들이 내부에 많아져 삼천(三川, 平凉川 ・蔚茹川 ・落門川)으로 이주하니, 토번은 모두 멀리 질주(迭州)와 탕주(宕州)의 서쪽으로 달아났고, 2천리 사이가 적막하여 사람과 [밥 짓는] 연기가 없어졌습니다. 상연심은 들어가 천자(天子)를 알현하고, 부락의 무리를 모두 거느리고 나누어 내지(內地, 중국 본토)로 이주할 것을 요청해 당나라의 백성이 되면서 서쪽의 변경으로 하여금 먼지를 일으키는 놀람이 없도록 했으니, 그 공로는 역시 장의조보다 부끄럽지 않습니다."
이승훈이 그 공적을 스스로 가지고자 망설이며 허락하지 않았다. 상연심이 재차 '상연심은 이미 입조(入朝)했으며, 부락은 안으로 이주하였습니다. 다만, 진주에 다시금 의지할 수 없음이 애석할 따름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승훈과 제장들이 서로 쳐다보며 잠자코 있었다. 다음날, 제장들이 이승훈에게 '명공(明公)께서 먼저 영전(營田)을 개간해 사부(使府)를 두고 병사 1만을 끼면서 탁지에 급여를 의탁한다면, 장사(將士)들은 싸우거나 지키는 노고가 없어도 경작하고 파는 이익이 있습니다. 만약 상연심의 모책을 따른다면 서쪽 변방이 무사하며, 조정은 분명 사부를 혁파해 수비병을 덜고서 돌아와 진주를 봉상에 예속시킬 것이니, 우리로선 다시 바랄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승훈이 그러하다 여기고, 상주하여 상연심을 하위도유혁사(河渭都游奕使)로 삼아 무리를 통솔해 살도록 하였다.
의종(懿宗) 함통(咸通) 3년(862), 올말(嗢末)이 비로소 입공(入貢)했다. 올말은 토번의 노예를 부르는 것이다. 토번이 매번 군사를 일으켜 부유한 집에서 많이 노예를 가지고 따랐는데, 왕왕 한 집안에 수십명에 이르러 이로 말미암아 토번의 무리가 많아졌다. 논공열이 난을 일으키자 노예들은 대부분 주인이 없었는데, 마침내 서로 규합하여 부락을 형성해 감(甘) ・숙(肅) ・과(瓜) ・사(沙) ・하 ・(河) ・위(渭) ・민(岷) ・곽(廓) ・질(迭) ・탕주(宕州) 사이에 산재하였으니, 토번의 미약한 자들은 반대로 그들에게 의부했다. 함통 4년(863) 봄 2월, 천웅군(川雄軍)을 진주에 두어 성주(成州) ・하주 ・위주 3주를 예속시켰다. 이전의 좌금오(左金吾)장군 왕안실(王晏實)을 천웅관찰사로 삼았다. 3월, 귀의(歸義)절도사 장의조가 스스로 번한병(蕃漢兵) 7천을 거느리고 양주(涼州)를 다시 함락시켰다며 상주했다.
함통 7년(866) 봄 2월, 귀의절도사 장의조가 논공열이 곽주에 우거(寓居)하면서 바로 부근의 여러 부족을 규합시켜 변방의 우환으로 삼고자 했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고 상주했다. 향하는 곳마다 모두 원수[仇敵]로 만들어 스스로 받아들이는 곳이 없었다. 원수진 사람들이 선주에서 탁발회광에게 고변하자, 회광이 병사를 이끌고 논공열을 쳐서 깨뜨렸다. 윤3월, 토번이 빈녕(邠寧)을 노략하자, 절도사 설홍종(薛弘宗)이 막아 물리쳤다. 겨울 10월, 탁발회광이 기병 5백으로 곽주에 들어가 논공열을 생포해 먼저 그의 다리를 베고, 헤아려 참수하여 수급을 경사(京師, 長安)로 전달해왔다. 그 부락의 무리는 동쪽 진주로 달아났는데 상연심이 요격해 깨뜨렸으며, 모두 영남(嶺南)으로 이전할 것을 상주했다. 토번은 이로부터 쇠퇴하고 단절되어 걸리호(乞離胡)의 군신들은 마지막을 알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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