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조(太祖) 건륭(建隆) 원년(960) 3월, 오월왕(吳越王) 전숙(錢俶, 錢弘俶)이 사신을 파견해와 즉위를 축하해주었다. 이로부터 매년 조공하였다. 개보(開寶) 7년(974) 겨울 10월에 강남(江南, 南唐)을 정벌하면서 조서로 오월왕 전숙을 승주(昇州) ・동남행영초무제치사(東南行營招撫制置使)로 삼아 더해주었다. 이보다 앞서 전숙이 판관(判官) 황이간(黄夷簡)을 보내어 송나라에 입공(入貢)시켰는데 황제(皇帝, 宋太祖)가 그에게 이르기를, '그대는 돌아가 원수(元帥, 錢俶)에게 갑병(甲兵)을 훈련시키고, 강남에서 완고히 입조(入朝)하지 않으니 내가 장차 그들을 토벌한다고 말하라. 원수는 마땅히 나를 도와 사람들의 말에 현혹되지 말라 전하거라. 가죽이 없으면 털이 어디에 붙겠는가?[皮之不存, 毛將安附]'라고 하였다. 얼마 후 군사 기일을 은밀히 고(告)하자, 마침내 이런 명령이 있었다.
개보 8년(975) 여름 4월, 오월왕 전숙이 이미 명령을 받들어 심승례(沈承禮)를 권지국무(權知國務)로 삼고, 스스로 병사 5만을 이끌고 상주(常州, 강소성)를 공격했다. 승상 심호자(沈虎子)가 '강남은 국가의 울타리[藩蔽]인데, 지금 대왕께선 스스로 그 울타리를 거두려 하시니 장차 어떻게 사직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라고 간했으나, 듣지 않았다. 나아가 그 관문의 성(城)을 쳤으며, 북계(北界)에서 남당군을 패배시켰다. 군사를 보내어 강음(江陰)과 의흥(宜興)을 공격해 모두 함락시켰고, 이윽고 상주도 뽑아버렸다. 강남주(江南主, 南唐 李煜)가 전숙에게 서찰을 전달해 말하길 '오늘 내가 없어진다면, 내일 군주께서 어찌 계실 수 있겠소? 천자(天子)는 단번에 땅을 바꾸고, 공훈도 갚을 것이니 왕(王) 역시 대량(大梁)의 일개 포의(布衣, 평민)에 불과하오'라고 하였다. 전숙이 이욱에게 답하지 않았다.
이욱의 서찰을 진헌하자, 황제가 우조(優詔)로 전숙을 칭찬했다. 개보 9년(976) 2월, 오월왕 전숙이 내조(來朝)했다. 앞서 황제가 오월국 사자에게 '원수(元帥)가 비릉(毗陵, 常州)을 함락시키는데 큰 공적이 있으니, 강남이 평정되길 기다렸다가 잠시 짐(朕)과 한차례 상견(相見)하러 온다면 오래된 생각을 위로하며, 곧바로 돌려보낼 것이다. 짐은 규폐(圭幣)를 세차례 잡아 상제(上帝)를 뵙는데, 어찌 식언(食言)하겠는가?'라고 말했다. 이때에 이르러 전숙이 그의 처(妻) 손씨(孫氏) ・아들 유준(惟浚)과 함께 입조하자 예현택(禮賢宅)을 하사해 머물게 하고, 황제가 친히 행차하여 연회를 베풀었으며, 포상하는 것이 대단히 후했다. 전숙에게 칼[劍]을 착용한 채로 대궐까지 올라와 조서에 이름을 쓰지 말도록 했다. 진왕(晋王)과 형제의 예(禮)를 받으라 했으나, 전숙이 고사하자 중지시켰다.
2개월간 머물다 돌려보냈는데, 단단하고 두껍게 봉지(封識, 封印)된 황색 보자기 한장을 내리면서 전숙에게 '도중에 은밀히 봐야만 하네'라고 타일렀다. 개봉해보자, 모두 군신(群臣)들이 전숙을 억류시킬 것을 요청한 상소문이었고, 전숙이 몹시 두려워하면서도 감동했다. 태종(太宗) 태평흥국(太平興國) 3년(978) 3월 기유일, 전숙이 재차 내조했다. 진홍진(陳洪進)이 영토를 헌납한 데 맞이해 두려워지자, 상표(上表)하여 오월국왕(吳越國王)의 책봉을 파직시키고, 조서에 이름을 적지 말라는 명령마저 천하병마대원수(天下兵馬大元帥)와 나란히 해제해 줄 것을 간청하면서 갑병(甲兵)을 돌려보내 귀환을 빌었으나, 황제[宋太宗]가 허락하지 않았다. 신하 최인기(崔仁冀)가 '송나라 조정의 뜻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대왕께서 속히 영토를 헌납치 않는다면, 조만간 화(禍)가 미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전숙이 좌우(左右)와 언쟁하며 불가하다고 하자, 최인기가 언성을 높여서 말했다. '지금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 장악당했고, 더우기 본국과 1천리(里) 떨어졌는데, 생각컨대 새의 날개가 있다한들 날아서 떠날 뿐입니다!' 전숙이 마침내 계책을 결단하여 표문을 올리고, 그 경내(境內)의 13주(州)1 ・군(軍) ・86현(縣)을 헌납했다. 전숙이 조정에서 물러나자, 오월국 장리(將吏)들이 비로소 눈치채고 모두 '우리 임금께서 돌아가실 수 없게 되었구나!'라며 통곡했다. 3월 정해일, 조서로 전숙을 회해국왕(淮海國王)으로 삼아 봉(封)하였으며, 전숙의 아우 전의(錢儀) ・전신(錢信)에겐 나란히 관찰사(觀察使)를 제수하고, 아들 전유준(錢惟浚) ・전유치(錢惟治)에겐 절도사(節度使)를, 전유연(錢惟演) ・전유호(錢惟灝) 및 족속(族屬)과 요좌(僚佐, 부속 관원)들한테도 차등있게 관직을 제수했다.
또한, 그 장교(將校)인 손승우(孫承佑)와 심승례(沈承禮) ・최인기(崔仁冀)도 나란히 절도사에 제수하면서 대우하고 위로해주는 것이 당시에 가장 으뜸이었다. 곧이어 양절(兩浙)에 명령해 전숙의 시마(緦麻) 이상 친족(親族)과 관내(管內)의 관리들은 출발하여 모두 변경(汴京, 開封)에 이르게 하니, [선박들만] 무릇 1044척에 달했다. 범민(范旻)을 권지양절제주군사(權知兩浙諸州軍事)로 임명했다. 범민이 '전숙이 그동안 자기 나라에 머무르면서 요역(徭役)과 부세(賦稅)가 너무 번잡하고 엄했습니다. 청컨대, 폐해를 모조리 덜도록 해주십시오'라고 상언하자, 그대로 따랐다. 태평흥국 8년(983) 12월, 전숙을 한남국왕(漢南國王)으로 고쳐 봉(封)하고, 천하병마대원수를 파직했다. 단공(端拱) 원년(988) 8월 무인일, 전숙의 생일을 맞이해 황제가 연회를 베풀어주었다. 이날 저녁에 갑자기 사망했다.
진홍진(陳洪進)이란 사람은 옛 청원절도사(清源節度使) 유종효(留從效)의 아장(牙將)이었다. 건륭 3년(962) 3월에 유종효가 사망하자, 아들 유소자(留紹鎡)가 유무(留務)를 관장했다. 오월국의 빙사(聘使, 초빙된 사신)가 도착하자 유소자가 밤중에 불러 연회를 함께했다. 진홍진은 유소자가 오월국에 귀부할 것을 모의했다며 속이고, 그를 붙잡아 남당의 건강(建康, 南京)으로 압송한 다음 부사(副使) 장한사(張漢思)를 추대해 유후(留後)로 삼으면서 자신 스스로 부사가 되었다. 얼마 후 장한사는 진홍진의 전횡을 근심하여 연회를 베푸는 참에 복병을 세워 장차 죽이려 하였다. 술이 수차례 도는데 땅이 갑자기 크게 흔들렸고, 공모자가 겁을 낸 나머지 모의했던 사실을 진홍진에게 고해버렸다. 진홍진이 서둘러 나가면서 갑사(甲士)들이 죄다 흩어졌으며, 이때부터 서로 방비하게 되었다.
어느날, 진홍진이 커다란 쇄사슬을 소매에 감춘 채 편안하게 부중(府中)으로 들어와 당번병들을 꾸짖어 쫓아냈다. 장한사가 방안에 앉아있자, 진홍진은 그 입구를 쇄사슬로 막아버리고 사람을 시켜 문을 두드리며 말하기를, '군중(郡中)의 군사 관리들은 부사가 유무(留務)를 주관할 것을 간청하니 무리들의 정(情)을 거스르는 것도 불가하지만, 도장을 전수받았다'라고 하였다. 장한사는 경악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고, 문간으로부터 도장을 내놓았다. 진홍진이 급히 장리(將吏)들을 불러내어 '유후가 나한테 도장을 넘겨주어 업무를 맡아보도록 하였다'고 말하자, 무리가 모두 축하했다. 즉시 장한사를 별사(別舍, 別館)로 옮겨서 병사가 지키게 하고, 사신을 파견해 남당에 명령을 요청했으며, 또한 아장 위인제(魏仁濟)도 샛길을 통해 [송나라에] 봉표(奉表)로 알려오면서 제서(制書) 명령을 청했다.
건덕(乾德) 2년(964) 2월, 청원(淸源)을 평해군(平海軍)으로 고치고 거듭 진홍진에게 절도사를 제수했다. 진홍진이 매년 조공했는데, 백성들한테서 가렴(苛斂)하는 것이 많아 2주(州)에선 매우 괴로워하였다. 태평흥국 3년(978) 여름 4월, 진홍진이 내조(來朝)하여 [복건 남부의] 장주(漳州) ・천주(泉州) 2주와 40현(縣)을 송나라에 헌납했다. 조서로 진홍진에게 무녕절도사(武寧節度使) ・동평장사(同平章事)를 제수하였고, 변경(汴京, 開封)에 머무르도록 했으며, 여러 아들들도 모두 주요 군(郡)의 관리로 제수받아 파견되었다. 진홍진은 훗날 태원(太原, 北漢國)을 평정하는데 종군하였고, 태평흥국 6년(981) 기공(岐公)에 봉해졌으며, 옹희(雍熙) 3년(986) 사망했다. 교지(交趾, 베트남)와 점성(占城, 참파), 진랍(眞臘, 캄보디아) 등 바닷가에 접한 '번(蕃)'들이 뒤따라 조공하기 시작했다.


절강성 항주시 서호(西湖) 북안의 보석산(寶石山)에 소재한 보숙탑(保俶塔) 전경, 1978년 11월
아소카왕의 불탑 8만 4천기 신화를 모방했던 5대말엽 오월국왕 전홍숙에 의해 건립되었다.

동진(東晋) 함화(咸和)초년 인도인 고승 혜리(慧理)가 창건한 영은사(靈隱寺) 대웅전, 1979년 2월
오월국 시대에 중수 ・확장되어 남송대부터 강남 선종(禪宗)불교의 총본산으로 입지를 굳혔다.
tag : 5대10국, 강남통일, 吳越國, 忠懿王, 宋史紀事本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