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댈러스(Dallas)의 참변'으로 공기가 절망적인 시기에 텍사스 카우보이 타입의 린든 B. 존슨이 미합중국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그날은 진주만 공습 이래로 가장 우울했던 날이었으며, 미국은 충격과 암흑 상태에 빠졌다. 인성과 정치 스타일이 전임자와는 전혀 딴판인 LBJ는 JFK가 기용한 행정부 주요 인사들을 거의 그대로 유임시켰다. 각료들을 특별히 좋아하거나 신뢰해서라기보단 1964년 대선 시즌을 앞두고 JFK가 보유한 정통성과 인기, 연속성의 무드를 자신의 새로운 내각에 투자 ・과시할 명분이 고려됐기 때문이다. JFK는 부통령 LBJ를 공정하고 사려깊게 대했지만, 백악관의 일부 동료들은 적대감 정도는 아니더라도 부통령을 경멸적으로 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이제는 그들의 태도가 더욱 경화되었다. 1960년 LA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로버트 케네디가 이 텍사스인이 공천 후보자의 러닝메이트에 지명되는 것을 저지하려 시도했을 때부터 양자간 관계는 시종일관 적대적이었다.
상호 적대감에도 불구하고, 신임 대통령은 RFK에게 법무장관직에 당분간 재직해 줄 것을 요청했으며, 그는 상당한 고심끝에 수락해주었다. 물론 RFK가 신뢰받는 보좌관이 될 가능성은 없었고, 결국 불편한 공생관계도 9개월만에 막을 내리게 된다. JFK의 임기 마지막 반년간 RFK는 공민권 문제에 몰두하느라 다른 사안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더우기 외교와 관련해 대통령과 법무장관의 견해, 특히 중남미 정책과 핵무기 통제에 대한 이들간 견해차는 극명했던데다, 케네디家의 명성을 빌리지 않고 당선되기를 희망한 LBJ에게 러닝메이트로 RFK는 애당초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다른 각료들 가운데 국무장관 러스크는 변함없이 충실히 봉직했고, 맥나마라 역시 세계은행 총재로 취임하기 전까지 행정부에 잔류해 있었다. 국가안보보좌관 맥조지 번디(McGeorge Bundy)는 1966년 3월까지, 월트 로스토우(Walt Rostow)는 번디와 교체돼 백악관으로 들어간 같은해 4월까지 정책기획이사회를 책임졌다.
야망에 가득찬데다, 정열적인 린든 B. 존슨은 미합중국의 8번째 '승계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결코 지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LBJ는 광활하고 탁트인 산지가 많은 텍사스에서 출생하여 성장했고, 소학교 교사로 사회생활에 첫발을 내딛긴 했어도 교육의 속성상 지력을 고급화시키지 못한 지방 학교를 다녔으며, 전임자의 장기였던 아이비리그식 전통의 박식함이나 세련된 매너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그는 조잡하고도 비속한 설명으로 종종 동료 정치가나 청중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그의 자발적 대(對)국민성명은 상투적인 용어로 가득찼다. 전임자와의 스타일 차별성을 의식한 LBJ는 아마도 질투성 비교에 대한 분개와 '평민(Commoner)'으로서, 미국의 대다수 근본적인 도덕적 가치와 애국적 미덕이 발생하는 토착적 환경의 산물로 스스로를 표현하려는 경향을 증대시켜갔다. 그럼에도, 상원 다수파 원내총무로 활약하면서 입증되었듯이 그는 권력의 지렛대를 조정하는 예리함을 갖추고 있었다.
의회에서 LBJ는 일반적으로 개화되고, 공정하다 자부한 자신의 입법 목표를 성사시키기 위해 의원들을 매수하거나 협박, 혹은 기만하는 정치적 거래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해 온 베테랑이었다. 빌 모이어스(Bill Moyers)는 그를 '작은 우리안에 있는 커다란 말'이라 칭했다. 그는 오래전부터 대통령의 자리를 갈망해왔으나, 스스로 심사숙고한 것처럼 '국가가 남북전쟁 종식으로부터 충분히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남부인 아래서 단합될 수 있을지 의문'인 까닭에 아마도 1963년 그해말의 기묘했던 상황적 우연하에서만 권좌에 등극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비록 '찬탈자' 같은 느낌이 들었음에도, 백악관에 입성한 이상 '제2의 루스벨트'를 지향하면서 '훌륭하고, 강력하며, 위대한' 대통령으로 역사에 기록되기를 원했다. 본래 부통령 취임 전까지 반평생 외국 경험이라곤 신혼여행과 바캉스, 비즈니스를 겸한 멕시코 방문외에 2차대전 당시 태평양 전선 복무가 전부인 LBJ에게 외교정책은 '최우선 과제'가 아니었다.
그는 대외 문제보다는 개인적으로 구상한 '위대한 사회' 프로그램에 따라 해결될 유형의 국내 쟁점들, 즉 공민권과 의료보험, 교육, 빈곤추방 원조 등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베트남의 수렁이 가시화된 임기 중후반 이후로 열정 자체가 시들해지긴 했지만 말이다. 이는 1차적으로 자신의 '뉴딜주의 유산'에서, 그리고 또 부분적으로 남부의 '고립주의자 분파' 출신 정치인으로서의 경험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그가 외교에 집중할 경우가 생기는 한, 유럽과 중동 ・아프리카보단 중남미나 동남아 문제를 다루는 것을 선호한 것도 나름의 배경과 사정이 내포된 셈이다. 그는 번잡한 관례와 허례허식으로 점철된 의정서(議定書)와 의전(儀典), 그리고 외교 고관들의 끝없는 행렬에 참을성이 없었으며, 그러한 임무들을 러스크에게 위임하기 일쑤였다. 윈스턴 처칠의 국장(國葬)에 불참한 제스처야말로 존슨 행정부의 '유럽 경시주의 노선'을 반증해주는 명명백백한 구실로 작용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외교정책에 대한 LBJ의 철학은 비교적 단순했다. 국제 공산주의의 침략은 항상 그 궤도상에서 중지되어 원상태로 회복되어야만 한다. 미국은 국제법을 지지하지만, 더불어 국가 이익에 현실적 견해를 갖추어야 하며, 어느 때라도 장소 불문 그것을 보호할 준비가 되었다는 점을 보여주어야 했다. 미국은 국제기구에 의한 집단 안전행동에 의존할 수 없으나, 대통령 개인의 견해로는 유엔은 일부 장기적인 건설적 목표들을 위해 기능하였다. 그것은 미국의 지지를 받을만하고, 가능한 한 미국의 기본 가치와 정책 목적에 부합되는 명시적 목적들을 위해서 활용되어야만 했다. 물론 베트남에 밀려 상대적으로 등한시되긴 했어도 서유럽 안보가 미국의 국익과도 직결되는 사안인 만큼, 그는 나토의 열렬한 옹호자였다. 마지막으로 LBJ는 미국의 사법체계 범위내에서 대통령이 외교정책을 결정한다고 주장했지만, 의회의 지속적인 반대를 불러일으키거나 그럴만한 공산이 있는 목표들을 추구하는데엔 상당히 망설였다.
적어도 의회의 '묵시적 동의'가 필요한 상황에서 그는 1952년 트루먼의 전례를 상기하고, 외교정책이 선거를 승리로 이끌기보단 패배로 몰아갈 가능성이 더욱 높다고 확신했으며, 임기 내내 거기서 파생된 트라우마에 시달리곤 했다. 바로 그점에서 베트남전은 미국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외교정책 경험, 재선 자격이 있는 대통령이 자신의 후보직을 부득불 포기하도록 만들만치 깊은 국내적 분열을 유발시킨 전무후무한 케이스였다. 그것은 독립전쟁으로부터 가장 장기적이면서 가장 좌절한 전쟁이 되었다. 지구 반대편 동남아시아의 반도에서 일어난 분쟁은 국내의 정부 제도에 대한 지식인들과 청년층의 유례없는 소외, 군(軍) 복무의 침식, 사회질서와 기강의 붕괴, 일부 대도시에서의 정치적 폭력 증가를 야기시켰다. 거기다 국가의 적지않은 제반 기구들이 실패나 패배감에서부터 배반 혐의, 도덕적 냉소와 심리적 자학으로 나가는 경향에 걸친 '다양한 감정적 반작용의 이상한 혼합'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러한 모든 현상은 이전의 어떠한 국가가 성취한 것보다 가장 결정적이고, 독일과 일본을 상대로 세계적인 정치 ・군사적 대승리를 거둔지 불과 4반세기도 미처 지나지 않아 발생했다. 미국의 헤게모니적 웅대함의 시대가 조기에 끝장나버린 것처럼 보였다. 한국전쟁이 야기시킨 당혹감은 그 전쟁의 본질, 생명과 재산을 희생시켜 가면서 얻고자 했었던 국가의 목적과 그 목표들을 달성하기 위한 최고의 정치 ・군사전략에 관하여 더많은 혼란이 뒤따른 베트남 전쟁에 직면해 혼합되었다. 존슨 행정부는 '미(美) 국민들'에게 미국은 자국과 상관없는 한 내전에 개입했다기보단 공산주의 침략의 희생국을 원조하면서 실제로 국제전쟁에 깊숙이 관여하게 되었음을 솔직하게 표명하지 못했다. 이래가지곤 미국이 그 자신의 도덕적 ・법적 ・정치적 가치들에 대한 책임감, 아니면 그 자신의 이익이라는 현실적인 평가와 그것에 대한 정의(定義)로부터 얼마나 입각해 행동하고 있는지의 여부는 결코 명확해질 수 없었다.
베트남에서 싸운 장교들은 전략과 전술이 엇갈렸다는데 동의했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대학 교수와 학생들을 전쟁 개입에 반대하는 방향으로 전환시키고, '존슨氏의 전쟁(Mr. Johnson's war)'이라 보도한 언론의 편향성 ・비생산적인 역할을 비난하였다. 그와 동시에 비판자들은 LBJ와 행정부가 논리적인 설명력과 일련의 전략 목표들을 제시하지 못했으며, 대통령의 국내 사회개혁 프로그램을 위태롭게 만들지 않느라 전쟁 노력을 위한 여론의 전폭적인 지지를 동원하지 못했음을 비난했다. 심지어 구정공세 직후에도 자유주의 성향의 동부 지식인들을 제외하면, 일반 여론은 여전히 철군을 원하지 않았으며, 차라리 승리나 혹은 철수의 양자택일 전략을 선호했다. 재직 마지막 2년간 LBJ와 그의 보좌관들은 '너무 과다한 것'과 '너무 과소한 것', 즉 소련과 중공의 대규모적인 개입 도발과 공산주의자들에게 인도지나를 '상실'당하는 것 사이의 타협을 알아내려는 실험적인 시행착오를 추구하는 듯 했다.
이러한 수단만으로는 하노이를 한계점으로 몰아넣기에 불충분했다. 그것은 북베트남 지도부의 열성적인 집요함과 인내심, 목표를 성취하고자 피를 흘리는데 주저함이 없었던 의지와 능력을 과소평가하게 만들었다. 대통령은 매일 전쟁터로 쏟아붓는 통계에 나온 출격 횟수나 폭탄 투하량, 목표물, 적의 사망자 수, 확보된 마을에 주의를 집중시킨 반면, 호치민과 그의 동료들은 자신들의 시선을 워싱턴과 서방의 주요 언론사 기사에 고정시켰다. 웨스트모어랜드(Westmoreland) 장군은 자신의 '소모전략'은 기술공학적으로 우월한 미국의 병력이 월맹군의 많은 부대들을 재래식 전투로 유도시킬수록 최종적인 승리를 가져올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도 북베트남의 끈질긴 지구력을 과소평가한 것이다. 데이비드 핼버스탬(David Halberstam)은 당시 상황을 빗대어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미국은 강대하지만 제한전을 수행하는 분열된 민족이었고, 북베트남은 약소하지만 총력전을 전개하는 통일된 민족이었다.'

대통령 재임기 '유럽 경시노선'이란 지적이 수시로 제기되는 가운데 예외적인 방문이었다.

라틴아메리카 비핵화 구상을 명시한 '틀라텔롤코 조약'이 같은해 2월, 멕시코의 중개로 체결되었다.

호주로부터의 귀국 도상중 캄란만(灣) 기지를 찾은 LBJ와 마중나온 미군 병사들, 1967년 11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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