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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계절, 창경원 야앵회(夜櫻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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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원(昌慶苑)하면 바로 벚꽃을, 벚꽃하면 창경원을 연상하리만치 창경원의 벚꽃은 너무나도 유명했다. 온 국민의 마음을 그토록 사로잡았던 벚나무가 창경궁 내부로 이식된 것은 대략 합방 전후였으리라 추정된다. 창경원 건립에 참여하고, 1945년 종전시까지 창경원장(苑長)을 역임했던 시모코리야마 세이이치(下郡山誠一)가 <조선일보>와의 인터뷰[1938.3.26]에서 증언했듯이 동식물원 개원(開苑) 당시 일본에서 구경하러 건너온 사람들이 창경원을 일본식 정원으로 개조하는게 어떻겠냐고 한 제안이 동기가 되어 새끼 손가락만한 묘목 2백그루를 내지(內地)에서 가져와 식수한 것을 시초로 매년 보식한지 28년째 2천그루가 되었다. 종류는 왕벚나무가 주종을 이루었으며, 겹벚, 수양벚, 산벚나무도 있었는데 왕벚은 일본의 국화(國花)로 저들은 이를 '요시노 사쿠라(吉野櫻)'라 불렀다.

타국의 왕궁에 저희 국화를 심는다는 것은 동식물원과 마찬가지로 역시 왕실의 권위를 무시하는 방자한 발상이라 하여 적지않은 거부감이 있었다. 그러나 꽃이야 무슨 죄가 있으랴. 다만, 그때까지 조선에서는 벚나무를 무더기로 식수해 일시에 구름처럼 피었다 지는 그 화려하고도 장엄함을 미처 경험하지 못한 탓으로 오로지 꽃에 매료되었을 뿐이었다. 더우기 알고 보면 왕벚은 본디 원산지가 제주도이니 혐오감을 느낄 필요는 없을 터이다. 창경원의 벚꽃이 세인의 이목을 끌기 시작한건 나무가 어지간히 성장해 볼만해졌을 무렵인 1918년부터였다. 1920년 4월의 개화기엔 하루에 경성 인구의 1/10에 해당한 2만 8천여명이 꽃구경을 나왔다. 당시 일부 특권층이나 내지인[日人]들은 복잡한 대낮을 피해서 특별 교섭으로 밤중에 들어와 나무 아래다 술판을 벌이고, 흥청거리는 새 풍습이 생겨났다.

이로 말미암아 창경원을 야간에도 개방하라는 여론이 일기 시작했고, 당국은 몇해를 두고 검토하다 마침내 1924년 4월 20일 일요일을 기하여 전면적으로 야앵회(夜櫻會), 즉 밤벚꽃놀이를 개시하기에 이른 것이다.

원로 언론인 조풍연(趙豊衍)은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당시 서울에 살던 일본 사람들이 벚꽃이 필 때면 밤마다 창경원에 도시락을 싸가지고 모여 꽃나무 밑에 둘러앉아 술을 마시고 노는 모습이 좋아보였던 게죠. 그것을 보고 서울 사람들도 이내 밤이면 창경원으로 찾아가곤 했지요. 해질녁이면 배우개 네거리[종로4가]가 창경원을 찾아가는 인파로 하얗게 뒤덮이곤 했어요."


초기의 야앵회는 조흥은행의 전신 한성(漢城)은행이 이왕직(李王職)과 계약을 체결, 휘황한 전등을 나무가지마다 장식하여 손님을 끌어들였는데, 입장료와 매점 수입의 일부를 이왕직에 납부하는 식으로 운영했다. 이왕직에서도 아악대(雅樂隊)를 대어 흥을 돋구고, 유무명의 연예단체들도 다투어 가설무대를 꾸미고 흥행을 하니, 해가 갈수록 성황을 이루어 순종 승하로 중단된 1926년을 제외하면 일제 말기까지 한번도 거르지 않고 실시했다. 1924년 최초의 야행회 첫날밤은 당일 날씨가 쌀쌀한 탓에 주간 입장객 4만명의 1할도 안되는 3500명만 입장했다. 게다가 입장료도 주간과 같이 10전씩 받아 비싸다며 항의받기도 했는데, 장원과장 스에마쓰(末松)가 '금년엔 시험삼아 한 일이니깐, 내년부터 여러가지 경험들을 살려서 개선하겠다'는 공문을 홍화문에 내붙이는 소동까지 빚어졌다.

원내의 벚나무 배치를 보면 왕벚을 주요 간선도로 양측에 2열로 심어서 '벚나무 터널'을 조성하고, 연못가나 화단 및 휴식공간엔 겹벚과 수양벚을 배치시켰으며, 산벚은 녹지의 잡목림 사이에 심었다. 벚꽃은 각자 종류마다 개화기를 달리해 4월 중하순의 왕벚이 지나면 파란 잎과 더불어 산벚이 피었고, 겹벚과 수양벚은 5월 중순에 만발, 명실공히 국내 유일의 벚꽃 명소가 되어 1920년대 후반부터 절정에 이르렀다. 벚나무 터널의 배치 경로는 이하와 같다.


제1열 

홍화문(弘化門) ~ 선인문(宣仁門) 좌우의 맹금사(猛禽舍)와 공작사(孔雀舍) 전방 ~ 대수금사(大水禽舍)와 소수금사 사이를 우회전 ~ 궁궐 남쪽 담장의 초식동물사(舍) 앞 ~ 다시 우회전하여 낙타 ・타조사 앞

제2열

명정전(明政殿) 남행각 남쪽의 사자 ・표범사 및 그 우측 전방의 곰 ・호랑이사 앞

제3열

홍화문 ~ 통화문(通化門) ~ 춘당지(春塘池) ~ 식물원

제4열

통화문 ~ 명정전 북행각 뒤편 ~ 창경원 사무소[迎春軒과 集福軒] 앞
 
제5열

창경원 사무소 ~ 함인정(涵仁亭) ~ 명정전 서북쪽 표본관(標本館) ~ 함양문(涵陽門, 秘苑 연결통로)

제6열

통명전(通明殿) ~ 경춘전(景春殿) 앞 ~ 함인정

제7열

춘당지 연못 ~ 성종태실비(成宗胎室碑) 앞 ~ 박물관(博物館, 38년 이후 藏書閣) ~ 함양문


1927년의 창경원 야앵회 상황을 당시 <조선일보> 기사를 통해 보기로 하자.


"만점홍화(萬点紅花)도 1주일내로 만개. 20일경 창경원 야간 공개"

먼 들에 아지랑이 끼이고, 창밖에 버들눈이 누르니 봄인가? 부드러운 산들바람이 지나는 곳에 한가한 초동(樵童)의 정겨운 피리소리 섞여오니 봄인가? 봄은 이미 온지가 오래였다. 그러나 봄의 별이요, 향기인 꽃이 한양에는 아직도 붉은 입술을 트지 낳았더니 지난 14일 가는 비가 지나간 후로 창경원의 꽃봉오리는 한층 더 불어올라 일기(日氣)가 이대로만 계속되면 오는 22~3일경엔 창경원의 '사구라'도 한껏 필 모양인데, 작년에는 순종조(純宗朝) 승하로 붉은 꽃도 속절없이 눈물로 얼룩졌지만, 금년엔 일반인에게 공개하고자 창경원 장원과에서는 예년과 같이 20일경부터 야앵(夜櫻)을 종람시키기 시작하여 밤 9시까지 개방하리라 하며, 이것이 지나면 우이동 ・장충단 ・효창원 ・남산공원 등지의 '사구라'가 계속 만발하여 고삽(苦澁, 매마른)한 도회인의 흉금을 자욱히 위로하여 줄 것이다.

- 1927년 4월 17일 일요일


"창경원 상춘객만 1만 5천 돌파. 화창하던 어제 일요일의 봄 한양에 무르녹은 춘색(春色)"

어제는 일요일이요, 부드러운 봄바람과 가냘픈 빛발에 벌써 여기저기 펀듯펀듯 벚꽃이 피기 시작해 꽃을 찾아가는 남녀 ・노유(男女 ・老幼)들은 서로 서로 손을 이끌고, 시내 ・시외로 휘몰려 다니며 대자연에 조화되어 봄날의 평화를 노래하게 되었는데, 시가지에 가까운 탑동공원 ・장충단은 말할 것도 없고, 시외 각 사찰까지 모두 잡답(雜踏)상을 이루었는데 이날에 창경원의 봄을 찾아간 손님들은 총 15377인(人)으로 그중 소아(小兒)가 3001인이었더라.

- 1927년 4월 19일 화요일


"창경원 야앵 금야(今夜)부터 개원(開苑). 이후 1주일간"

봄날이 돌아온지 이미 오래이건만, 때때로 봄 추위[=꽃샘추위]는 없지 않더니 작금에 이르러서는 확실히 봄은 오고 말았다. 길거리에는 사람의 왕래가 끊기지 않고, 산과 들에는 봄을 찬양하는 사람과 또는 봄을 자랑하는 사람으로 완연히 봄기운을 나타내고 있으니 어느 누구건 봄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없게 되버렸다. 그리하여 20일부터 개원할 예정이었던 창경원의 야앵도 작일(昨日, 어제)부터 갑자기 일기가 화창해져서 창경원의 '사구라'는 하룻밤 사이에 꽃봉오리가 반짝 벌어졌으므로 예정을 변경해 20일부터 26일까지 1주일간 개원하기로 하였다.

- 1927년 4월 20일 수요일


벚나무가 성령기에 이른 1940년경엔 <앵화폭풍(櫻花暴風)> 혹은 <동물원 가세>란 만요조(慢謠調)의 대중 가요가 유행하여 경성의 세시(歲時)풍경을 그럴싸하게 말해주고 있다. <앵화폭풍> 가사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1절

여기도 사꾸라 저기도 사꾸라 / 창경원 사꾸라가 막 피어났네
늙은이 젊은이 우굴 우굴 우굴 우굴 / 얼시구 좋다
음~ 꽃시절일세
처녀 댕기는 갑사나 댕기 / 총각 조끼는 인조견 조끼
밀어라 당겨라 잡아라 놓아라/ 어허얼사 음~ 꽃이로구나

2절

쌍둥이 사꾸라 홀아비 사꾸라 / 창경원 사꾸라가 막 피어났네
혼 나간 벚님네 너울 너울 너울 너울 / 얼시구 좋다
음~ 꽃시절일세
영감 상투는 비뚤어지고 / 마누라 신발은 도망을 쳤네
영감 마누라 꼴 좀 보소 / 어허얼사 음~ 꽃이로구나

어럴시구 창경원에 꽃이로구나


창경원과 종로를 중심으로 경성을 묘사한 <동물원 가세>엔 각 절마다 다음과 같은 후렴이 붙어있다.


아! 좋다 터졌구나 / 창경원의 봄바람
노리깽이 구다사이 / 노리깽이 구다사이
동물원 가세 / 동물원 가세


여기서 '노리깽이 구다사이'란 말은 '노리캉켄(乘換卷) ください' 즉 '승환권 주세요'라는 일본어를 익살스럽게 표현한 것인데, 그당시 경성의 전차(電車)는 환승 지점에 전차회사의 직원이 나와있어 노선을 바꿔타는 승객들한테 일일이 승환권을 교부했기 때문이다. 이 노래는 모두 가수 김정구가 특유의 컬컬하고 호쾌한 창법으로 불러 크게 유행했고, 노래말처럼 봄이 한창인 시기에 창경원의 꽃바람은 그야말로 폭풍이요, 온 장안을 술렁이게 만들었다.




                 창경원 전경. 조선초 태종의 거처였던 수강궁(壽康宮)의 후신이며, 1909년 유원지로 개관하였다.

              창경원의 정전(正殿) 명정전. 본래 행각 주위에 모란밭을 조성했으나, 해방후 병충해로 고사되었다.
              정전 건물은 70년대초까지 도기류 등의 전시장으로 활용되었다가 덕수궁 박물관에 이전했다.

                   명정전 서쪽에 소재한 열대 포유류 전시장 축사(畜舍). 60년대 후반 현대식으로 신축한 것이다.

                     개원시 동양 최대 규모로 준공된 창경원 식물원 大온실 전경. 양측의 돔은 84년에 철거됐다.

             야앵회 하이라이트 코스, 춘당지 수정궁(水亭宮). 일본식 정자였던 것을 재일교포 실업가가 개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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