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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향수병 환자의 보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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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로 보는 1937년 노동절의 베를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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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전에 앞서 예방 차원에서 후방을 숙정하려던 의도와 달리 계급투쟁은 철폐되지 않았다. 오히려, 나치 지배기구의 내적 경쟁이 아래로부터 가해지던 근원적인 사회적 압력과 결합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러한 갈등의 덤불속에서 경제는 계속 팽창하는 가운데 노동력이 부족하자, 임금이 거의 자동적으로 인상되었다. 산업관계에 독재적 질서를 창출하기 위해 들어섰던 나치즘은 갈등을 해소하는 합리적 수단을 파괴해버린 것밖에 별반 한 일이 없었다. 이렇게 본다면, 나치즘은 사회정책 영역에서 해결 불능의 모순에 빠지고 말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노동자들한테 주는 의미는 그들이 비록 정치적으로 탈권화되고, 관료적으로 규제되고 있었지만 나치 체제의 굴레안에서 자신의 이익을 내세우는 동시에 권력집단과 목표들간의 내적 경쟁을 이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1936~37년 이후 노동계급이 그들의 개선된 시장 지위를 마음껏 활용하자, 계약 해지율과 이동성 뿐만 아니라 병가(病暇)와 근무 이탈이 급증했다. 당국은 행정조치와 처벌 위협을 통해 노동자들의 이동과 임금인상을 억제하고자 시도했으나, 개별적인 경우를 제외하곤 효과가 없었다. 군수업체의 노동력 수요가 지속적으로 증가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조가 모두 제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은 '내 손으로 하는 임금정책'을 발전시켰다. 대표자 없이 홀로남게 된 노동자들은 개별적으로, 혹은 소(小)집단별로 체제와 기업의 질곡을 이용하며 자신의 물질적 처지를 개선시키려 했다. 노동력 부족으로 말미암아 해고 협박이 통하지 않자 병가와 결근, 태업 따위가 속출했다. 나치는 객관적으로 나치즘의 목표, 즉 군수를 손상시키는 그런 노동자들의 일상적 거부를 격렬하게 성토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들의 개별적 동기가 무엇이었는지 추출해내기란 대단히 어렵다. 노동자들은 당국에 자신들의 태도가 무엇보다 노동 강도의 강화로 말미암은 피로 때문이라 강조했는데, 단순히 변명에 불과한 것인지 단언할 수 없다. 물론, '개인적 임금정책'은 대부분 정치적 의도가 개입되지 않은 시장법칙을 이용한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것조차 노동자들이 나치의 '민족공동체' 슬로건에 공감했다기보단, 자신의 계급 상황을 현실적 관점에서 꿰뚫고 있었다는걸 의미한다. 과거, 노조에서 활동했던 구세대 노동자들의 경우 단순히 휴식시간이나 초과 수당이 문제시되었을 때도, 노조활동에 대한 기억이 일정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기업의 신임위원회와 노동전선에 참여한 나치측 인사들도 노동자의 비판적 기대감에서 비롯된 압력을 전적으로 무시할 수 없었다.

노동자들 사이에서 위신을 유지하기 위해, 혹은 나치당 조직간의 지속적인 경쟁에서 무기로 삼기 위해 노동자들의 요구는 때때로 수용되었던 것이다. 객관적으로 나치의 전쟁 군수를 약화시켰다는 '개인적 임금정책', 그러한 개인별 작전이 노동자들의 태도가 장기적으론 나치의 의도에 상응하는 방향으로 변화했음을 보여준 것은 아닌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다시말해, 노동자들에게 '고용주와 노동자는 한 배를 탄 것'이고, '경기가 좋아야 노동자도 좋다는 느낌이 형성된 것'은 아닌지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노조가 금지당함으로써 취하게 된 개인별 돌파는 단순히 과도기적 긴급구호의 수단으로서만 인식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소위 개인별 임금정책의 성공, 즉 노동자가 군수경기 와중에 벌였던 개별적 미시 전투의 성공이 노조적 연대행위의 기초를 약화시켰을 수도 있다.

구세대 노동자들은 1933년 이전의 경험에 기대어 나치 노동정책의 도전과 유혹을 회의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젊은 세대는 그러한 균형추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물론, 그들 역시도 나치의 '목가적'이고 '조화로운' 민족공동체에 대해선 거리를 두거나 거부했다. 우선 정치적으로 탈권화되고, 감시당하고 있을 뿐 아니라 민족노동질서법에 따라 기업 지도자의 명령권에 예속된 그들의 일상 경험이 나치의 구호와 어긋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젊은 세대들에겐 구세대 노동자의 가치와 사회 규범을 낯설게만든 새로운 삶의 영역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특히, 개인별 최고 생산성과 보다 나은 일자리로 전직함으로써 최대 소득을 올릴 가능성의 경우에 그러했다. 노동에 대한 순전히 '도구적인 태도'는 노동운동을 지지했던 과거의 수많은 숙련 노동자들에겐 드문 현상이다.

구세대 노동자들에겐 자신의 능력과 노동의 질(質)에 대한 자부심이 동료들과의 공동체적 감정 및 태도와 결합되어 있었다. 반면, 젊은 노동자들은 나치와 기업가들에 의해 의식적으로 추진된 재교육 및 승진 프로그램에도 어느정도 호응했다. 그들은 예컨대 연례적인 '제국 직업경연대회'를 집단적 노동자의 사회적 운명으로부터 개별적으로나마 벗어날 수 있는 기회로 인식했다. 운명 탈출과 신분 상승의 희망은 나치 조직이 공급하던 여가생활과도 연관된다. 많은 노동자들이 최초의 장거리 여행을 전전(戰前) 나치의 '좋은 시절'에 경험했다. 경우에 따라 히틀러 청소년단이 그런 탈출의 결집점이 되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나치가 노동계급에 직접적[히틀러 청소년단의 예]으로, 혹은 간접적[군수경기의 예]으로 제공해준 '일체화' 가능성은 젊은 세대들한테도 제한적이긴 했지만 말이다.

노동자들의 전통적인 사회문화적 환경은 나치 집권초기 구세대 노동자 사이에선 비교적 온존했으며, 당국의 간섭 하한선 밑에 머물수 있는 곳에선 나치의 요구를 불신했다. 그러나, 사적인 영역으로의 후퇴와 개별적인 신분 상승 가능성의 경험이 장기적으론 노동자들을 '탈(脫)연대화'하는 방향으로 작용하진 않았을까? 나치의 '공동체' 강조가 거부당한건 분명하나, 군수경기 호황속에서 노동자들이 경험했던 자발적 미시 투쟁하에 일단 '경제만 잘 돌아가면 노동자한테도 좋다'는 교훈을 배웠던게 아닐까? 많은 정황들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나치는 독일 노동운동의 전통적 연대구조를 파괴한 동시에 개인주의적이고, 실리적이며, 회의적인 새로운 노동자 유형이 발전하는 길을 닦았다고 볼 수 있다. 그같은 유형은 1950년대 사회학자들이 강조하게 될 유형이기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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