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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 진(秦)의 6국겸병전쟁 연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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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왕정(秦王政, 시황제)이 즉위했을 무렵, 진나라의 영역은 파촉(巴蜀, 사천성)과 한중(漢中)을 병합하고, 완(宛)을 넘어 영(郢, 호북성 강릉현)을 점유하여 남군(南郡)을 설치하였다. 북쪽으로는 상군(上郡), 하동(河東), 태원(太原), 상당(上黨) 등의 군(郡)을 점령하였으며, 동쪽으로는 형양(滎陽, 하남성 형양현)에까지 이르러 주(周)나라를 멸망시키고, 삼천군(三川郡, 낙양시 동북쪽)을 설치했다.

여불위(呂不偉)가 재상으로서 10만호(戶)를 봉토(封土)로 받았고, 문신후(文信侯)라 했으며, 널리 빈객과 유사(遊士)들을 초빙하여 장래에 천하를 도모하고자 했다. 진왕은 아직 나이가 어린데다, 즉위한 직후라 국정을 여불위 이하 대신들에게 맡겨서 처리하도록 했다. 몽오(蒙驁), 왕흘(王齕), 표공(麃公) 등이 장군이 되어 6국에 대한 정벌전을 수시로 감행하였고, 이미 천하의 절반을 평정했던 것이다.


시황제 원년(BC 246) : 진양(晋陽, 산서성 태원시)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몽오(蒙驁)가 이를 평정하였다.

시황제 2년(BC 245) : 진장(秦將) 표공(麃公)이 위나라의 권성(卷城, 하남성 원양현 북쪽)을 공격하여 위군(魏軍) 3만여명의 목을 베었다.

시황제 3년(BC 244) : 몽오가 한(韓)나라의 13개 성을 점령하였고, 다시 위나라로 진격하여 창(暢, 지명을 알 수 없음)과 유궤(有詭, 지명을 알 수 없음)를 공략하였다.

장군 왕흘(王齕)이 죽었다.

시황제 4년(BC 243) : 몽오가 위나라의 창(暢)과 유궤(有詭)를 함락시키고, 군사를 거두었다.

이 해에 위나라 공자(公子) 신릉군(信陵君)이 죽었다.

시황제 5년(BC 242) : 몽오가 위나라를 공격하여 산조(酸棗, 하남성 연진현), 연(燕, 하남성 연진현 동북쪽) 허(虛, 하남성 연진현 동남쪽), 장평(長平, 하남성 서화현 동북쪽), 옹구(雍丘, 하남성 기현), 산양성(山陽城, 하남성 초작시 동남쪽)을 모두 함락시키고, 20개 성을 빼앗아 처음으로 동군(東郡)을 설치했다.

진나라의 공벌(攻伐)이 계속되자, 제후들이 매우 걱정하였다.

동군의 설치로 진나라 영토는 제(齊)나라와 직접 대면해 초(楚)나라를 압박하는 한편, 삼진(三晋)의 영토마저 분할시켜 신정(新鄭)과 대량(大梁)을 포위함으로서 한위(韓魏)는 멸망이 가속화된다.

시황제 6년(BC 241) : 춘신군(春申君)의 주재로 초(楚), 조(趙), 위(魏), 한(韓), 연(燕)나라 5국이 전국역사상 최후의 합종을 결성하고, 진나라를 공격했다. 연합군은 수릉(壽陵, 섬서성 임동현 동북쪽)을 점령했으나, 진군(秦軍)이 반격하여 초군(楚軍)을 격파시켰으며, 나머지 군사들을 쫒아내버렸다.

초나라가 진나라의 위협을 피해 수춘(壽春, 안휘성 수현)으로 천도하였다.

진나라가 위(衛)나라의 조가(朝歌, 하남성 기현)를 빼앗고, 부용국(附庸國)으로 삼아 그 군주를 야왕(野王, 하남성 비양현)에 이주시켰다.

시황제 7년(BC 240) : 장군 몽오가 위나라를 공격하던 도중에 죽었다.
 
위나라의 급(汲, 하남성 급현)을 점령하였다.

시황제 8년(BC 239) : 진왕 정(秦王政)의 아우 장안군(長安君)이 조나라를 공격하다가  반란을 일으켜 둔류(屯留, 산서성 둔류현)에서 죽임당했으며, 수하 군관들도 모두 참살되었다.   

시황제 9년(BC 238) : 진장(秦將) 양단화(楊端和)가 위나라를 공격하여 원(垣, 산서성 원곡현 서쪽)과 포양(蒲陽, 하남성 장원현), 연읍(衍邑, 하남성 정주시 북쪽)을 점령하였다.

진왕 정(秦王政)이 성인식을 거행하였다. 장신후(長信候) 노애(嫪毐)의 반란이 일어나 그 일족과 가신이 주멸(誅滅)당했고, 4천여 가구가 촉(蜀)으로 추방당하는 등 대규모적인 숙청이 벌어졌다.

이 해에 초나라 권신(權臣) 춘신군이 암살당함으로서, 구심점을 상실한 6국은 더욱 약화되었다.   

시황제 10년(BC 237) : 상국(相國) 여불위(呂不偉)가 노애반란에 연좌되어 파면당하고, 초(楚)의 망명자인 이사(李斯)가 진나라 정계에서 득세하기 시작했다. 진왕이 친정(親政)을 개시하였다.  

산동6국 가운데 최약소국인 한(韓)나라를 우선적으로 공멸(攻滅)하며, 조위(趙魏) 양국에 대한 토벌전을 전개 ・강화시켜 삼진을 병합한다는 구상에 따라  통일논의가 급진전, 본격화된다.

시황제 11년(BC 236) : 장군 왕전(王翦)과 환의(桓齮), 양단화가 조나라의 업(鄴, 하북성 임장현 서남쪽)을 공격하여 9개 성을 점령하였다. 왕전이 연여(閼與, 산서성 화순현 서북쪽)와 요양(橑陽, 산서성 좌권현)을 공격하고, 환의가 업과 안양(安陽, 하남성 안양시)을 빼앗았다.

시황제 12년(BC 235) : 문신후(文信侯) 여불위가 진왕의 압박을 받고 죽었다.
 
조나라 토벌전을 일시 중지하고, 위(魏)와 연합해 초나라를 공격하였다.

시황제 13년(BC 234) : 삼진에 대한 총공세로 전환, 조나라 토벌전을 대대적으로 개시하였다.

장군 환의가 이끄는 진군(秦軍)이 평양(平陽, 하북성 임장현 서남쪽)을 공격하여 조장(趙將) 호첩(扈輒)을 죽이고, 조군(趙軍) 10만명의 목을 베었다. 진왕이 전시감독차 하남(河南)에 행차하였다.

진나라의 거듭된 공략으로 수도 한단성(邯鄲城)이 위태로와지자, 조왕(趙王)은 대(代, 하북성 울현) 지방의 수비대장 이목(李牧)을 소환시켜 방어에 임하도록 하였다.

시황제 14년(BC 233) : 진장(秦將) 환의가 평양과 무성(武城, 산동성 무성현 서북쪽)을 점령하였으나, 비성(肥城, 하북성 진현 서쪽)에서 이목의 요격을 받아 대패, 환의는 연나라로 도주했다.

한비(韓非)가 진나라에 건너왔으나, 이사의 계략으로 죽임당했다.

한왕(韓王)이 진나라의 번신(蕃臣)임을 자청, 완전한 속국으로 전락하였다.                         

시황제 15년(BC 232) : 진나라가 대군(大軍)을 일으켜 두 갈래로 나누어 조나라에 진격, 1군은 업성(鄴城)에 도착하고, 2군은 태원(太原)을 거쳐 낭맹(狼孟, 산서성 양곡현 서북쪽)을 빼앗았으며, 더 나아가 파오(番吾, 하북성 평산현 동쪽)를 공격하였다. 조장(趙將) 이목이 진군을 맞아 모두 격퇴시켰다. 

이무렵, 조나라의 국력은 크게 소모되어 수십만 병사를 잃고, 한단을 지킬 따름이었다.

시황제 16년(BC 231) : 한왕이 남양(南陽, 하남성 서남쪽 일대)을 진나라에 바치자, 내사(內史) 등(騰)으로 하여금 그 영토를 접수, 한나라를 완전히 병합하기 위한 사전준비작업을 마쳤다.

위나라가 땅을 바쳤다.

이 해부터 3년간 천하에 기근이 들고, 조나라에선 대지진이 일어났다.

시황제 17년(BC 230) : '멸한국(滅韓國)' 진나라의 내사 등이 한(韓)의 수도 신정성(新鄭城, 하남성 신정시)으로 진격하여 국왕을 사로잡고, 영천군(穎川郡)을 설치하였다. 이로서, 한나라는 주(周) 왕실로부터 공인받은지 11대(代) 173년만에 멸망, 6국 가운데 최초로 병탄된 제후국이 되었다.

시황제 18년(BC 229) : 왕전(王翦)과 양단화, 강외(姜廆)가 이끄는 진군이 조나라를 대대적으로 공격, 상지(上地, 섬서성 수덕현)와 하내(河內)에서 각각 출발하였으며, 정경(井陘, 하북성 정경현)을 공격하고, 한단(邯鄲)을 포위했다. 조나라는 이목과 사마상(司馬尙)으로 하여금 진나라를 막게 하였다.

진나라의 이간계로 이목은 처형당하고, 사마상이 면직되었다.

시황제 19년(BC 228) : '멸조국(滅趙國)' 진장(秦將) 왕전과 강외가 동양(東陽, 하북성 태행산 동쪽 일대)을 빼앗고, 한단성을 마침내 함락시켜 조왕(趙王)을 사로잡아 군(郡)을 설치하였다. 이로서, 조나라는 주(周) 왕실로부터 공인받은지 10대(代) 175년만에 멸망했다.

조나라 공자 가(嘉)가 일족 수백명을 거느리고 대(代)로 달아나, 망명정권을 세웠다.

진왕(秦王)이 한단을 방문하였고, 태원(太原)과 상군(上郡)을 거쳐 돌아왔다.

시황제 20년(BC 227) : 형가(荊軻)의 진왕에 대한 암살미수사건 발생. 진나라는 배후주동자인 연(燕)나라 태자를 응징한다는 명분하에 왕전과 신승(辛勝)으로 하여금 토벌케 하였다. 진군(秦軍)이 역수(易水)에서 연군(燕軍)을 대파하고, 그 도읍인 계(薊, 북경시)로 진격하였다.

시황제 21년(BC 226) : 장군 왕분(王賁)이 초나라를 공격하여 10여개 성을 빼앗았다.

연나라 토벌전에 군사를 증원하여 계성(薊城)을 함락시키고, 진장(秦將) 이신(李信)이 그 태자의 수급을 얻었다. 연왕(燕王)은 요동(遼東, 요녕성 요양시)으로 달아나 망명정권을 세웠다.

왕전(王翦)이 병을 핑계로 관직을 사임, 귀향하였다.

신정(新鄭)에서 한나라의 잔당세력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평정되었다.

시황제 22년(BC 225) : '멸위국(滅魏國)' 진장(秦將) 왕분(王賁)이 위나라의 수도 대량(大梁, 하남성 개봉시)을 포위하여 3개월만에 수공(水攻)으로 함락시키고, 국왕을 사로잡아 군현을 설치했다. 이로서, 위나라는 주(周) 왕실로부터 공인받은지 8대(代) 178년만에 멸망했다.

위나라의 멸망으로 삼진(三晋)을 사실상 모두 평정했으니, 춘추(春秋)시대 패권국가였던 당진국(唐晋國)의 구(舊) 판도가 진(秦)의 영역에 편입된 것이다.

진장(秦將) 몽염(蒙恬)과 이신(李信)이 20여만 대군을 이끌고 초나라의 평여(平與, 하남성 평여현 북쪽)와 침(寢, 안휘성 임천현)을 각각 공격하여 초군을 격파했다. 성보(城父, 안휘성 박현 동남쪽)에서 초장(楚將) 항연(項燕)이 반격하여 이신의 군대를 대파, 진나라 도위(都尉) 7명을 죽였다.

시황제 23년(BC 224) : 진왕이 왕전(王翦)을 다시 기용하고, 60만 대군을 동원해 초나라에 대한 총공세를 시도하여 일거에 병합하고자 하였다. 진군이 평여와 진(陳, 하남성 회양현)을 함락시키고, 기(蘄, 안휘성 숙주시 동남쪽)에서 초군을 대파하여 항연을 죽였으며, 수춘성으로 쇄도해 들어갔다.

진왕(秦王)이 전시감독차 진(陳)까지 행차하고, 군(郡)을 설치하였다.

시황제 24년(BC 223) : '멸초국(滅楚國)' 왕전의 군대가 수춘에 입성하고, 초왕(楚王)을 사로잡았으며, 강동(江東, 강소성)의 잔당세력들을 소탕하면서 오월(吳越)지방으로 진격했다. 이로서, 초나라는 웅역(熊繹)이 주성왕(周成王)으로부터 제후로 봉해진지 42대(代) 근 800년만에 멸망한 것이다.

강남의 평정으로 통일전쟁은 사실상 마무리되었다.

시황제 25년(BC 222) : '멸연국(滅燕國)' 진장(秦將) 왕분(王賁)이 요동으로 진격해 연왕(燕王)을 사로잡아 그 나라를 완전히 병합하고, 군현을 설치하였다. 이로서, 연나라는 소공(召公)이 주무왕(周武王)으로부터 제후로 봉해진지 43대(代)만에 멸망했다. 왕분이 대(代)에 웅거한 조나라의 잔당을 소탕하였다.

왕전이 오월지방을 평정하고, 회계군(會稽郡)을 설치하였다.

천하에 대연회를 베풀었다.

시황제 26년(BC 221) : '멸제국(滅齊國)' 연나라를 평정한 왕분이 여세를 몰아 산동(山東)으로 진격, 임치(臨淄, 산동성 임치시)에 입성하여 제왕(齊王)을 사로잡았다. 이로서, 제나라는 전화(田和)가 찬탈해 주(周) 왕실로부터 제후로 공인받은지 8대(代) 165년만에 사직이 끊기고, 완전히 멸망하였다.

6국이 모두 평정되고, 천하가 진나라에 예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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