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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이종(宋理宗)의 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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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경헌태자(景獻太子)가 죽고 태자위(位)가 공석이 되자, 황상(皇上, 宋寧宗)은 태조(太祖)의 10세손 중에서 15세 이상인 소년들을 궁중에서 교육시키도록 하였으니... 황자(皇子)를 세워 이름을 횡(竑)이라 개명하고, 기국공(祁國公)으로 진봉(進封)하였다. 가정(嘉定)15년(1222) 5월 정사일(10일), 기국공을 제국공(濟國公)으로 진봉하고, 기왕(沂王)의 적자 귀성(貴誠)을 소주(邵州)방어사로 삼았다.

경원(慶元, 절강성 경원현)사람 여천석(餘天錫)은 사미원(史彌遠, 宰相) 집안의 가정교사였는데,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성격으로 사미원이 중히 여겼다. 황태자 횡이 수시로 사미원을 비방했기에, 미원은 장차 폐출(廢出)을 도모하면서  비밀리에 황태자를 대신할 종실(宗室) 아이를 구하고자 했다. 어느해 가을, 여천석이 시험을 보러 고향에 내려가게 되자, 사미원은 은밀히 말했다.

"기왕(沂王)께서 후사가 없으셨으니, 종실 자손중에서 현명한 아이를 찾아 데리고 오게나."

여천석이 배를 타고 월주성(越州城, 절강성 소흥시) 서문(西門)에 도착했을 무렵, 갑자기 큰 비를 만나는 바람에  보장(保長) 전가(全家)네 집으로 피하였다. 보장은 그가 재상집의 식객이란 사실을 알고선 정성껏 대접하였다. 두 아이가 시중을 들고 있었는데, 여천석이 묻자, 보장이 말하였다.

"저 아이들은 모두 외조카입니다. 형의 이름은 조여거(趙與莒), 나머지 동생은 조여예(趙與芮)라고 하는데, 글쎄 점쟁이가 말하길, 크게 귀하게 될 상(像)이라나요."

여천석은 임안(臨安, 항주)으로 돌아와 사미원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사미원이 명령을 내려 두 아이들을 데려오게 하자, 보장은 기뻐하며 논밭을 팔아 옷과 모자를 갖추고, 많은 친구들에게 부탁하여 임안까지 바래다주도록 했다. 사미원이 조여거의 관상을 보고선 크게 만족하였고, 소문이 밖으로 새어나가는 것을 우려해 일단은 돌려 보냈다. 1년 후, 사미원은 여천석에게  다시금 부탁했다.

"두 아이를 다시 데려올 순 없겠는가?"

여천석이 아이를 불러오고자 했으나, 보장(保長)은 사양하며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사미원은 여천석을 직접 보내어 보장에게 넌지시 타이르도록 하였다.

"큰 아이는 장래에 가장 귀하게 되실 것인즉, 의당 아버지 집안으로 돌려보내야 하오."

마침내 임안으로 보내주도록 하였다. 조횡(趙竑)이 황태자로 책봉되면서 여거(與莒)를 병의랑(秉義郞)에 제수하였고, 귀성(貴誠)이란 이름을 하사하였으니, 그의 나이 17세였다. 조여거는 연의왕(燕懿王) 조덕소(趙德昭, 宋太祖의 장남)의 후손(정확히는 8대손) 희로(希瓐)의 아들로 모친은 전씨(全氏)이며, 소흥(紹興) 산골짜기에서 집을 두고 살아왔다가 기왕(沂王)을 계승하게된 것이다.


                                                                전권재상 사미원(史彌遠, 1164~1233)



조횡은  거문고를 좋아하였는데, 사미원은 거문고를 잘 켜는 미인(美人)을 사들여 조횡에게 바치는 한편, 그녀의 집안을 두터히 후대해주어 조횡을 감시토록 만들었다. 미인은 글을 읽을 줄 알았으며, 민첩하고 총명했던 탓에 황태자는 그녀를 몹시나 총애하였다. 당시, 조정에서는 양후(楊后, 宋寧宗의 황후)가 국정(國政)을 전단하였고, 사미원도 오랫동안 권세를 부리고 있었다. 

사미원이 집권하면서 재상 이하로 시종과 태간(台諫), 번곤(藩閫, 절도사)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부하들로 채웠으며, 권세가 대단히 막강해지자, 조횡이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황후와 사미원의 행적을 적으면서 '사미원은 마땅히 8천리(里)나 떨어진 곳으로 유배보내야 한다'고 중얼거렸다.
 
또한, 황궁 벽장에 걸린 지도를 주사위로 가리키며  말했다.

"언젠가, 사미원이를 저곳으로 보내버려야 겠다."

미인(美人)은 사미원에게 그대로 알렸다. 조횡은 사미원을 빗대어 '신은(新恩)'이라 불렀는데, 장차 신주(新州, 광동성 신흥현)와 은주(恩州, 광동성 양춘현)로 귀양보내리란 뜻에서였다. 사미원이 칠석날, 기이한 장난감을 선물하는 기회로 속마음을 떠보자, 황태자는 술김에 그것들을 죄다 망가뜨렸다. 사미원은 크게 두려워하여 그날 밤으로 폐출을 모의하게 되었으나, 눈치채지 못하였다.

이 무렵, 진덕수(眞德秀)는 궁중(宮中)교수를 겸임하고 있었는데, 조횡에게 간(諫)하였다.

"황자께서 모후(母后, 양황후)에게 공경하고, 대신(大臣, 사미원)을 존경한다면 천명(天命)은 스스로에게 돌아옵니다. 그렇지 않으면, 깊은 우려가 있을 것입니다."

듣지 않았다.

하루는  사미원이 정자사(淨慈寺, 西湖 기슭의 佛寺)에서 부친 사호(史浩, 孝宗代 재상)의 제사를 지내며, 국자학록 정청지(鄭清之)와 함께 혜일각(慧日閣)에 올라 사람들을 물리치고 말했다.

"황자는 그 책임을 감당할 수가 없소. 듣자하니, 기왕의 후계자 귀성(貴誠)이 현명하시다는데 궁(宮)에서 가르칠 선생을 물색중인지라, 그대가 맡아주었으면 하오. 성사되면, 나의 자리는 자네한테 돌아가겠지만, 만에하나 발설되는 즉시 우리들 모두가 족멸(族滅)당하리라는 걸 명심하시게!"

정청지가 말하였다.

"물론입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로써 정청지는 위혜헌왕부(魏惠憲王府)의 교수를 겸임하게 되었으니, 정청지는 조귀성에게 매일마다 글을 가르치고, 고종(高宗) 때의 어서(御書)를 강의했으며, 연습시켰다. 정청지는 사미원을 알현할 때마다 귀성이 지은 시문(詩文)을 보여주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사미원도 정청지에게 조귀성의 안부에 대해 질문하곤 했다. 한번은 다음과 같이 물었다.

"황질(皇侄)께서 이미 현명하고 성숙해지셨다는데, 어떠한가?"

정청지가 말하였다.

"그분의 현명함이야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만, 한마디로 결코 평범하지는 않으시죠."

사미원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침내 황태자의 폐출을 결심했다. 날마다 황상(皇上, 宋寧宗)에게 조횡이 저지른 과실과 죄악들을 논하면서 태자를 폐하고, 귀성을 세우길 바랐으나, 황상은 멍한 채 무슨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진덕수가 사퇴하며 조횡에게 재차 간언했지만, 듣지 않았다.


                                                                         송이종(宋理宗) 조윤(趙昀)                                       



17년(1224) 8월 병술일(21일), 황상의 병세가 위중해졌다. 사미원은 청지를 기왕부(沂王府)로 보내 옹립할 뜻이 있음을 귀성에게 알렸는데, 대답을 주지 않았다. 정청지가 말하였다.

"승상께서 저로 하여금 오랫동안 당신과 교류케 하셨습니다. 저는 당신의 복심(腹心, 심복)입니다. 대답을 이렇게 안 주신다면, 제가 승상께 뭐라 회답하겠습니까?!"

귀성이 비로소 손을 모아 대답했다.

"소흥(紹興)에 노모(老母)가 계시옵니다."

사미원은 귀성의 비범함에 탄복했다. 임진일(27일), 황상이 위독해지자 사미원은 조서(詔書)를 위조하여 조귀성을 태자로 세우고, 이름을 윤(昀)으로 고치고 무태군(武泰軍)절도사에 제수했으며, 성국공(成國公)으로 봉(封)하였다. 윤8월 정유일(3일), 황상이 임안궁(臨安宮) 복녕전(福寧殿)에서 붕어하였다. 사미원이 황후의 조카인 양곡(楊谷), 양석(楊石)을 보내 폐립을 알렸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황태자 횡은 선제(先帝)께서 세우셨거늘, 어찌 멋대로 바꾼단 말인가?"

양곡 등이 밤사이 7차례나 오갔지만, 허락치 않았다. 양곡이 꿇어앉아 울면서 말하였다.

"내외군민(內外軍民)의 마음이 모두 돌아섰습니다. 태자를 새로 세우지 않는다면 화(禍)가 닥칠 것이고, 그랬다간 우리 양씨(楊氏) 일족은 무사하지 못하고 맙니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가, 물었다.

"그 사람[趙昀, 조귀성]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사미원은 즉시 사람을 보내 조윤을 입궁(入宮)토록 하면서 말하였다.

"지금 선포되어야할 사람은 기정혜왕부(沂靖惠王府)의 황자이지, 만세항(萬歲港)의 황자가 아니오. 만약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대들은 모두 참형에 처해질 것이오!"

조횡은  입궁을 기다렸으나, 오래도록 소식이 없었다. 참다못해 담장 사이로 바깥을 바라보는데, 일단의 무리들이 지나치고, 다시 한 사람을 둘러싸고 달려갔다. 때마침, 날이 저물어 분간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점차 의심이 들었다. 조윤이 입궁하자, 황후는 그의 등을 어루어만지며 말하였다.

"이제부터는 네가 황자이니라."

사미원이 조윤을 데리고 영구(靈柩)앞으로 가서 애도를 마치자, 조횡에게 입궁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니, 조횡이 궁문(宮門)을 통과하는데 금위군에 의해 시종들은 제지당했다. 사미원이 애도를 마치고, 조횡을 장막밖으로 내보내어 도지휘사 하진(夏震)에게 감시를 맡겼다. 마침내 백관(百官)들을 불러모아 영종의 유제(遺制)를 받들면서 조횡도 함께하도록 하였다. 조횡이 놀라서 물었다.

"오늘의 일에 어째서 내가 이 자리에 있어야 한단 말인가?!"

하진이 말하였다.

"유제가 아직 선포되지 않았으니, 여기에 계셔야 합니다. 선포된 후에야 즉위하실 수 있습니다."

전상(殿上)의 촛불속에서 누군가 어좌(御座)에 앉은 것이 보였다. 조윤[宋理宗]이 즉위했다.

백관들이 축하했으나, 조횡만은 절하지 않자, 하진이 머리를 잡아당겨 절을 시켰다. 유조(遺詔)를 가장해 조횡을 개부의동삼사에 제수하고, 제양군왕(濟陽郡王)으로 봉(封)하였으며... 황후를 높여 황태후라 하고, 수렴청정(垂簾聽政)을 실시하였다. 효종(孝宗)의 고사(故事)에 의거해 궁중에서의 3년상(喪)을 규정하고, 제왕(濟王)에 봉해진 조횡(趙竑)을 호주(湖州, 절강성 오흥현)로 옮기도록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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