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년전쟁이 마침내 막을 내렸다. 4월 30일 오전 11시 30분, 사이공의 대통령궁(宮)에 베트콩 깃발이 게양됨으로서 유혈의 인도차이나 전쟁사(戰爭史)가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2차대전 직후부터 시작된 인도차이나 전쟁은 '반(反)식민 ・민족해방전쟁'이란 명분을 앞세운 항불(抗佛)투쟁에서 비롯되었고, 50년대 이후 냉전의 진행과 더불어 미국의 개입을 초래, 준(準)세계대전급의 규모로 발전하였다.
개입 10여년이 지났건만, 끝내 미국은 사이공에서 헬기로 도망쳐나오고 말았다. 단순히 '건국(建國) 이래 최초의 패전'이란 오명을 넘어, 서방세계 지도국이자 민주의 총본산으로 자처해왔던 이미지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것이다. 인도차이나 전쟁의 결과는 미국은 물론, 우방국들에게도 깊은 충격과 교훈을 남긴 한편, 향후의 통일과제를 책임지게될 월맹측의 사정도 녹록치는 못하다.
우선, 통치면에서 남북 베트남은 지난 사반세기간 전혀 상이한 체제속에서 각각 성장해왔다. 월맹이 처음부터 호치민(胡志明)의 리더십하에 단결된 공산체제였음에 반해, 미국의 후원을 받는 월남은 반공(反共)자유체제로 일관되었다. 베트콩이 자생적이든, 하노이의 사주에 의한 것이든 관계없이 남부에서 성장한 민족주의파의 색채가 강하고, 월맹은 고전적 혁명노선을 계승, 여기에 투철하다.

따라서, 사이공에 입성한 베트콩으로선 이미 발표된 포고문에 명시되었듯이 '외세의존적 미국식 생활'을 청산하는데 커다란 역점을 둔 것도 당장은 통일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에 따라, 사회체제 재편에 의거한 장기적인 통일 절차의 일환인 셈이다. 하노이의 혁명전략과 남부사회의 정치 ・경제적 현실간 괴리감으로 당분간은 남북에 별도의 2개 정부가 존재할 것이란 관측마저 나오고 있다.
남북은 지도체제 내부의 인맥면에서도 차이가 크다. 월맹의 현(現) 수뇌부는 대체로 메마른 중부지대의 중하류층 출신으로 골수 공산주의자들인 반면, 베트콩 수뇌부는 생활이 안정된 서구식 교육을 받은 인텔리들 다수가 포함되었다. 민족주의 ・공산주의 이념엔 남북 지도층이 동일노선을 취하면서도, 전통적으로 내려온 남북간 지역감정 등 미묘한 갈등이 부각될 가능성 역시 점쳐지는 상황이다.
향후, 월맹의 행동궤도는 독립 ・자주 ・평화의 대원칙을 내걸고, 그 최종적인 목표 달성을 위해 사회체제를 재편하면서 통일을 위한 단계적 노력에 기울일 듯 하다. 대내통치면에선 체제상 차이점을 극복하기 위해 유연성을 발휘하여 내부 혼란을 피하는 한편, 유리한 선전효과를 도모할 것인 바, 이러한 움직임은 구(舊)사이공 정부의 공무원 및 경찰의 행정 복귀를 호소한데서도 나타났다.

대외적으론 비동맹 정책을 답습 ・강조했는데, 미국의 갑작스런 패퇴에 따른 진공상태에 대비, 중소(中蘇) 외교각축을 교묘히 헤쳐 전(全) 인도차이나의 '독자적 정치영역화'를 모색할 수도 있다. 소위 '인도차이나 연방설'도 독자적 정치영역화의 발로인 셈이다. 다시 말해서, 베트남 공산화는 국제정치에 새로운 변수로 등장, 이해 당사국들 입장에선 만만치 않은 위협으로 다가왔다고 보면 되겠다.
미국은 미국대로 '포스트 베트남전시대'를 맞이하여 새로운 아시아 ・태평양 및 동북아에 거점 방위선을 구체화시키고 있다. 이것은 인도차이나를 중심으로 소련 ・중공과의 세력관계 전개에 대비한 나름의 전략 포석으로 풀이된다. '공산(共産) 인도차이나'를 둘러싼 강대국 ・이해 당사국간 역(力)관계 발전이 베트남 통일과 장래 전망에 심대한 영향력으로 작용하리라 전망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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