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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향수병 환자의 보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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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락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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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제 탱크를 앞세운 월맹군과 베트콩은 사이공 시가지에 무혈입성, 대통령 관저인 독립궁에 임시혁명정부 깃발을 꽂았다. 두옹 반 민 대통령은 평소 버릇인 조용한 미소로 감정과 피곤을 감춘 채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날, 민 대통령은 독립궁에서 베트콩 임시혁명정부 대표와 회동해 악수를 교환했으며, 이어서 사이공 방송은 대통령이 베트콩에 정권을 이양했음을 발표하였다.

공산군의 사이공 입성은 4월 30일 오전 11시 30분경에 시작되었다. 8명의 베트콩 병사들이 탑승한 선도 지프차 1대가 미국 대사관 거리에 진입하였고, 6대의 탱크들이 뒤따랐다. 각 건물마다 항복을 표시하는 백기(白期)와 베트콩 깃발이 게양되어 있었다. 30분 후, 녹색 군복차림의 월맹군 선도 탱크부대가 나타나 독립궁으로 향하는 콩리가(街)에 들어서자 전방을 향해 106mm 포(砲)를 발사했다.
 
선두 탱크가 독립궁 정문 앞에서 멈추자 비무장한 남베트남 정부군 병사 하나가 뛰쳐나와 정문을 열려했으나, 이를 무시한 탱크는 철문(鐵門)  및 보초탑을 부수며 구내로 진입, 후발 탱크들이 뒤따랐다. 궁전을 장악한 베트콩 병사들은 게양대에서 남베트남 국기를 끌어내린 대신, 정중앙에 금빛별이 박힌 적청색의 베트콩 임시혁명정부 깃발을 게양, 예포를 쏘아올리며 승리를 자축했다.




독립궁을 접수한 월맹군과 베트콩은 곧바로 대통령인 민 장군을 연행했는데, 사이공 시내 자택(自宅)에 감금 중인 것으로 추정된다. 수도 사수(死守)작전에 투입되었던 남베트남 병사들은 대통령의 항복방송이 있은 직후 방위선에서 빠져나와 무기를 공산군에 인계, 시민들 사이로 자취를 감추었으며, 거리엔 패잔병들이 버린 군복이 즐비했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무덤덤히 그들의 정복자를 맞이하였다.

점령의 첫 단계인 현재, 공산군 병사들은 탱크나 트럭위에서 미소를 짓고 손을 흔들면서도 군기를 유지하는 등  승리의 순간에조차 오랜 장기전에서 보여온 규율을 과시하는 듯 했다. '평화 해방일'이라 불려진 이날, 사이공에서 가장 슬픈 사람은 출국에 실패한 친미(親美) 베트남인들일 것이다. 이들은 사이공 정부 고관들과 더불어 명백한 보복대상이고, 절망적인 운명을 기다릴 뿐이다.

황혼이 내려덮이자, 남베트남군 잔당들이 항전하는 산발적 총성도 거의 멎어들었다. 바로 전날, 미국인 철수와 동시에 약탈 ・혼란이 난무했던 사이공 시가는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대체로 평온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베트콩은 30일 오후 6시부터 다음날 오전 6시까지의 통금(通禁) 실시를 발표, 공무원들에게 직장 복귀를 호소했다. 사이공의 법률은 '정복자의 총'이란 것이 분명해졌다.




함락에 앞서 사이공시(市) 북단의 동물원 부근 및 서남단에서 산발적 저항이 있었으나, 신속히 제압되어 공산군은 순조롭게 시가지 전역을 장악했던 것이다. 사이공 방송은 현행 남베트남 헌법의 폐지, 남베트남 시민의 출국 금지, 통금령, 정부군 및 경찰의 무기 인도, 제반 공공업무 기능의 계속 등 일련의 포고문을 발표하여 민심을 수습 중이다. 전국토를 황폐화시킨 30년전쟁의 종막이었다.

같은 시각, 하노이는 축제 무드에 돌입해 노동절에 맞추어 호치민(胡志明)의 초상화와 월맹기로 도심이 장식되었고, 수백개의 폭죽이 터져 울렸다. 몇몇 관리들은 AFP 지국에 전화를 걸어 사이공측의 항복방송 전문(全文)을 얻을 수 없느냐며 문의하기까지 했다. 월맹정부는 오는 5월 15일에 '전승(戰勝)기념대회'를 개최, 톤둑탕(孫德勝) 대통령[국가주석]이 사이공을 방문할 예정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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