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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향수병 환자의 보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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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 잿더미로 만들어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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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타그라하 데이(Satyagraha day), 델리와 암리차르에서의 군경(軍警) 발포, 그리고 수많은 민중의 살해, 암리차르와 알라하바드에서의 폭력행위, 펀자브에서의 장시간 공포와 몸서리칠 정도로 무시무시한 계엄령 등의 사건을 우리는 볼 수 있었다. 펀자브는 고립되어 인도의 다른 지역과 격리되었다. 이 지옥으로부터 도망쳐나온 어떤 사람은 너무나 공포에 떤 나머지, 사태가 어떻게 전개되어가고 있는지 명백히 설명조차 못할 정도였다. 외부의 우리들로선 대책이 없었고, 그저 고립무원 상태속에서 뉴스에 의존한 채, 애만 태웠을 따름이었다.

우리 동지들 가운데 몇몇은 직접 펀자브의 사태가 발생한 장소로 들어가 계엄령에 항거하려는 시도도 했지만, 결국 무산되었다. 그러는 동안, 피해자 구제와 조사를 목적으로 위원회가 국민회의당 명의하에 설립을 보았다. 계엄령이 해제되어 외부 인사도 출입이 가능해지자, 국민회의당 요인과 기타 인사들이 펀자브로 흘러들어가 구제와 조사의 손길을 내밀었다. 나중에, 조사 보고서에 나타난 잘리안왈라 바그(Jallianwala Bagh)에 대한 증거와 사람들이 배를 땅바닥에 대고, 기어갈 수밖에 없었던 소름끼치는 골목길의 사건은 대부분 우리가 기록한 것이다.

E. J. 톰슨(Thompson)씨였다고 생각되는데 그 사람의 생각인즉슨, 다이어(Dyer) 장군은 공원밖으로 탈출할 출구가 한 개만 아닌 다른 곳에도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그처럼 오랫동안 사격을 계속했을 것이라 한다. 한 걸음 양보하여 설령 오해였다 할지라도, 다이어의 책임이 경감된다는 것은 아니다. 그해도 저물어 갈 무렵, 나는 암리차르로부터 야간열차로 델리를 향해 떠났다. 객실은 거의 만원이었지만, 앞좌석이 비어있는 침대칸 한 량(輛)을 제외하곤 전부 승객들이 잠자코 있었다. 여하튼, 나는 그 침대칸의 비어있는 앞좌석에서 잤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같은 칸의 승객들이 모두 육군 장교들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큰소리로 지껄였기 때문에 나는 가급적 엿듣지 않으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귓가에 들려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중에서 한 사람은 유별나게 도전적이며, 의기양양하게 떠들어대고 있었는데, 그가 바로 '잘리안왈라 바그의 영웅' 다이어 장군이었다. 그는 암리차르의 공훈담을 한창 떠벌리고 있었다. 자신의 자비심 아래 반역의 도시를 시체의 산봉우리로 만들려고 했다느니, '확 잿더미로 만들어버릴까 싶었지만, 좀 불쌍해서 봐줬다'며 서슴없이 말하는 것이었다.

그는 헌터(Hunter) 조사위원회에서 증언을 마치고, 라호르로부터 델리로 돌아가는 것이 분명했다. 그말을 듣고선, 다이어의 무자비한 모습과 그것을 지지하는 영국인들의 냉혈한적 모습에 접한 나는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몹시 부도덕하고, 비열한데다, '해로(Harrow)식 표현'대로라면 한마디로 최악이었다. 다이어는 델리역에서 화려한 핑크색 줄무늬의 파자마에 가운을 걸친 채 객차에서 내렸다. 나는 제국주의가 얼마나 야만적이며 부도덕한지, 또한 그것이 얼마나 영국 지배층의 양심을 잠식해버렸는지, 그때 절실히 깨달았다.

- by 자와할랄 네루(Jawaharlal Nehru)


                                                  '암리차르의 도살자' 레지날드 다이어(Reginald Dyer) 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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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카쓰키 총리의 악수(惡手), 총사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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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제1면이 만주사변의 보도로 가득찬 나날은 쇼와(昭和) 6년 가을 내내 계속되었다. 관동군은 동삼성(東三省) 깊숙이까지 밀고들어가, 점령지에 친일 독립정권 비슷한 것을 조직하려는 공작에 착수한 상태였다. 장학량 자신은 북평(北平, 북경)에 체재하며 금주(錦州, 요녕성)에 동북변방군 공서(公署)를 설치, 사령관 대리에 장작상(張作相)을 임명하여 금주를 기지로 삼고, 북만주로의 무력 투입, 일본 점령지에서의 게릴라전과 한간(漢奸, 친일 부역자)들에 대한 테러전을 전개했다. 여기에 관동군은 10월 18일, 금주를 폭격하는 것으로 대응한다.

금주 폭격에 국제연맹은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10월 24일, 연맹 이사회는 기한부 철병 권고안을 결의하면서 대일(對日) 압박의 수위를 높였다. 관동군도 그점을 의식했기 때문인지 일단 금주 공략을 중단하고 신민둔(新民屯)으로 후퇴하는 제스처를 취했으나, 다른 지역에선 점령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장학량군이 금주로 병력을 집결시키자, 관동군은 동경에 추가 파병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와카쓰키(若槻) 수상은 고민했다. 증병(增兵)하면, 국제여론은 장학량측에 이롭게 할 것이며, 거부하면 육군의 반발외에 10월사건 같은 불상사가 재발할지도 모른다.

결국 수상은 후자쪽을 더욱 두려워한 나머지, 사변 발발 때와 마찬가지로 다시금 관동군의 요구에 굴복하고 말았다. 제20사단 1개여단의 증원과 제8사단 4개여단의 출동으로 일본군은 금주 점령의 태세를 갖추었다. 시데하라(幣原) 외상은 외교에 있어서는 가토(加藤), 하마구치, 와카쓰키 역대 수상의 절대적 신임을 받았지만, 내정(內政)과 특히 정당정치 방면엔 전혀 문외한이었다. 답변의 실언이나, 하마구치의 등원(登院) 문제 등 실점을 거듭해왔기 때문에, 와카쓰키는 국회대책에 있어서 아다치 겐조(安達謙藏) 내상에게 전폭적으로 의지하였다.

1931년 10월 28일, 관동군이 북만주의 치치하얼(齊齊哈爾)을 포위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와카쓰키는 총리관저로 아다치 내상을 호출했다. '육군은 도대체 어디까지 전투를 확대할 셈인지...'라고 투덜대면서 운을 뗐다.


"육군을 억제하여 사변에 종지부를 찍지 않으면, 우리 당(黨, 민정당)의 협조외교란 기본방침은 붕괴되버리고 만다. 이런 시기에, 군(軍)을 깔아뭉개서 복종시키는 강력한 정권... 나는 그것을 생각하고 있네."

                                                  내각총리대신 와카쓰키 레이지로(若槻禮次郞, 1866~1949)


하마구치의 부상으로 돌연 정권을 인수한 제2차 와카쓰키 내각은 출범 당초부터 한계가 지적된 바다. 군부의 전횡 뿐만 아니라, 행정개혁 논쟁과 관리 감봉으로 기반이 위태로운 처지에 몰렸으며, 10월초 지방선거를 고비로 넘기기 어려울 것이란 관측마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양대정당이 거국내각을 성사시킨다면, 국민 총의를 대표하게 되어 정부의 권위도 높아진다. 군부로서도 내각을 함부로 무시할 수 없을테고, 나아가 정국 안정에 기여한다는 구상하에 와카쓰키는 정당 사정에 통달한 내상에게 자신의 연립내각안(案)을 타진해 본 것이다.

민첩한 아다치는 수상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즉석에서 이해했다.


安達 : 말하자면, 총리께서는 민정 ・정우 양대정당의 거국연립정권. 그것을 생각하고 계시는군요?

若槻 : 의회 총의의 대표자이자, 국민 총의의 대표자이기도 하지. 군부도 복종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제멋대로의 독선, 독단은 못하겠지. 다만, 아다치군. 과연, 정우회가 거국연립 구상에 응해줄련지... 그게 문제야.

安達 : 그렇게 타진해보라... 총리께선 그런 말씀이시죠?

若槻 : 정직하게 말해서 그것을 자네한테 부탁하고 싶었던 게야.

安達 : 알겠습니다. 허나, 분명하게 해두지 않으면 안 될 문제가 있습니다. '거국일치의 연립내각'이라고는 하지만, 그 수반은 당신, 즉 민정당이 아니면 안된다. 그런 생각이신지? 그렇게 된다면, 이것은 현재 (민정당 일색의) 내각을 개조하여, 정우회에 입각(入閣)의 협력을 요구하는 형식이 됩니다.

若槻 : .................

安達 : 아니면, 수반은 정우회 이누카이(犬養)가 되어도 좋겠는가... 이 경우엔, 우리 민정당 내각이 일단 총사직해서 사이온지(西園寺)공(公)의 주청(奏請), 천황의 대명(大命, 조각 명령)을 기다리게 됩니다. 설령 대명이 이누카이에게 내려진다 해도, 아래의 우리 당은 입각 협력한다는 형식이죠. 총리께서는 그 어느쪽을 생각하지는지, 확실히 제가 알아두지 않으면 저로서도 정우회와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若槻 : 우리 당의 사정, 조건에서 말하자면 민정당 수반으로... 지금 내각을 개조해서 정우회의 입각을 바라고 싶네. 하지만, 그래가지고선 정우회가 승낙치 않을지도 몰라. 그럴 경우엔 이누카이군이 수반이고, 우리 당에서 참가하는 형식이라도 좋아. 어찌됐든, 군부를 통제할 수 있는 강력한 정당내각을 만드는 것이 지금의 내 염원이야.


그날 밤 심야부터, 아다치는 극비리에 행동을 개시했다. 그가 교섭 상대로 선택한 인물은 정우회 간사장인 구하라 후사노스케(久原房之助). 동경 메구로에 소재한 구하라의 사저를 찾아간 아다치는 와카쓰키 수상의 거국연립정권 구상을 전달했고, 구하라는 흔쾌히 동의하였다. 물론, 양자간엔 속셈의 차이가 있었다. 민정당측에선 거국연립으로 강력한 정권을 만들어 군부의 폭주를 제어한다는 의도인 반면, 정우회는 2년에 걸친 야당 생활을 청산해 정권부터 탈환해보자는 생각이었다. 피차의 의도를 짐작하면서도, 두 사람은 더이상 의제로 삼지 않았다.


                                                  정우회 간사장 구하라 후사노스케(久原房之助, 1869~1965)


久原 : 그래서... 그 거국연립은 와카쓰키 민정당 수반 그대로 내각을 개조하여 우리 정우회를 참여시키려는 것인가? 아니면, 와카쓰키 내각은 총사직한다. 사이온지 원로의 주청을 기다려서 대명을 받는 인물이 수반으로... 이누카이 수반이 될 지도 모르겠으나, 그래도 상관없이 연립해 거국일치내각을 만들자는 것인지...?

安達 : 어느쪽이던 상관없어. 그것은 앞으로의 구체적인 타협, 정국의 진전 여하에 달렸지. 지금의 단계로는 수반은 민정, 정우 어느쪽이 되었던 거국일치 연립내각을 만든다. 그것만 우선 원칙으로 해서 협상하고 싶네.


다음날, 구하라는 요쓰야로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 정우회 총재를 찾아가 아다치와의 협상 내역을 보고하였다. 설명이라기보단, 제안을 받아들인 것과 다름없는 진언이었다. 이누카이의 대답은 담백했다.


"그것도 좋겠어. 아다치와 의논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게나."


나중에 구하라는 이누카이 총재도 양해했다며 아무에게나 떠벌리고 다녔지만, 실제 이누카이의 본심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애시당초, 이누카이는 민정당과의 연립내각 구상에 관심이 없었을 뿐더러, 그럴 의사도 없었다. 양대정당에 의거한 의회정치는 어디까지나 '헌정(憲政)의 상도(常道)', 양당간 정권교체로 돌아가야만 한다. 더욱이, 거국일치네 뭐네 하고선 대의명분을 내세워봤자, 연립은 강력하긴 커녕 내부에 약점을 지닐 수밖에 없다. 이누카이 개인으로선 '와이한 내각(隈板內閣)' 당시의 씁쓸한 경험탓에 연립정권 구상을 탐탁치 않게 여겨온 터였다.

와이한 내각이란, 1898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주선으로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의 진보당과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의 자유당이 합동, 헌정당을 결성하여 조각한 정당내각을 가리킨다. 형식상으론 1당내각이긴 했지만, 본질은 구(舊)진보 ・자유당 계열의 연립으로 오쿠마가 총리대신에, 이타가키는 내상에 임했는데, 오쿠마는 자신의 외상 겸임을 고집하면서, 자유당 계열에서 추천한 호시 도루(星亭)의 기용을 거부하는 등 금새 인선 문제로 갈등이 심화되었다. 이윽고, 오자키(尾崎) 문부대신이 '공화(共和)연설'로 경질된 뒤, 양자는 격돌했다.

이타가키가 제의한 호시의 외상 기용을 일축해버린 오쿠마는 후임 문상에도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켜 이누카이를 앉혔다. 일이 이렇게되자, 격분한 호시는 헌정당 간부회에서 분당(分黨)을 경고하고 나섰으며, 이타가키를 비롯한 자유당계 각료 3명이 사표를 제출해 내각은 4개월만에 무너졌다. 그 분쟁의 핵심에 섰던 이누카이는 연립의 약점을 숙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구하라에게 모호한 대답을 건네준 것은 연립 구상에 발목이 잡힌 민정당이 내분을 일으킬 공산도 높다, 그때까진 구하라가 하고싶은대로 휘젓고 다니도록 내버려 둔다는 계산에서였다.

요점은 원로 사이온지의 의향이었다. 거국연립내각에 어떠한 반응을 드러낼까? 좋다고 할 경우, 수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할까? 아다치와 구하라는 사이온지의 비서 하라다 구마오(原田能雄)와 연락을 취했는데, '노공(老公)께 전해드린 바, 훌륭한 생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란 대답만 받았다. '이누카이가 양해했고, 사이온지도 이의없다'는 아다치의 보고를 받은 와카쓰키는 그것만으로도 일이 잘 풀렸다는 듯이 기뻐했다. 11월 7일, 관저에서 정례각의를 마친후 와카쓰키는 시데하라 외상과 이노우에 준노스케(井上準之助) 대장상에게 흉금을 털어놓았다.

모처럼 들뜬 분위기의 수상에게 시데하라는 창백한 표정으로 딱 잘라 말했다.


幣原 : 연립 거국정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총리,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 아닙니까? 정우회는 구하라나, 모리(森, 정우회 총무)나, 우리 당과는 정반대로 군부와 제휴를 획책하고 있습니다. 만주사변의 완수, 나아가선 만주 점령을 주장하고 있어요. 그 정우회와의 연립이 성사될 것 같다고 보십니까?

若槻 : 이누카이는 구하라, 모리와 사상을 같이하진 않아. 특히, 만몽(滿蒙)정책은 오히려 우리와 가까워. 연립하게 되면 구하라나 모리도 우리 당의 정책에 전면적인 반대는 못하게 돼. 어느 정도는 타협적으로 나오겠지.

幣原 : 그 타협이라는 것이 간사한 짓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총리? 우리 당은 즉시 정전, 관동군의 협정지역까지의 철수와 만주에서의 중국 주권의 존중, 이것이 기본방침입니다. 어쩌면, 구하라나 모리도 정전에 타협할지 모릅니다. 허나, 군을 협정지역까지 철수시키는 일엔 양해하지 않을 겁니다. 적어도, 이미 점령한 지역은 기정사실화하겠죠. 혹, 만주 독립 따위를 주장할지도 모릅니다. 그같은 주장에 우리 당은 타협할 수 있습니까?

若槻 : .................

幣原 : 타협하면 어찌되겠습니까? 그것으로 중국은 평화협정 교섭에 불응할 겁니다. 국제연맹, 영미(英美)로부터의 비난도 필지입니다. 결국, 우리 당 연래의 대중(對中) 화평책은 물론, 국제협조도, 모두 헛일이 되고 맙니다!

井上 : 그것은 경제, 재정정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내각은 금(金)수출 해금을 단행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해금 계속이냐, 재금지냐, 이것을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십니까? 만약, 정우회쪽에 무릎을 꿇어 재금지로 돌아선다면 민정당의 체면이 서질 않습니다. 그 결과, 경제가 어찌될지 나로서도 자신이 없어요.


시데하라와 이노우에의 격렬한 반대에 와카쓰키는 크게 놀라며 당황해했다. '거국연립'이란 중대사를 구상하면서 경솔하게도 미처, 정책 문제까지는 숙고해보지 않은 것이다. 이치상으로 따져볼 때, 연립이 성사되면 각내(閣內)의 주요 관직, 예컨대 외상이나 내상, 대장상 가운데 하나는 반드시 정우회에 넘겨주어야만 한다. 외교와 내정(內政), 경제정책의 어느 한쪽에 대해선 정우회 노선을 채택할 수밖에 없으며, 정권의 기반을 강화시키기는 커녕, 자칫 각내 불협화음으로 더더욱 위기를 맞을 위험도 수반되는 꼴이다. 국정을 운영할 맛이 나질 않는다.

다음날 오전, 와카쓰키는 아다치 내상을 다시 호출하여 연립내각안의 백지화를 귀띔했다.


"전날의 거국연립 말인데... 시데하라, 이노우에군이 반대야. 미안하네만, 없던 일로 해주게나."


                                             거국연립을 주도한 내무대신 아다치 겐조(安達謙藏, 1864~1948)
                                             저널리스트 출신 당인파로 을미사변에도 관여했던 인물이다.        


수상의 말을 들은 아다치는 고개만 끄덕인 채, 잠자코 있었다. 수상이 변심했다고는 하더라도, 사태는 벌써 깊숙이 진행되었다. 거국연립으로 반드시 관철시켜야 하며, 자신과 구하라는 그럴 능력을 갖추었다고 자부하던 참이었다. 민정당내 하마구치 계열 관료파에 대항해 중견 간부 30여명을 포함한 당인파(黨人派)의 수장인 아다치 입장에서야, 와카쓰키의 권위까지 무시할 실력과 배경을 갖춘 만큼, 연립내각 수반은 자신이 되어야한다는 의욕도 없지않았다. 여하튼, 그길로 아다치는 천황을 수행해 규슈에서 개최된 육군대연습을 참관하러 떠났다.

11월 10일, 아다치는 시모노세키에서 차중(車中) 담화를 통해 '현재 시국은 연립내각을 필요로 한다'고 언급, 민정 ・정우 양당의 연립안은 만천하에 공개되었다. 발칵 뒤집힌 각내는 온통 연립정권설에 대한 논의로 가득찼고, 사정을 모르는 나머지 각료들로부터 수상앞으로 질문이 쇄도해왔다. 시데하라와 이노우에가 거칠게 책망하자, 와카쓰키는 아다치의 독단이라고 둘러댔지만, 사태의 전개에 쩔쩔매며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21일 초저녁, 규슈로부터 귀경한 아다치가 관저를 찾아오자, 수상은 평소 온후한 성격과는 달리, 드물게 역정을 내어 내상을 꾸짖었다.


若槻 : 지난번의 거국연립은 취소한다고... 자네한테 말했을 텐데? 나한테 실례일 뿐만 아니라, 내각의 정무진행에 막대한 지장을 끼쳤고, 당내(黨內)도 동요하고 있어. 다시는 이 일에 대해 재론하지 않겠네!

安達 : 그렇지만, 와카쓰키군!!


아다치가 와카쓰키에게 '총리'라 부르지 않고, 거침없이 언사를 이어가자 분위기는 험악해졌다.


安達 : 당신은 처음에 거국연립을 말했소. 인간은 그 초지(初志)를 굽혀선 안 돼! 남들의 의견, 반대 등으로 잡다한 것들이 뒤섞여 모두 잡념이 되고 말았어. 불순한 이유를 배제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초지를 관철하시오!


그렇게 소리를 빽 지르고선 아다치는 나가버렸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수상의 고함소리를 무시한 채... 그날 밤늦게 10시경, 아다치는 사저로 기자단을 소집하여 거국연립내각 발족에 진력하겠다는 단독 성명을 발표했다. 이것으로 아다치와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고, 각내 반란에 직면한 와카쓰키는 식물 총리의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한편, 정우회측은 도코나미(床次) 비주류파와 단독정권론을 견지한 모리 가쿠(森恪) 총무를 제외하곤, 구하라파를 위시로 연립내각의 기세가 고조됐으며, 육군과도 접촉하는 등 발빠르게 행동에 들어갔다.

12월 2일, 아다치파의 도미다 코지로(富田幸次郎) 상무고문이 수상을 예방해 두루마기 하나를 건넸다.


富田 : 저와 정우회의 구하라 간사장이 타협한 거국연립 계획의 요지입니다. 읽어보시지요.

若槻 : 자네한테 부탁한 적이 없었고, 읽을 필요도 없어. 거국연립에 관한 이야기를 한 번 아다치에게 말한 것만은 사실이야. 그러나, 그만둔다고 분명히 밝혔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이것은 자네가 관여할 바가 아니야!


                                                    민정당 상무고문 도미타 코지로(富田幸次郎, 1872~1938)
                                                    히로타~하야시 내각 당시 중의원의장으로 재직했다.


12월 9일 오후 6시반, 구하라 정우회 간사장과 도미타 민정당 상무고문은 남주암(南洲庵)에서 회동, 3개 사항으로 구성된 각서를 체결 ・교환하고, 공동성명의 발표를 보았다. 주제는 말할 것도 없이 연립정권 발족, 정책노선 강령은 신(新)정권 수립후에 점진적으로 수정한다는 골자였다. 이에 대해, 와카쓰키 내각은 아다치파의 독단행위로 단정해 연립 가능성을 극구 부인하며 선을 긋는 동시에, 12월 10일 오후 5시 임시각의를 소집했다. 아다치파를 제외한 전체 각료가 반대한다는 의지를 공식적으로 밝혀 아다치, 구하라의 책동을 끝장내려는 심산이었다.

막상 각의가 소집되었음에도, 가장 중요한 아다치 내상은 사저로 칩거해 두문불출, 출석 명령에 불응했다. 전화로는 해결되지 않으리라 직감하고, 수상은 츠기타(次田) 내무차관과 가와사키(川崎) 내각서기관장을 따로 보내 내상의 각의 출석을 독촉했으나, 번번히 거절당했다. 초조해진 와카쓰키는 다나카 류조(田中三) 문상으로 하여금 다시 한 번 아다치에게 출석을 요구하는 한편, 만약 끝까지 불응할 경우 사직서를 받아오라고 지시했다. 수상의 엄명을 지니고 찾아온 다나카가 졸라대자, 아다치는 일언지하 정색하며 거절했다. 또한, 이런 말도 덧붙였다.


"내각이 총사퇴한다면 사표를 내지!"


허탕만 치고 총리관저로 돌아온 다나카를 보고선, 와카쓰키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연약한 수상은 또다시 패배를 당한 것이다. 와카쓰키 레이지로(若槻禮次郞)란 인물은 좋게 말하자면 사심(私心)이 없었고, 나쁘게 말하면 의욕이 부족했다. '관계(官界)의 꽃'이라 불리우는 대장성 엘리트 코스 정석대로 출세가도를 밟아온 그였지만, 자기 스스로 총리-총재가 되겠다는 생각은 품어보지 않았다. 그런 자신이 최정상에 등극할 수 있었던 것은 가토와 하마구치의 횡사(橫死) 덕분이었으며, 여기까지 온 것도 순전히 행운에 기댄 결과라는 자조감마저 들었다.

이번 내각을 조직하면서 총리대신, 민정당 총재직도 모자라 런던회의 논공행상으로 남작(男爵) 작위까지 한꺼번에 제수받았으니, 대단한 행운이자, 과분한 영광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더군다나, 메이지(明治) 헌법하에서 모든 각료는 개별적으로 천황이 임명한다는 형식이고, 총리대신은 국무대신간 조정 ・주선가 역할에 지나지 않아 각료의 임명이나 파면에 관한 재량도 제한이 가해질 수밖에 없었다. 각료를 교체할 경우, 당사자가 거부 의사를 나타내면 총리대신은 각내(閣內) 불일치로 천황을 보필하는 임무에 충실치 못하게 되어 사직으로 몰리고 만다.

수상의 식언으로 연립내각 구상이 파국을 맞았고, 정권 기반이 무너진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다.


"각내가 통일되지 못한다면, 총사퇴밖엔 도리가 없군..."


수상의 떨리는 한마디였다. 1931년 12월 11일 새벽 4시, 와카쓰키 내각은 긴급각의를 거쳐 총사직을 결정했다. 원로 사이온지의 주청으로 이누카이 수반의 정우회 단독내각이 출범한 것은 그로부터 이틀후였다.


                              정권을 인계한 직후, 총리관저에서 회동한 와카쓰키와 이누카이(犬養) 신임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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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잡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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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이 불편하고, 여건을 갖추기 어려우며, 관련 정보가 불충분한데다, 중화사상으로 충만한 전근대 중국에 있어서 황제의 해외친정은 지극히 드문 사례였다. 그같은 제약에도 아랑곳없이, 몸소 원정군을 통솔하여 본국 영토로부터 벗어난 모험을 강행한 군주는 손에 꼽을 정도인데, 생각나는대로 정리해보면 대략 이러하다.


수양제(隋煬帝) : 고구려 (612)
당태종(唐太宗) : 고구려 (645)
요성종(遼聖宗) : 고려 (1010)
명성조(明成祖) : 몽고 타타르, 오이라트부 (1410, 1414, 1422, 1423, 1424) 
청태종(淸太宗) : 조선 (1636)
청성조(淸聖祖) : 몽고 준가르부 (1690, 1696)


기준은 만리장성 바깥의 새외(塞外)로 나가거나, 새외에서 벌어진 친정 케이스에만 해당되며, 세조 쿠빌라이 이하 태정제, 명종 등 원조(元朝) 대칸들은 내란전쟁에 해당되므로, 이 역시 제외시킨 것이다. 5호시대 모용연(慕容燕)과 탁발위(拓拔魏)는 정통왕조가 아니고, 특히 모용황의 경우 황제를 칭하기 이전인지라 역시 생략함.

한인(漢人) 천자로서 막북 사막을 경유해 몽고 초원에 친히 원정했던 인물로 명성조 영락제가 유일하다는 사실은 분명하고, 수양제와 당태종의 고구려 원정 결과야 부연할 필요조차 없는데... 이렇게 따지자니, 생전에 한반도 땅을 직접 밟아본 황제라면 요성종과 청태종 홍타이지 단 둘 뿐이었다는 재밌는 결론이 도출되네.

혹여, 오류가 있으면 지적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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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침공작전의 당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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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 전, 베트남 문제와 관련한 보고를 드리면서 본인은 향후 1년간 15만 병력을 철수하겠다는 결심을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때, 저는 라오스, 캄보디아, 남베트남에서 적들의 활동이 증가하고 있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같은 결정을 내렸다고 밝혔습니다. 그때, 저는 경고하기를 이들 지역에서 적의 활동이 증가하여 베트남에 주둔중인 미군 장병들의 생명이 위태롭다고 생각되는 즉시, 주저없이 강력하고, 효율적인 대응을 하겠다고 언명했습니다. 이러한 경고에 아랑곳없이 월맹은 이들 지역, 특히 캄보디아에서 군사적 침공 행위를 증가시켰습니다.

본인은 국가안보기구(NSC), 벙커(Bunker) 대사, 에이브럼스(Abrams) 장군 및 기타 고문관들과 충분한 협의를 거쳐 지난 열흘간 월맹군의 활동은 분명 우리 장병들의 생명에 위협을 주고 있으며, 15만 병력을 철수시킨 이후 베트남에 잔류할 우리 장병들에겐 보다 큰 위험이 따를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장병들을 보호하고, 계속될 철군으로 '베트남화(Vietnamization)' 계획을 보장하고자, 상응할 조치를 취할 시간이 왔다고 결심했습니다. 오늘 저녁, 본인은 적들의 활동과 그에 상응한 본인의 명령조치 내용, 그리고 저의 결심 내용을 상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구 7백만에 불과한 소국(小國) 캄보디아는 우연히도, 북베트남 정권 역시 서명 당사자로 명시되어 있는 1954년도 제네바 협정 이래, 중립국가로 잔존해 왔습니다. 그 이후로, 미국의 정책은 캄보디아 국민의 중립성을 조심스럽게 존중해 왔습니다. 우리는 프놈펜에 15명 이하 소수의 외교사절을 유지해왔는데, 작년(1969) 8월부턴 상주중입니다. 앞서 4년간인 65년도부터 69년도까지, 캄보디아엔 외교사절을 전혀 파견하지 않았으며, 지난 5년간 군사지원이나 경제지원도 일체 전무했습니다. 그런데도, 월맹은 캄보디아의 중립성을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지난 5년간, 지도상에서 보시듯이 월맹은 캄보디아와 남베트남이 서로 마주한 국경선에 면한 모든 군사적 성역들을 점령했습니다. 어떤 지역은 캄보디아 국경 내륙으로부터 20마일 가량 깊숙한 곳에 위치한 실정입니다. 이들 성역은 붉은 색으로 칠해져 있고, 지도에서 보듯이 국경선 양쪽에 모두 분산되어 있습니다. 이들 성역들은 남베트남 국내의 남베트남 및 미군 부대들을 치고, 달아나는 식의 전법을 구사하는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들 공산당 점령지 내에는 중요한 기지 본부와 훈련장, 군수시설, 무기 및 탄약공장, 활주로, 포로수용소 등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5년간, 미국과 남베트남 당국은 중립국 영토를 침범하는 것에 주의했기 때문에 이들 성역에 대한 작전을 전개하지 않았습니다. 4주전, 북베트남 공산당원들이 점령지 확장을 시작한 후로도 우리는 남베트남측에 인내를 요구했으며, 아군 지휘관들에겐 자제하도록 지시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이러한 정책과는 대조적으로, 지난 2주간 적들은 게릴라 활동을 빠르게 증가시켰고, 주력부대를 집결해 미군과 남베트남군에 대한 총공세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월맹은 지난 2주간 캄보디아의 주권과 중립성을 존중해야 할 구실을 모두 제거해버렸습니다.

수천명의 북베트남 군인들이 이들 점령지로부터 캄보디아로 침공하고 있습니다. 이 지도에서 보시다시피, 그들은 이들 성역을 이용하여 캄보디아 국내로 진입, 수도를 포위하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캄보디아는 우리 미국을 위시한 다른 나라에 지원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적들의 이같은 침략행위가 성공한다면, 캄보디아는 광대한 적군의 전초기지가 될 것이며, 600마일에 걸친 캄보디아-남베트남 국경지대에서 베트남을 공격할 수 있는 도약대 역할을 하게 됩니다. 또한, 보복당할 염려없이 전투를 수행하고, 은신처로서 대피소 역할마저 담당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여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세 가지입니다. 우선, 아무런 조치도 않고 방관한다. 이 경우, 결과야 불보듯 뻔합니다. '설마, 그렇게 되진 않겠지'라는 생각이라면 15만 장병들을 철수시킨 다음, 잔여 부대원의 생명은 심각한 위험에 노출됩니다. ...두 번째 방법은 캄보디아에 군사지원을 제공하는 겁니다. 4만의 캄보디아군이 자체 국방에 필요한 소화기와 기타 장비를 제공하는데 우리는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러나, 캄보디아가 중립성을 유지해가는데 있어서 원조는 제한되어 있으며, 캄보디아가 '전쟁 당사국'이 되어선 안됩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방법은 우리가 직접 해당지역에 개입하는 겁니다. 이 방법으로 북베트남군, 베트콩이 점령중인 주요 지역을 소탕하게 됩니다. 이들 점령지역이 바로, 남베트남에 있는 우리 미군 부대와 남베트남군 및 캄보디아를 공격하는 기지로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이들 점령지 가운데 어떤 곳은 우연히도, 볼티모어로부터 워싱턴 만큼이나 가깝게 사이공으로부터 멀지않은 거리에 위치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앵무새 부리(Parrot's Beak)'라고 불리우는 곳은 사이공에서 33마일 거리에 불과합니다. 이상의 세 가지 방법들 중에서 저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즉, 남베트남군과 긴밀한 협조하에 캄보디아-남베트남 국경에 소재한 적들의 주요 점령지역을 소탕하려는 공격을 이번주에 개시한다는 것입니다. 지상작전에 관하여 주요 책임은 남베트남군이 담당하게 됩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앵무새 부리'를 포함한 수군데 지역의 공격작전은 남베트남군 지휘하에 남베트남 지상부대가 전적으로 수행하며, 미군은 항공 및 군수지원만 제공하게 됩니다. 다만, 앵무새 부리의 바로 위쪽에선 미군과 남베트남군의 합동작전이 필요하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본인이 이같은 결단을 내리게 된 이유를 설명드리겠습니다.

국민 대다수, 아니 저의 말씀을 청취하고 계시는 여러분들 대부분이 베트남에서 철수하는데 찬성하실 겁니다. 오늘 저녁, 제가 내린 조치는 철군계획을 성공적으로 지속하는데 있어서 필수 불가결한 것입니다. 대다수 국민들은 이번 전쟁을 한없이 끌어가기보단, 한시바삐 종결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제가 오늘 저녁에 내린 조치는 바로, 이러한 목적에 부합되는 겁니다. 국민들은 베트남에서 용감한 장병들의 희생이 최소화되도록 희망하고 있습니다. 오늘밤, 미 ・남베트남 연합군 부대들은 캄보디아에서 베트남내 작전을 지휘하는 공산당 아지트를 공격합니다.

우리의 작전은 캄보디아를 침략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공략할 지역은 북베트남군이 완전히 점령, 장악한 곳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그 지역을 점령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적군 부대를 이들 성역에서 축출하고, 군수 보급품을 파괴하는 즉시 우리는 철수할 것입니다. 이러한 작전은 어느 나라의 안보상 이해를 추구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이번 작전을 대미(對美)관계를 해치는 구실로 악용한 나라는 스스로 행동에 응분의 대가를 져야 하며, 우리는 적절한 대응책을 마련할 것입니다. 오늘밤, 제가 취하는 조치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려는데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캄보디아로 전쟁을 확산시킬 목적으로 이같은 조치를 취하는 것이 아니며, 베트남에서의 전투를 종결하고, 우리나 원하는 정의로운 평화를 이룩하기 위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전장에서보단 협상 테이블을 통해 이번 전쟁을 끝내고자 모든 노력을 경주해왔으며, 앞으로도 꾸준히 노력할 겁니다. 이러한 노력의 기록들을 둘러볼까요? 우리는 북폭(北爆)을 중단했습니다. 공군작전도 20% 감축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장병들 25만명을 철수시키겠다고 공표했습니다. 하노이측이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면, 미군이 전원 철수하겠다고까지 제안했습니다.




남베트남의 장래는 북베트남도, 미국도 아닌 남베트남 국민 스스로가 결정해야 한다는 단 한가지 조건을 달아, 모든 문제를 협상하겠다고 제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적(敵)의 대답은 회담장에서 부리는 고집과 호전성, 라오스와 캄보디아에서의 대규모 군사적 침공, 베트남에서 미군 사상자를 증가시키기 위한 강화된 공격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더이상 참을 수 없었습니다. 미국인의 생명에 대한 이같은 위협들을 단순히, 구태의연한 외교적 항의만으로 대응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하면... 모든 지역에서 우리의 신뢰도가 저하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녁, 본인은 우리가 철군하는데 적들이 확전을 계속 시도한다면, 최고 통수권자로서 책임을 다하기 위해 우리 장병들의 안전에 필요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사실을 북베트남 지도자들에게 다시 한 번, 엄중히 경고하는 바입니다. 제가 공표한 조치로 북베트남 지도자들은 우리가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서 인내하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협상 테이블에서 유화적인 태도를 견지할 방침이지만, 절대로 굴욕을 당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후퇴하지 않습니다. 특히, 출몰하는 적에게 미국인이 수천명씩 전사당하도록 절대로 내버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평화협상을 통해 전쟁을 종결시킬 기회는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협상에 임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여태껏 많은 노력을 경주해 왔습니다만, 상당 부분 비밀로 남겨놓아야 합니다. 하노이가 신중하게 협상에 임할 경우, 저는 언제나 지금까지 제안했던 방법들을 모두 협상 테이블에 계속 내놓겠다는 점을 이 자리에서 말씀드립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의 이러한 화해적인 제스처에도 불구하고, 적들이 공격행위를 계속 증가시키거나 우리에게 굴욕적인 패배를 안기려 한다면, 우리도 그에 따라 적절하게 대응해나갈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 우리는 지금 국내외적으로 혼란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지난 5백년간 자유로운 문명속에서 이룩해놓은 위대한 제도가 무심한 파괴자들로부터 공격받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주요 대학들이 조직적으로 파괴당하고 있습니다. 전세계 모든 약소국가들도 국내외로부터 공격당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대한 나라가 가련하게 속수무책인 거인의 신세로 전락한다면, 독재와 무정부 세력들이 세계적으로 자유진영 국가들과 그 제도를 위협할 것입니다. 오늘 저녁, 우리가 당하는 시련은 '물리적 힘'이 아닌 우리의 의지력과 우리의 성품입니다.

미국인들이 한결같이 묻는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대한 나라가 정의로운 평화를 이룩하려는 모든 노력을 거부한 채, 우리 경고도 무시하고, 엄숙한 합의 사항도 짓밟으며, 비무장 상태의 중립국 국민을 침범하고, 우리의 전쟁 포로들을 인질로 이용하는 직접적인 도전에 대응할 만한 성품을 과연 지니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도전에 우리가 제때 대응하지 못한다면, 다른 모든 나라들은 압도적인 국력에도 불구하고, 정작 위기가 닥쳐왔을 경우 '미국도 별 것 아니구나'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대통령 선거전 당시, 본인은 우리 장병들을 베트남에서 귀국시키겠다는 공약을 했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저는 이번 번쟁을 끝내겠다고 약속드렸습니다. 이 약속을 저는 지킬 것입니다. 저는 정의로운 평화를 이룩하겠다고 약속드린 바 있습니다. 이 약속도 지킬 것입니다. 우리는 확전을 경계할 것입니다만, 결연히 이 전쟁을 끝내고야 말 것입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중대한 결심을 하고, 1차대전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루스벨트 대통령도 이 자리에서 2차대전에 참전해 승리로 이끄는 결단을 내렸었습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역시 이 자리에서 결심하고 한국전쟁을 종결시켰으며, 중동전쟁을 피하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케네디 대통령 또한, 이 자리에서 위대한 결단을 내려 쿠바와 서반구로부터 소련의 핵 미사일을 제거했던 겁니다. 제가 내린 결단에 대해 많은 논의를 거쳤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밝혀둬야 할 사실은 저의 결단이 방금전에 제가 열거했던 역대 대통령들의 결단 내용과 동일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당시엔, 우리 국민들이 널리 알려진 여론 지도자들로부터 나온 의구심이나, 패배감으로 영향받지는 않았었습니다.

제가 취한 조치에 대한 정치적인 결과를 저 자신만큼 숙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안일한 정치행로를 따르며, 이번 전쟁을 전임 행정부들의 잘못으로 돌리고, 미국의 패배를 뜻할지도 모르는 중대한 결과에도 상관없이 우리를 신뢰하는 1천 8백만 남베트남 국민을 포기하여 지난 54년, 북부 베트남에서 자유를 선택한 수십만 양민을 학살하고, 학대했던 월맹 지도자들의 잔혹한 수법에 맡겨둘 유혹마저 받습니다. 굴욕적인 평화는 보다 큰 전쟁으로 발전하고, 마침내 항복당한다는 우려를 알면서도, 당장 그 어떠한 희생이 따르더라도 평화를 이루고 싶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결단을 내리면서 모든 정치적인 고려 사항을 거부했습니다. 우리 조국을 위해, 그리고 베트남의 평화와 자유를 위해 싸우고 있는 용감스런 40만 우리 미군 장병들의 생명에 비한다면, 11월 중간선거에서 우리 당(黨, 공화당)이 승리하느냐, 못하느냐의 문제 따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가 단임(單任) 대통령으로 끝날 것이냐, 아니냐의 문제도 이같은 위기에서 우리가 실수를 저지름으로써, 전세계 역사상 어려운 시기에 미국이 자유세력을 지도할 가치가 없다는 것을 보여줄지도 모르는 상황에 비하면, 역시 아무것도 아닙니다.

미국이 2류국가로 전락하고, 자랑스러운 190년 역사상 최초의 패배를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중임(重任) 대통령이 되느니, 저는 차라리 단임 대통령으로 끝나더라도 옳다고 생각된 일을 하겠습니다. 지금, 국내에서는 우리가 전쟁에 개입했어야 했느냐, 전쟁을 어떻게 수행해야 하느냐 등에 관해서 솔직하고, 현격한 견해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인이 오늘 저녁에 말씀드린 결심은 우리 장병들의 생명이 걸려있기 때문에, 이러한 견해 차이의 문제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15만 장병들이 향후 12개월내로 귀국할 기회가 걸린 문제입니다.

1천 8백만 남베트남 국민과 7백만 캄보디아인의 미래가 달려있으며, 베트남과 태평양에서 정의로운 평화를 이룩할 기회가 걸려 있습니다. 백악관 연설은 보통 대통령을 지원해달라는 요청으로 끝내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그러한 관례를 벗어나렵니다. 지구의 반바퀴를 도는 먼 거리에서 영토를 다투는 것도 아니며, 명예를 위한 것도 아니며, 오로지 다음 세대와 그 자손들, 여러분의 자손들이 평화와 자유, 정의의 세계에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누리도록 싸우고 있는 우리 용감한 장병들을 지원해달라고 요청드리는 바입니다.


- 1970년 4월 30일, 캄보디아 침공을 발표하는 대국민 담화문에서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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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잡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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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초동 국립도서관에 다녀왔습니다. 아홉건의 논문과 고서 2권을 통째로 카피하는데 3만원은 족히 까먹은 듯.


2. 보스턴 테러 용의자 체포되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79&aid=0002463117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8&aid=0003033569

MIT에서 지랄하던 놈도 체포되었고, 폭발물까지 발견되었다는데 두 사건의 연관성 여부는 추후 소식을 기다려 봄.


3. 계절이 계절인지라, 벚꽃이 만개하여 절정에 이른 듯 하네요.

요즘에야 '벚꽃'하면 여의도를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과거엔 단연 창경원이었죠. 명정전 우측의 축사 우리들을 거쳐 언덕배기로 올라가면 장서각이 나타나고, 거기에서부터 춘당지 연못까지 벚나무들이 드리워졌던 그 길. 일제시대 유산이라고는 하지만서도, 기화요초와 희귀 짐승들 관람하고, '야(夜)사꾸라' 놀이로 설레임을 자극한 장소로밖에 기억하지 않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희 엄니께선 벚꽃과 수정궁, 큰 새장의 기억으로 인식하시더군요.

그러고보니... 창경궁 자체의 규모를 따져보더라도, 무슨 유원지가 입주할 만한 공간은 아닌데.;; 명정전 뒤켠인지 자세한 장소는 잘 모르겠다만, 무슨 '표본관 전시실' 따위에 놀이공원도 조성된 점으로 미루어 얼마나 복잡번화한 광경이었을까 상상가질 않습니다. 과천 대공원은 창경원에 비해 '고요한(?)' 축이라는 엄니 말씀. 원조가카 말년에 과천으로의 이전 계획이 수립되었다만, 일해거사가 그냥 놔뒀더라면 어땠을련지, 뇌내망상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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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GB 총수가 아닌 정치국 대표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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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부터 이듬해까지, KGB 의장으로 부임한 안드로포프는 크리미아 타타르인의 이주와 연관된 성가신 문제에 개입하게 되었다. KGB는 연방 전역의 소수민족들 가운데 반체제파에 대한 대처에도 책임을 지고 있었기 때문인데, KGB 산하 '공화국 담당국'의 임무로 규정되었던 것이다. 크리미아 타타르인은 2차대전 말기 스탈린의 이주정책에 의거해 우즈베키스탄으로 추방당했다가 60년대 와서야 간신히 민족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은 사람들을 일컫는다. 1967년 당시 50만명의 크리미아 타타르인이 있었고, 대부분 고향으로 돌아가길 갈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크렘린 당국의 방침은 그들에게 '크리미아를 제외한' 나머지 어느곳에서든지 거주를 허용한다는 것이었다. 1967년 9월 5일, 소비에트 최고회의는 크리미아 타타르인의 정치적 지위에 대한 포고령을 발표했다. 여기에 따르면, 과거에 크리미아에 거주하고 있었던 '타타르 민족의 인민'은 소련의 '영내 어디에서라도', '여권 규칙을 고려하면서' 거주할 수 있다고 기술되었지만, 이 여권 규칙이 확정된 후, 거기엔 '크리미아인이 크리미아에 거처를 정하는 일은 허용되지 않는다'고 명시되버렸다. 참다못한 타타르인들은 당(黨) 정치국 대표들과의 담판을 요구하였다.

그 담판은 성사되었다. 정치국에선 안드로포프를 대표로 하여 검사총장 루덴코와 내무장관 시첼로코프로 구성된 그룹을 파견해왔다. 바꿔 말하자면, 정보기관과 경찰에 의한 민족 탄압조직의 대표들인 셈이었다. 회의가 소집되고 안드로포프가 서두 발언을 개시했을 때, 크리미아 타타르인 대표 하나가 일어나서 물었다.


"안드로포프 동지! 당신이 여기에 계시는 것은 정치국의 대표로서입니까. 아니면 KGB 의장으로서입니까?"


안드로포프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정치국 대표나, KGB 의장이나 뭐가) 어떻게 다르다는 거지?"

"다릅니다. 만약, 당신이 KGB 의장으로서 이 자리에 계시는 거라면, 우리들은 퇴장하겠습니다."

"...내가 여기있는 것은 정치국의 지시에 의한 것이고, 정치국 명의로 되있는 것도 분명하오."


회의를 통틀어 논의는 위선에 찬 것이었다. 안드로포프와 시첼로코프는 여권 규칙은 실질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고 언명했다. 그같은 규칙이 어째서 대(大)러시아인(러시아 본토인)이나, 우크라이나인에겐 함께 적용되지 않느냐는 질문에 조리있고 책임있는 대답은 회피했다. 타타르인 대표들은 이번 담판에 관해 사람들에게 설명하기 위한 집회를 각 지구에서 열어도 괜찮은지, 여부를 물었다. 안드로포프는 흔쾌히 동의해주었다.


"물론이오. 필요한 집회장을 제공하고, 집회 수행을 방해하지 않도록 지시를 내리겠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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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하위키 미국-멕시코전쟁 항목을 둘러보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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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뭔소리?
 
미국-멕시코전쟁 당시 상원의 선전포고 결의문 채택은 동수는 커녕, 40 對 2표로 가결되었을텐데...?
1846년 5월 11일,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다'며 운운한 포크(Polk) 대통령의 전쟁메시지가 하원에 먼저 도착했음.
2시간만에 '멕시코와의 전쟁 상태'를 규정, 군병력 동원과 1천만$ 전비를 책정한 안건이 174 對 14표로 통과.
다음날, 하원에서 가결된 결의안이 상원으로 송부되어 심의에 들어간 끝에 압도적 다수의 찬성표를 얻은 것.

상원 정원수 56명 가운데 찬성 40표, 반대 2표, 의회에 출석했으나 기권한 3표, 나머지는 결석 11표.
투표 개황부터 살펴봐도, 엔하가 언급한 에드워드 해니건(인디애나, 민주)은 결석-기권했던 사실이 드러남.
투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차원에서 1846년 미국의 개전 에피소드와 결부시키려는 저 해석은 에러아님?
상원내 반전파가 일관성과 의견 조율이 부재했던 만큼, 당초의 견해로부터 대폭 물러섰다는 서술이 타당할 듯.

이하는 1846년 5월 12일, 미국 상원에서 가결된 멕시코전쟁 개전 결의안의 가부(可否) 내역.



* 찬성 : 40표

윌리엄 알렌(William Allen, 오하이오, 민주)          
윌리엄 S. 아처(William S. Archer, 버지니아, 휘그)
체스터 애슐리(Chester Ashley, 아칸소, 민주)
데이비드 R. 애치슨(David R. Atchison, 미주리, 민주)   
찰스 G. 애셔튼(Charles G. Atherton, 뉴햄프셔, 민주)           
아서 P. 바그비(Arthur P. Bagby, 앨라배마, 민주)
알렉산더 배로(Alexander Barrow, 루이지애나, 휘그)
토머스 H. 벤튼(Thomas H. Benton, 미주리, 민주)
시드니 브리스(Sidney Breese, 일리노이, 민주)
제시 D. 브라이트(Jesse D. Bright, 인디애나, 민주)
사이먼 캐머런(Simon Cameron, 펜실베이니아, 민주)
루이스 캐스(Lewis Cass, 미시간, 민주)
존 M. 클레이턴(John M. Clayton, 델라웨어, 휘그)
월터 T. 콜킷(Walter T. Colquitt, 조지아, 민주)
토머스 코윈(Thomas Corwin, 오하이오, 휘그)
존 J. 크리텐던(John J. Crittenden, 켄터키, 휘그)
윌리엄 L. 데이튼(William L. Dayton, 뉴저지, 휘그)
존 A. 딕스(John A. Dix, 뉴욕, 민주)
샘 휴스턴(Sam Houston, 텍사스, 민주)     
스펜서 재너긴(Spencer Jarnagin, 테네시, 휘그)
베닝 W. 제니스(Bening W. Jenness, 뉴햄프셔, 민주)
리버디 존슨(Reverdy Johnson, 메릴랜드, 휘그)              
헨리 존슨(Henry Johnson, 루이지애나, 휘그)
딕슨 H. 루이스(Dixon H. Lewis, 앨라배마, 민주)
조지 맥더피(George Mcduffie, 사우스캐롤라이나, 민주)
윌리 P. 맨검(Willie P. Mangum, 노스캐롤라이나, 휘그)
제임스 T. 모어헤드(James T. Morehead, 켄터키, 휘그)
존 M. 닐스(Johm M. Niles, 코네티컷, 민주)
아이작 S. 페니베이커(Isaac S. Pennybaker, 버지니아, 민주)
토머스 J. 러스크(Thomas J. Rusk, 텍사스, 민주)
제임스 셈플(James Semple, 일리노이, 민주)
앰브로즈 H. 시비어(Ambrose H. Sevier, 아칸소, 민주)
제임스 F. 사이먼스(James F. Simmons, 로드아일랜드, 휘그)
제시 스페이츠(Jesse Speight, 미시시피, 민주)
다니엘 스터전(Daniel Sturgeon, 펜실베이니아, 민주)
홉킨스 L. 터니(Hopkins L. Turney, 테네시, 민주)
윌리엄 업햄(William Upham, 버몬트, 휘그)
제임스 웨스트코트(James Westcott, 플로리다, 민주)      
윌리엄 우드브릿지(William Woodbridge, 미시간, 휘그)          
데이비드 L. 율리(David L. Yulee, 플로리다, 민주)


* 반대 : 2표

토머스 클레이턴(Thomas Clayton, 델라웨어, 휘그)
존 데이비스(John Davis, 매사추세츠, 휘그)


* 출석-기권 : 3표

존 M. 베리엔(John M. Berrien, 조지아, 휘그)
존 C. 캘훈(John C. Calhoun, 사우스캐롤라이나, 민주)                   
조지 에반스(George Evans, 메인, 휘그)


* 결석-기권 : 11표

조셉 W. 챌머스(Joseph W. Chalmers, 미시시피, 민주)   
다니엘 디킨슨(Daniel Dickinson, 뉴욕, 민주)
존 페어필드(John Fairfield, 메인, 민주)
앨버트 C. 그린(Albert C. Greene, 로드아일랜드, 휘그)
에드워드 A. 해니건(Edward A. Hannegan, 인디애나, 민주)
윌리엄 H. 헤이우드 2세(William H. Haywood Jr, 노스캐롤라이나, 민주)
자베즈 W. 헌팅턴(Jabez W. Huntington, 코네티컷, 휘그)
제이콥 W. 밀러(Jacob W. Miller, 뉴저지, 휘그)          
제임스 피어스(James Pearce, 메릴랜드, 휘그)
새뮤얼 S. 펠프스(Samuel S. Phelps, 버몬트, 휘그)
다니엘 웹스터(Daniel Webster, 매사추세츠, 휘그)



하원의 애덤스파, 상원의 캘훈과 소수 휘그당원을 제외하면 반전파 주관은 뚜렷하지 않았다. 리오그란데 이남에의 진격을 탐탁치 않게 여겼던 캘훈도 정작, 타일러 행정부 말기 국무장관으로서 텍사스 병합에 관여했던 처지인지라 호소력이 적었는데, 그가 사실상 반대표를 던진(=기권) 사연에는 물론 멕시코전쟁이 몰고 올 파급에 대한 우려감도 있었겠지만, 부통령 재임기 이래의 원한맺혀온 정적인 앤드류 잭슨의 '직계' 포크 대통령에 대한 반감 등 민주당내 소수파 입장에서 파벌주의적 전략과 고려가 우선적으로 반영되진 않았을까 추측해보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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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宿命)으로서의 텍사스 병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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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일반교서에 임하여, 평이하고도 분명한 어조로 인간성을 배반하는 상황을 수반한 산 하신토(San Jacinto)의 전투가 완전한 침략이 된 이래로 멕시코와 텍사스간의 지속중인 전쟁에 관한 의견을 의회에 통보하는 것은 본인의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8년에 걸쳐 텍사스를 재정복하려는 멕시코의 무익한 시도에 지금이야말로 전쟁을 종결해야 할 시기라고 말씀드렸던 바를 재론하겠습니다. 미합중국은 이 문제에 대해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양국이 우리 영토와 경계를 접한 것은 주지한대로 그 파급력은 결코 평화롭지 못합니다.

교전 당사국 가운데 호전적인 진영(멕시코)에서는 우리 합중국에 대해 부당한 혐의가 일기 시작하더니, 필연적으로 미국의 국익이 피해를 받아 우리들의 평화는 매일 위험에 처해진 실정입니다. 뿐만 아니라, 전쟁에 의한 황폐함으로 말미암아 멕시코, 텍사스 양국이 우리나라의 중재를 거치지 않은 채 타국(영국, 프랑스)의 간섭에 굴복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궁극적으로 합중국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피해로 다가올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우리 정부는 종종 전투행위 종결을 유도하기 위해, 양(兩) 교전국에 '명예로운 조건'하에 평화 중재를 시도해왔습니다.

이같은 신념에 근거했던 시도는 그러나, 완전히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멕시코로부턴 전쟁 속행에 반성하려는 의도가 감지되지 않기 때문에, 텍사스측에 유리하게 알려진 의향에 따라 합중국과 텍사스가 병합하는 조약을 체결토록 권고하는 이외의 선택 여지가 행정부에겐 남아있질 않았습니다. 지난 회기(會期) 이래, 멕시코는 전쟁 속행을 경고하며 텍사스 침략을 위한 가공할 준비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그것은 인간성을 배반하는 위협으로 가득찬 것으로서 침략이 현실화될 경우, 모든 기독교 국가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겁니다.

따라서, 행정부로서는 그 추세에 무관심할 수 없고, 이 문제와 관해서 멕시코 정부에 강력한 의사로 대응하는 것이 국가의 명예를 위해서나 당연하다고 느껴지는 바입니다. 국무장관[Calhoun]으로부터 멕시코 주재대사 앞으로 보낸 첨부문서에서도 확인 가능하듯이, 그것은 적절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멕시코에겐 더이상 쓸모없고, 무익한 다툼을 촉발시켜 세계평화를 위태롭게 만들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한 상황은 유럽 대륙에서라면, 용인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평화와 평온은 멕시코의 위협으로 발발하려는 비참한 전쟁에 말려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접 국가에 거주하는 우리 국민이 그 전쟁을 방관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나태한 행위로, 우리의 중립성은 전쟁을 방지하려는 정부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침해당하고 말 것입니다. 텍사스에는 스페인과 멕시코의 초청을 받아 미국으로부터 떠나간 다수의 이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멕시코에겐 합중국과의 병합조약 교섭을 추진해가는 텍사스인에 대해 불쾌감을 느낄 정당한 근거가 없습니다. 병합조약으로 멕시코의 어떠한 이해가 영향을 받는다는 말입니까? 텍사스를 영원히 상실했다고 해서 멕시코가 빼앗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텍사스 독립은 이미 지구상의 열강들에 의해 승인되었기 때문입니다. 텍사스는 독자적인 정책을 자유롭게 채택해 처리할 수 있으며, 자국의 행복을 유지해가는데 있어 최선이라 믿는 진로를 선택할 자유가 있습니다. 텍사스 정부와 그 주민들은 합중국과의 합방을 결정했습니다. 또한, 행정부는 텍사스의 영토를 병합하는 것이 텍사스인의 행복과 영광을 증진할 수단이라고 간주한 것입니다. 대체, 무슨 성실한 원리를 침해했다는 겁니까? 무슨 정치적 도덕상의 원칙을 유린했다는 겁니까? 멕시코 자체에 한해서도, 그 방책은 굉장히 유익한 것이라 보여집니다.


- 1844년 12월 3일, 의회로 보낸 연두교서에서 텍사스 병합의 당위성을 역설하며
                                                                      존 타일러(John Tyler)


                       1846년 5월 3일, 리오그란데 강변의 '텍사스 요새'에서 멕시코 진영을 포격중인 미(美)육군

                     1846년 5월 9일, 레사카 데 라 팔마(Resaca de la palma) 전투를 지휘하는 테일러(Taylor) 장군        
                           
                           멕시코 주력부대를 격파한 후, 예포를 쏘아올리는 부에나비스타(Buena Vista)의 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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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사스 병합으로) 면화지대를 사실상 독점 ・확보함으로써, 미국은 강력한 육군과 수많은 해군에 기반했던 것보다 훨씬 막대한 영향력을 국제정세에 미칠 수 있게 되었다. 여타 전세계 모든 나라가 우리들(=남부 노예농원주 계급)의 발아래 놓여진 셈이며, 단지 1년 기한 목화의 금수(禁輸)조치만으로도 50년간 계속된 전쟁보다 더욱 커다란 고통을 유럽에 안겨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남부는 영국의 생명줄까지 장악하고 만 것이다!

- 1850년 봄, 다니엘 웹스터(Daniel Webster) 의원에게 영토팽창론과 관련한 흉금을 털어놓으면서



우리의 가정을 침범하고, 사회를 어지럽히고, 선동행위를 추켜세우고, 폭동을 조장시키는 것.
그것이 바로, 노예제도 폐지론이라는 것이지요.

이 미개하고도, 무지몽매하며, 우상을 숭배하는 검둥이들은...
아프리카로부터 빠져나와 (노예제 덕분에) 문명화와 개화, 기독교화의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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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치군인의 취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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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민들에 의하여 법률에 알려진 최고 직위에 선출된 본인은 헌법에 규정된 선서를 하고자, 유서깊은 관례를 따라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께 말씀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지구상의 국가들 가운데 높은 위치를 차지하는 우리 공화국의 최고행정관에 선임되도록 불러주신 국민들로부터 나타난 신뢰와 존경으로 가장 깊은 감사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애정이 부여해 준 지위의 수락으로 고된 직무를 수행토록 요구받고, 가장 중대사한 책임을 수반한 이상 최고의 야망도 만족시키는데 충분함에도 어려운 책무에 둘러싸인 점을 통감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새로운 직무의 수행에 임하여 본인은 협조의 준비가 되었습니다. 정부의 입법 ・행정 부문은 현저한 민사(民事)상의 성과와 숙련된 경험으로 뛰어난 여러가지 사례를 증명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재능있고도, 솔직하며, 순수한 인품까지 갖춘 행정부 사람들이 믿음직스럽게 성실하고, 영예로운 과제를 풀어나가는데 최선을 다하도록 후원, 보증해주는데 노력할 것입니다. 그같은 후원과 '바른 것은 무엇이든지 한다'는 성실한 결의를 다져 본인은 근면 ・공평하며, '최선의 국익(國益)'을 위해서라도 나에게 주어진 여러 임무를 수행하고 싶습니다.

이같은 직무의 수행에 임해 본인의 지침이 되는 것은 헌법으로서 오늘, 본인은 헌법을 '보전하고, 보호하며, 수호할' 것임을 맹세하는 바입니다. 헌법 해석에 대해서는 사법당국에 의해 확립된 재판소의 판단과 연방헌법 제정에 크게 공헌했던 건국(建國) 초기 대통령들의 행정부 선례를 모방할 것입니다. 합중국 육해군을 통솔하고, 상원의 권고와 동의로 조약을 체결하고, 대사와 정부 직원을 임명하고, 연방의 근황을 의회에 보고해 필요한 조치를 권고하는 것은 대통령에게 일임된 막중한 권한입니다. 본인을 규제하는 원칙들에 대해 간략히 부연하겠습니다.

특정 당파나 단순한 지역적 이해의 지지 때문이 아닌, 국가 전체의 복리를 위해 헌신한다는 보증에 근거하여 국민 대다수로부터 선출된 본인은 이제까지 발표해왔던 성명을 오늘, 다시금 언명합니다. 정부의 청결함을 유지해가며, 국가적 존립의 내구성을 구성하는 위대한 공화주의를 본인의 공공정책의 기반으로서 채용하겠다는 굳건한 결의를 여기서 선언하는 바입니다. 근좌에, 전장에서 많은 성과를 기록중인 육해군에 대해선 최고의 효율성을 보장하게끔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고, 그 목적에 있어 의회의 존중하에 유지된 육해군 학교를 각별히 배려할 것입니다.

미국의 자유민으로서, 우리는 정치적 자유의 혜택을 확산시키려는 모든 노력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역사적 충고와 우리 자신이 사랑하는 워싱턴(Washington)의 조언에 따라, 여러 나라들과의 동맹에 말려들어가는 것을 피하도록 주의받고 있습니다. 행정부내의 상반되는 모든 논쟁시, 적어도 중립을 견지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일 뿐더러 바람직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의 지리적 위치, 우리 국민의 특별한 재능과 제도, 문명사회의 진취성, 무엇보다도 종교적인 계시가 기타 열강과의 우호관계를 형성하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스스로의 무력에 자신감을 가져, 정당한 권리 보호를 결의한 정부가 현명한 교섭에 의거해 해결할 수 없는 국제적 문제가 비화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우리나라처럼 국민의 도덕과 이성에 입각하여 그들의 애국심에 의지하는 정부라면, 무력에 호소하기에 앞서 모든 명예로운 외교적 수단을 동원하는 것이 지극히 타당할 것입니다. 대외관계를 처리하는데 본인은 이러한 견해를 따를 방침입니다. 그 이유인즉슨, 최고의 국익과 진정한 명예를 위해 불가결하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에게 부여되는 임명권은 미묘하고도, 어려운 의무를 부과하고 있습니다.

숙지하고 있는 한도내에서 본인은 성실함, 능력, 충성심을 가지고 관직 수여의 불가결한 전제 조건을 갖추겠습니다. 또한, 이같은 자질이 어느면에서든 하나라도 결여되고 있다면, 그것만으로 파면의 충분한 명분이 가능한 것입니다. 농업과 상업, 제조업의 막대한 이익을 보장하고, 하천과 항만을 개보수하며, 국채(國債)의 조속한 상환을 준비하고, 정부 관원들로 하여금 긴축을 실행하는데 필요한 법적 조치를 권고한다는 것이 본인의 과제입니다. 그러나, 그밖의 국내정책 안건을 조정하는 것은 헌법에 의해 입법권을 부여받은 의회의 분별력에 달려있습니다.

본인은 의회의 현명한 애국심이 상반되는 이해관계를 조정 ・조화시켜, 우리들의 희망과 애착의 최고 대상인 연방을 영속하는데 필요한 조치를 채택하리라 확신합니다. 진실로, 나라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에서 우러난 정책을 추진하고자 하는 어떠한 행동에 있어서도, 본인은 정부 부처와 열성적으로 제휴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께 하느님의 섭리에 따른 미덕으로 우리나라가 번영의 고지(高地)에 인도된 것을 축하드리는 바입니다. 자그마한 시작으로부터 오늘날, 우리가 점한 위치로까지 인도해 준 보살핌이 계속되기를 기원드립시다.


- 1849년 3월 5일, 대통령취임식 연설에서 자신의 연방주의적 주관을 피력하며 
                                                              재커리 테일러(Zachary Tayl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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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朱熹)의 학설은 쓸모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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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취미삼아 중국근세사를 공부해보면서 일전에 피력한 바 있고, 지금도 계속 불만인 점이 남송기~원대사에 대한 체계적인 개설서나 문헌이 극도로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송사(宋史)>나 <속자치통감(續資治通鑑)> 등 1차사료를 뒤져봐도, 남송 부분에선 개략적인 기사와 무미건조한 나열로 구성되었다는 느낌이 강함. '남송'하면 북방민족에게 시달렸고, 재상정치와 당쟁으로 지새웠다는 선입견부터 남송 연구의 소홀함에 일조하진 않았나 사료된다.

2. 1196년도의 경원(慶元) 위학당금을 조종한 것은 한탁주라고 알려졌으나, 한탁주 본인은 황실의 외척(영종 황후의 숙부, 태황태후 오씨의 조카사위, 북송대 재상 한기의 증손자로 2중 3중의 규벌임)이란 특수한 신분에 힘입어 음보(陰補)로 임관, 주로 궁중문제와 관련된 업무에 종사해왔던 무관으로서 그 학식이나 교양은 특별히 높지 않았던 듯 하며, 도학파 ・정주이학 학설이나 전개에 대해서도 '이념적'으로 그닥 관심은 없었다고 추측된 바다.

그런 한탁주가 어째서 도학파를 쳤을까? 공처가 광종(光宗)이 태상황 효종(孝宗)의 국상에 임하지 않은 스캔들로 퇴위당했을 때, 정변의 1등공신은 궁중 출입을 관리중인 한탁주와 종실의 추밀원사 조여우였다. 영종이 즉위하고, 조여우는 재상으로 기용됐으나, 한탁주의 됨됨이를 못마땅히 여겨 그를 중용하지 않았다. 여기에, 한탁주가 앙심을 품고 조여우와 반대파를 타도하기 위한 음모를 획책한데서부터, '당금사건'의 발단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3. 경원당금의 본질은 평소 조여우와 친밀히 교제했던 주희를 비롯하여 정주이학계 인사들에 대한 한탁주의 정치적 숙청, 권력투쟁이었다는 시각이 중론이다. 북송대의 신 ・구법당 당쟁처럼 정책 논쟁과 대립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현실적으로 이슈화된 사안이 확실치 않으며, 도학파와 사상적으로 대척점에 섰던 사공파의 엽적까지 연루된 만큼, 단지 '반(反)한탁주'라는 기준에서 '위학역당(逆黨)' 59명을 싸잡아 숙청한 인상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다만, 개인적으로 주목하고 싶은 점이라면 천자 영종황제의 의향 또한 당금사건에 일조했을 가능성이다. 이념적인 견지에서 시작한 숙청은 아닌데다, 도학 탄압에 앞장선 좌상 경당(京鏜)이 사망한 데 이어, 개희북벌(開禧北伐)에 앞서 여론의 통일이 시급해지자 한탁주로서도 사상통제는 무익하다는 판단하에 당금을 해제, 사면을 내린다(1202). 정주이학이 관학(官學)으로서 지위를 인정받아 존숭된 것은 후대 이종(理宗)의 치세 중반기에 가서지만.

4. 오히려, 한탁주 대신 영종이야말로 주희와 이학파에 대한 적개심이 상당했음을 가늠직한 증거가 <송사> 등에서 확인된다. '주희의 학설은 도무지 현실에서 응용할 수 없다. 말이 되냐?'는 식으로 경멸감을 토로했을 뿐만 아니라, 조여우의 추천으로 시강(侍講)에 임명된 주희가 경연에 나서자 귀찮아하는 기색마저 드러낸다. 결국 1개월여만에 경질, 조서를 내리며 '주희가 주장한 이론은 거의 쓸모없다!'고 극언까지 내뱉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위학당금을 선포하는 공식 조서에서도 '위학(=정주이학)과 관련된 인사는 조정에서 축출하고, 과거에 응시하지도 못하게 하며, 관원을 천거할 시엔 이학계 인사가 아님을 밝혀두어야 한다'는 별도의 지침까지 하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영종황제의 도학관(觀)이 어떠했을지 충분히 짐작간다. 조여우를 축출하고 대권을 장악한 한탁주가 정권기반 강화의 희생양으로 도학을 지목한데엔 이같은 황제의 심중에 편승, 부추긴 측면도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수시로 멍한 표정에 재위 30년간 외척과 재상 ・대신의 보좌로 간신히 제위만 유지해나간 형편이었다는 영종이지만, 경원당금 당시의 행적이나 언행을 고려할 때, 나름 좋고 싫음이 분명하고 자기 주관은 확실했던 듯.



                                                  주희의 성리학을 쓸모없다며 단언한 송영종(宋寧宗) 황제
                                                  경원당금에 있어서 영종의 역할도 주시할 만한 대목이다.



근좌에, 요사스런 무리들이 도학(道學)이란 명분으로 어리석은 풍조를 만연시키고, 권신들[조여우 등]마저 거기에 따라 주장하며 결탁하여 사당(邪黨)을 형성했습니다. 폐하께서는 그 악당의 우두머리[罪魁, 주희]를 잡아들여 벌을 주셔야 합니다. 그들은 도리어, 스스로 원우당적(元祐黨籍)과 비교하고 있으나, 실제로 사마광이나 소식(蘇軾) 같은 원우연간의 대현(大賢)들은 모두 사악한 모의가 없었으며, 권신에게 아부하지 않았습니다. 삼가 신(臣)이 바라건대, 특별히 밝으신 조서[明詔]를 내리시어 천하에 널리 알려서 중외(中外)가 간사함[邪]과 올바름[正]의 실체를 확연히 알 수 있도록 하시고, 도학 일당이 간사하고 거짓스런 무리라는 것을 깨닫게 하십시오...

- 1198년 5월, 간의대부(諫議大夫) 요유(姚愈)가 송영종에게 올린 도학파 규탄 상소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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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원(慶元)의 당금(黨禁), 주자학 탄압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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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원당금은 남송중기 영종(寧宗)의 재위초, 정주이학(程朱理學)에 대한 사상통제령으로 경원(慶元)2년(1196) 8월에 시작, 가태(嘉泰)2년(1202) 2월에야 해금(解禁)된 것으로 알려졌다. 탄압 대상이 된 주희(朱熹, 朱子)를 대표로 하는 이학가(理學家)들은 '거짓 학문[僞學]', '위학의 당[僞學之黨]', '역당(逆黨)' 등의 죄명을 뒤집어쓰고, 중앙정부로부터 축출당하거나 정계에서 완전히 제거되었다. 정주학파 가운데서도 주희 계열의 정치가나 학자의 임관과 그 저서를 유포하지 못하도록 금지시킨 사실에서, 대표적인 정주이학 탄압사건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당시, '당인(黨人)'으로 지목되어 숙청당한 59명의 인사들 가운데엔 진부량(陳傅良), 엽적(葉適) 등 주희와는 사상적으로 대립진영에 속한 사공파(事功派)와 양간(楊簡) 등 육학(陸學, 象山學) 계열의 인사들도 망라되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거짓 학문'으로 지목돼 탄압을 받았던 대상은 주자학 계열 위주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하지만, 위정자의 입장에선 비교적 넓은 범위에서 사공파나 상산학파 역시 정학(程學, 程顥 ・程頥 二程子의 학설) 계보를 잇는 학파로 도덕과 경세(經世)주의 이념을 앞세우고, 국가 시책(施策)을 비판하는 반(反)체제 위험세력으로 간주되고 있었음을 암시해준다. 사실, 정학에 대한 비판 ・탄압은 남송초부터 존재해왔다. 예컨대, 고종(高宗)의 전권재상 진회(秦檜)는 북송 채경(蔡京)시대 태학생 출신으로 왕학(王學, 王安石의 학문)을 전수받아 신법당 색채가 농후한 인물이었는데, '원우학술(元祐學術)'을 계승한 구법당 계통의 정학에 비판적인 자세였음은 물론, 대금항전(對金抗戰)을 고집중인 정학계(系) 인사를 압살시켜 위협 요소를 제거하려는 목적하에 강경책으로 대응했다.   

소흥(紹興)14년(1144)부터 진회가 사망한 1155년까지 송 조정은 정학을 '전문곡설(專門曲說, 바르지 못한 학문)'로 규정, 과거시험에서 정학적 관점을 응용한 수험생은 일률로 낙제시키는 등 정학 규제의 방침으로 나아갔다. 주희가 과거에 합격한 시기는 진회의 전단이 한창이던 소흥18년(1148)으로, 전체 합격정원 330명 중 278번이었다는 사실은 진회시대의 반(反)정학적 조류가 반영되었기 때문이었으리란 가설이 성립된다. 주희는 50년 가까이 임관과 사퇴를 번갈아 관직생활을 지속했지만 인물됨은 좋게 말하면 결벽스럽고, 나쁘게 말하면 지나친 완벽주의자로 지배층의 비위행각을 거리낌없이 비판했는가 하면, 그 학설도 이상론에 치우친 공허한 내용이라는 반대가 많았다. 그럼에도, 조정에서 주희를 계속 초빙한 것은 석학을 기용함으로써, 지식인을 달래주려는 사정 때문이었다.


                                            도학파의 영수 주희(朱熹), '성리학'하면 바로 연상되는 인물이다.



효종(孝宗) 건도(乾道)~순희(淳熙)연간은 남송대 최전성기로 평화와 번영을 배경삼아 학문이 꽃피우던 시기였다. 이러한 현상은 과거의 융성과도 관련있는데, 과거는 관리채용 시험이므로 아무래도 정치가 개입된다. 정치상으론 붕당(朋黨)이 금기시되면서도, 자연스레 당파가 형성되어 그것이 '학풍(學風)'이란 형태를 취하여 답안심사에까지 영향을 주는 것이다. 송대엔 '사록(祠祿)'이라 불리는 연금제도가 있어, 주희는 관직에 취임해도 거의 대부분 명목상 관위에만 올랐을 뿐, 금새 사직해 사록에 의지하며 생계를 꾸려나갔다. 순희연간을 전후로 주희의 제자가 많아지자, 그의 학파는 보통 '도학(道學)'이라는 명목으로 지칭되었다. 원래, 도학이란 정학 학통을 총칭해오던 이름이었으나, 주희가 도학을 대성(大成)하면서부터 이른바 주자학=도학의 등식처럼 성립된 것이다.

순희5년(1178)과 7년(1180)의 부분적인 정학 규제조치를 거쳐, 순희9년(1182) 7월 '당중우(唐仲友) 사건'을 계기로 도학파[朱子學]의 움직임은 활발히 전개되기 시작했다. 이후, 도학파에 비교적 관대한 치세인 소희(紹熙)연간까지 주희는 여조겸(呂祖謙)과 육상산(陸象山), 진량(陳亮) 등 육학파 ・사공파와 논쟁을 벌여가며 학술활동에 전념한다. 여기서, 경원당금의 배경을 논하고자 당중우 사건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사건 개요는 대략 이러하다. 순희8년에 취임한 재상 왕회(王淮)는 주희의 능력을 평가하여 그를 절동제거(浙東提擧)로 기용했는데, 임지로 부임한 주희가 태주(台州)지사이자 왕회와 인척지간인 당중우의 비리사실을 탄핵, 여섯가지 죄목을 들어가며 전후 10차례에 걸쳐 효종황제에게 탄핵 상소하여 끝내 당중우를 파직시키고, 자신도 후과로 해임된 스캔들을 일컫는다.

주희가 집요하게 당중우를 탄핵한 사연엔 단순히 개인의 부덕과 비리외에도, 사공파 계열인 당중우가 이학파측이 배척하던 순자(荀子)의 저서를 공간 ・배포한데 대한 반감에서 학풍을 자신의 주관대로 변화시켜보려는 의도였다는 관측이 있다. 사대부 인텔리들의 언쟁은 효종시대 사회의 안정과 학문의 융성함을 수반한 결과였지만, 그와 동시에 과거, 천거를 통해 여러 학파가 각기 세력을 신장하고자 서로 다투는 파벌항쟁의 단초를 제공해주고, 그것이 주희와 당중우의 대결로 표면화된 것이다. 또한, 거기엔 엘리트 의식이 너무 강하여 타인의 의견에 관용스럽지 못한 지식인 계층의 약점마저 엿볼 수 있다. 당중우 사건에서 주희가 둔 무리수는 지배층의 심기를 자극하기 충분했으며, 주희에 대한 반대 ・비판자들의 반감까지 합세해 경원당금의 한가지 배경으로 다가오게 된다.

순희16년(1189) 2월, 효종은 광종(光宗)에게 선위(禪位)하여 태상황이 되고, 임안(臨安) 북쪽의 중화궁(重華宮)으로 은거해 '수황(壽皇)'이라 불리었다. 효종 초년에 금나라와 체결한 건도화약(乾道和約)에서 금과 남송은 숙질관계를 맺었지만, 송효종은 벌써 63세였다. 금나라에서 세종(世宗)의 후계자로 21세의 장종(章宗)이 즉위하여 효종으로선 자신보다 42세나 어린 금나라 황제에게 숙부라 부르는 것을 탐탁치 않아했으므로, 퇴위했던 것이다. 광종이 새로이 즉위하면서 주필대(周必大), 유정(留正)이 좌우상을 맡았고, 염세(鹽稅) 인하와 부역경감 조치가 취해졌다. 그런데, 광종은 황태자시절 수도 임안부윤[府尹, 市長]을 역임한 경력은 있으나, 궁중에서 성장해 온 탓에 세상일에 능숙치 못한데다, 선천적으로 어리석었다. 더군다나, 정신질환의 일종인 심질(心疾)까지 앓던 형편이었다.

소희원년(1190)부터 좌상을 겸임하게 된 유정은 그러나, 천자의 근신(近臣)이자 절동총관인 강특립(姜特立)과 이내 대립하는데, 광종 재위말년엔 140일간이나 재상직을 떠나 공석으로 남는 사태마저 발생했다. 여기에 더해, 광종의 이황후(李皇后)가 투한(妬悍)으로 후계자 문제를 앞세워 태상황 효종과 광종 부자를 이간질시키는가 하면, 친속과 가신(家臣) 198명을 기용하는 등 교만방자하게 굴며 전횡을 일삼았다. 소희5년(1194) 6월, 태상황이 붕어했음에도 광종이 국상(國喪)에 임석하지 않자, 엄청난 소동이 일어났다. 마침내, 추밀원사 조여우(趙汝愚)와 지각문사 한탁주(韓侂胄) 등이 공동으로 모의, 고종의 황후였던 태황태후 오씨(吳氏)의 찬동을 얻어내 광종을 퇴위시켜 태상황으로 옮기고, 황자(皇子) 조확(趙擴, 寧宗)을 세워 효종의 장례를 대신 치르도록 조치했다.

영종 즉위의 공로로 우승상에 기용된 조여우는 일시 조정의 대권을 장악한다. 조여우가 집권하고 나서 처음 착수한 일은 개인적으로 친밀한 주희를 중앙으로 호출해 시강(侍講, 경연관)에 임명, 천자에게 도학을 강설토록 한 것이다. 한편, 방어사로 제수된 영종 즉위의 또다른 1등공신 한탁주는 태황태후의 조카이자, 황후 한씨(韓氏)의 숙부이고, 북송대 명신(名臣) 한기(韓琦)의 증손자로 황실과 연계된 규벌(閨閥) 명문 출신이었다. 그는 외척이라는 특수신분과 궁중 출입을 담당하는 직무상 잇점을 활용하여 영종의 신임을 획득하였다. 도학 계통의 조여우와 실무가 한탁주는 국정을 운영해가기엔 애시당초 체질이 맞지 않았고, 주희가 천자의 면전앞에 나서는 기회를 빌어 이부시랑 팽귀년(彭龜年)과 연합해 한탁주를 탄핵하면서 조여우와 한탁주 양자 관계는 결정적으로 갈라져버렸다.

천자 영종도 종실재상 조여우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주희를 시강으로 불러들였지만, 개인적으론 도학파의 학설을 '현실에서 응용할 수 없다'며 경멸을 토로해마지 않았다. 소희5년 윤10월 21일, 영종은 49일만에 주희의 시강 직책을 경질한다는 조서를 내려 '주희가 말하는 것은 대부분 쓸만하지 않다!'는 극언마저 내뱉었다. 이어서 다음해인 경원(慶元)원년(1195) 2월에는 우정언 이목(李沐)의 건의로 조여우 역시 재상에서 파면당해 복주(福州)지사로 전출된다. 이렇듯, 조여우와 한탁주의 권력투쟁은 한탁주의 승리로 결말지어졌다. 한탁주의 집권에 편승한 반(反)도학 인사도 적지않았으니, 경당(京鏜)과 하담(何澹), 심계조(沈継祖), 고문호(高文虎) 등이 경원당금의 선두로 활약했고, 특히 고문호는 전날 주희가 탄핵했던 당중우 휘하에서 태주의 통판으로 재직한 인물이다.


                                                  조여우와 한탁주의 공동 모의로 퇴위당한 송광종(宋光宗)



경원2년(1196) 정월, 한탁주파의 경당이 재상에 임명되고, 6월엔 한탁주가 개부의동삼사를 제수받음으로써 권위가 재상을 능가할 정도였다. 주희 일파와 도학을 받드는 사람들이 조여우를 지지했었기에, 한탁주는 도학을 금지시켜 정적을 제거하는 동시에 정권기반을 공고히하고자 시도했다. 경원원년(1195) 7월, 참지정사 하담(何澹)이 '도학은 공맹(孔孟)의 길에서 벗어났다'고 주장하며 도학파를 일체 관직에서 추방하도록 상주한 이래, 조정내외 반도학파 관원들의 '거짓 학문[僞學, 道學]'에 대한 공격이 빗발쳤다. 경원2년 8월, 영종은 조서를 내려 위학과 관련된 인사는 조정에서 관원으로 일하지 못하고, 과거에 응시할 수 없으며, 관원을 천거할 때에도 위학지인(僞學之人)이 아님을 명시하도록 엄명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감찰사 심계조가 주희의 대죄와 악행을 탄핵하였다.

심계조가 나열한 주희의 죄상은 대강 다음과 같았다.


* 좋은 쌀[米]로 모친을 봉양하지 않았으며, 불효막심했다.

* 조정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황제에게 불경스러웠다.

* 효종황제의 능묘(陵墓, 永阜陵)를 결정할 당시, 이론을 제기하여 국가(國家, 황제)에 불충했다.

* 마니교도처럼 채식(菜食)을 즐기고, 마귀를 섬기는 요술로 제자들을 유혹했다.

* 쓸데없이 허무맹랑한 주장을 퍼뜨리고, 신하의 직분을 망각한 세력들을 불러모아 파당을 결성했다.

* 사찰 부지로 서원을 이전시켜, 공자상(孔子像)과 불상을 훼손시켰다.

* 비구니 2명을 유혹하여 처첩으로 삼았다.


대부분 황당무계한 루머였지만, 칭병을 구실로 관직 임명을 계속 사퇴했듯이 이전부터 비난의 대상이었던 사안도 포함되어 주희가 완전 무결하다고 반론하기조차 곤란한 상황이었다. 이때문에 12월 26일, 영종의 명으로 주희에게 낙직파사(落職罷祠, 삭탈관직)의 처분이 가해졌다. 그후로도 재상 경당을 중심으로 탄압이 가속화돼 경원3년(1197) 2월, 도학파를 중앙 관직에서 배제하는 조치가 취해진데 이어서 6월, 조사대부 유삼걸(劉三傑)이 '위학의 당(黨)은 역당(逆黨, 역적무리)으로 변질되었다'고 주장한다. 연말에는 사천의 면주(綿州)지사 왕연(王沇)이 블랙리스트인 '위학의 당적(黨籍)'을 제정하자고 청하는 상소를 올렸고, 그리하여 조여우와 주희 및 그들에게 동조하는 무리에게 '위학역당(僞學逆黨)'의 판정을 내려 당적에 기재된 사람이 59명에 이르렀던 것이다.

당적에 기재된 인사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처벌받았고, 그들과 관계한 사람들까지도 임관하거나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다. 위학금령(禁令)은 더욱 엄중히 시행되었다. 경원4년(1198) 5월, 간의대부 요유(姚愈)가 도학파에 철퇴를 가하도록 요청 ・상주하여 천자로부터 적극적인 찬동을 얻었다. 그 내용인즉슨 이러하다.


근좌에, 요사스런 무리들이 도학(道學)이란 명분으로 어리석은 풍조를 만연시키고, 권신들[조여우 등]마저 거기에 따라 주장하며 결탁하여 사당(死黨)을 형성했습니다. 폐하께서는 그 악당의 우두머리[罪魁, 주희]를 잡아들여 벌을 주셔야 합니다. 그들은 도리어, 스스로 원우당적(元祐黨籍)과 비교하고 있으나, 실제로 사마광이나 소식(蘇軾) 같은 원우연간의 대현(大賢)들은 모두 사악한 모의가 없었으며, 권신에게 아부하지 않았습니다. 삼가 신(臣)이 바라건대, 특별히 밝으신 조서[明詔]를 내리시어 천하에 널리 알려서 중외(中外)가 간사함[邪]과 올바름[正]의 실체를 확연히 알 수 있도록 하시고, 도학 일당이 간사하고 거짓스런 무리라는 것을 깨닫게 하십시오...


5월 12일, 직학사원 고문호가 초안을 작성한 영종의 칙령이 반포되었다. 거기엔 '장차 국시(國是)를 기울게 만들고, 민심을 어지럽히며, 심지어 원우연간의 현인(賢人)들에게 절부(竊附)하면서 실제로는 소성(紹聖)의 간당(姦黨)과 같은 부류라는 사실을 생각치 못하고 있다'고 지적, 분간하기 어려운 말로 세속을 어지럽히지 말 것을 경고하였다. 이에 한탁주는 매우 만족해하며 고문호를 요직으로 승진시키고, 7월 요유를 병부상서로 삼았다. 주목할 만한 점은 주희의 도학파를 철종(哲宗) 소성연간, 신법을 옹호한 장돈(章惇), 채변(蔡卞), 채경과 같은 부류로 중상 ・매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반면, 신종(神宗) 사후 왕안석의 개혁안에 반대하고, 구법(舊法)을 부활시켰던 사마광, 소동파를 현인으로 존중하는 것으로 보아, 한탁주파 스스로가 구법당을 계승하려는 자세였음을 시사해준다.

하지만, 같은해(1198) 12월부터 도학파에 대한 탄압을 조금이나마 완화시키려는 조짐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반(反)도학운동의 선봉장으로 앞장서왔던 경당과 하담이 상주해 '위학지인 가운데 개과천선한 자에겐 사록(祠祿, 연금)을 조금이라도 지급해주어 적게 징벌하여 크게 징계하는 복(福)을 깨닫게 하자'며 건의했고, 한탁주 역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당금이 점차 느슨해진다. 경원6년(1200) 3월, 도학파의 지도자로 당금사건 내내 집중적인 공격을 받아온 주희가 향년 71세로 사거(死去)했다. 주희의 학문은 그가 파직당한 후 '거짓된 학문'으로 매도당했기 때문에 대다수 사대부는 도학에 대해 담론하기를 꺼려했고, 문생(文生)이나 지인도 감히 주희의 장례에 참석하지 못할 정도였다. 다만, 도학파의 구심력이 사라졌다는 것은 당금의 완화 가능성을 제시한 셈이었다.


                                     촛불을 들고 손님을 기다리는 선비, 남송 영종대(寧宗代) 궁정화가의 작품



경원6년 9월 11일, 진사 여조태(呂祖泰)가 한탁주를 처형하라는 상소문을 올렸다. 여조태는 여조겸의 종제(從弟)로 성격이 급하고, 활달하여 세상일을 논하는데 거리낌없었다. 자신의 친형인 태부사승 여조검(呂祖儉)이 위학역당에 연루되어 파직당하고, 실의속에 사망하자 울분을 참지 못한 여조태는 등문고(登聞鼓)를 울려 한탁주의 '무군지심(無君之心)'을 규탄, 그를 주살시켜 화란(禍亂)을 예방토록 청했던 것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도학(道學)은 자고로 나라를 위한 사람들이 의지해야만 할 바입니다. 승상 조여우는 오늘날에서 보면 아주 커다란 공로가 있는 분입니다. 위학을 금지시키고, 조여우의 당(黨)을 몰아낸 것은 장차 폐하의 나라를 망치려는 것이거늘, 어찌 폐하께서는 깨닫지 못하십니까? ...소사단(蘇師旦)은 평강(平江)의 서리 출신이고, 주균(周筠)은 한씨(韓氏)의 시역(厮役, 하인)이었는데 높은 지위를 얻었으니, 한탁주와 그 무리들이 망령되이 스스로 존대(尊大)하고, 조정을 업신여김이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청하건대 한탁주, 소사단, 주균을 주살하시고, 진자강(陳自强)의 무리들도 모두 내치십시오. 대신 중엔 주필대(周必大)만이 자격이 있으니, 그가 마땅히 재상이 되어야만 합니다...


여조태의 상주가 올라가자, 조정이 들끓었다. 당장 주필대는 배후 조종의 혐의로 관직이 1등급 강등되고, 여조태는 '어리석은 망언'을 상소한 죄명하에 장형 1백대의 형벌을 받아, 광서 흠주(欽州)로 유배당했다. 그 다음달, 한탁주는 태부(太傅)의 직위를 겸했는데, 공교롭게도 후견인인 한황후(韓皇后)가 병사하면서 권력기반은 도리어 약화됐다. 그리고, 경원6년 8월에 좌상 경당(京鏜)이 사망한 데 이어서, 경당과 더불어 도학 탄압을 주도해 세간으로부터 '괴험(魁憸)'이라 칭해진 하담과 유덕수(劉德秀), 호굉(胡紘)도 좌천 ・파면당해 중앙정계를 떠난 상황이었다. 친위그룹의 상실로 말미암아 당금노선을 견지하기엔 어려워졌을 뿐만 아니라, 한탁주 자신이 음보(蔭補)로 임관해 궁중문제를 담당해 온 무관인지라 학문과는 거리가 멀었던 만큼, 이 문제에 싫증을 느끼게 된다.

거기에다, 한탁주로선 대금북벌(對金北伐)을 계획중인 마당에 내외의 비난 여론을 종식시키고, 분위기를 쇄신하여 반체제 인사들까지 포용해 국론통일을 도모하려는 보다 현실적인 계산도 깔려있던 것이다. '위학당금을 해제하지 않으면, 정적을 양산하여 나중에 보복의 화(禍)를 면치 못한다'고 충고한 예부상서 장효백(張孝伯)의 제안이 결정적 계기가 되어 가태2년(1202) 2월 9일, 거의 전면적인 도학의 해금(解禁)조치가 공포되었다. 사망한 주희와 조여우는 관작(官爵)을 추증받았고, 진부량(陳傅良), 유광조(劉光祖), 설숙사(薛淑似) 등의 복관(復官)을 허용했다. 그렇지만, 육학파(陸學派, 象山學) 인사에 대한 규제는 가태연간의 해금후로도 줄곧 지속되다가 개희(開禧)말년, 북벌 실패로 한탁주가 실각당한 연후에야 완전 해금이 성사된다. 이상이, 경원당금의 개략적인 진행 과정이다.

경원당금은 본질적으로 종실재상 조여우와 외척 한탁주의 권력쟁탈전 성격이 짙다는 것이 중론이다. 북송후기의 신구법당 정쟁과 달리 이슈화된 사안이나 정책 대결을 찾아볼 수 없고, 한탁주가 정치적으로 대립관계인 조여우 및 그가 후원하던 도학파를 구심점으로 결집한 인사들을 제거하려는 목적에서의 일시적인 숙청에 다름아니며, 학문 자체를 근절시키려는 의지의 발로였다 단정하기엔 애매모호한 구석이 있다. 한편, 경원연간의 당금에서 '위학당적(僞學黨籍)', 블랙리스트에 등재된 인사가 모두 도학자라는 구도가 성립되는지 의문이다. 예컨대, 엽적(葉適) 등의 경우 사공(事功)을 제창했던 영가학파(永嘉學派)의 대표주자로 주희와는 이질적인 사상의 소유자였으니, 위학역당 내부엔 도학가가 분명 포함되었으나, 그외의 비(非)도학자도 상당수 연루된 것이다.

그렇다면, 위학역당 59명의 공통점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그들은 모두 일찍이 한탁주와 직간접적으로 접촉하여 한탁주를 공격했거나, 한탁주의 제거 대상이던 인물, 혹은 그자를 옹호한 사람들이다. 일례로, 경원원년 조여우가 재상직에서 파직당했을 무렵 조야 의론이 분분한 가운데, 6명의 태학생[六君子]이 비분강개하여 상소문을 올리자, 한탁주가 그들에게 '국시(國是)를 어지럽힌' 죄명을 씌우고, 임안에서 5백리 떨어진 곳으로 유배시킨 사례가 있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조여우와 주희에게서도 나타났으며, 한탁주가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위협받을 때마다 반격을 가하고자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하튼, 경원당금을 일으킨 한탁주는 북벌의 실패로 피살되고, 후대 이종(理宗)의 순우(淳佑)초년(1241)에 와서 이학(理學)은 유교의 정파로 인정받아 정치상 우위를 점하게 된다.



이하는 경원(慶元) 위학역당 59명의 블랙리스트


* 전직 재상 4명

조여우(趙汝愚), 우승상(右丞相)
유정(留正), 소보(少保) 관문전대학사(觀文殿大學士)
왕란(王蘭), 관문전학사(觀文殿學士) 지담주(知潭州)
주필대(周必大), 소부(少傅) 관문전대학사(觀文殿大學士)


* 특제(特制)이상 관원 13명

주희(朱熹), 환장각대제(煥章閣待制) 겸 시강(侍講)
서의(徐誼), 권공부시랑(權工部侍郎)
팽귀년(彭龜年), 이부시랑(吏部侍郞)
진부량(陳傅良), 중서사인(中書舍人) 겸 시독(侍讀) 겸 직학사원(直學士院)
설숙사(薛淑似), 권호부시랑(權戶部侍郞) 겸 추밀도승지(樞密都承旨)
장영(章潁), 권병부시랑(權兵部侍郞) 겸 시강(侍講)
정식(鄭湜), 권형부시랑(權形部侍郞)
누약(樓鑰), 권이부상서(權吏部尙書)
임대중(林大中), 이부시랑(吏部侍郞)
황유(黃由), 권예부상서(權禮部尙書)
황보(黄黼), 권병부시랑(權兵部侍郞)
하이(何異), 권예부시랑(權禮部侍郞)
손봉길(孫逢吉), 권이부시랑(權吏部侍郞)


* 기타 관원 31명

유광조(劉光祖), 기거랑(起居郞) 겸 시독(侍讀)
여조검(呂祖儉), 태부사승(太府寺丞)
엽적(葉適), 태부소경(太府少卿) 총령회동재부(總領淮東財賦)
양방(楊芳), 비서랑(秘書郞)
항안세(項安世), 교서랑(校書郞)
심유개(沈有開), 기거랑(起居郞)
증삼빙(曾三聘), 지영주(知郢州)
유중홍(游仲鴻), 군기감부(軍器監簿)
오렵(呉獵), 감찰어사(監察御史)
이상(李祥), 국자좨주(國子祭酒)
양간(楊簡), 국자박사(國子博士)
조여당(趙汝讜), 첨차감좌장서고(添差監左蔵西庫)
조여담(趙汝談), 전회서안무사간관(前淮西安撫司幹官)
진현(陳峴), 교서랑(校書郞)
범중보(范仲黼), 저작랑(著作郞) 겸 권예부낭관(權禮部郎官)
왕규(汪逵), 국자사업(國子司業)
손원경(孫元卿), 국자박사(國子博士)
원섭(袁燮), 태학박사(太學博士)
진무(陳武), 국자정(國子正)
전담(田澹), 종정승(宗正丞) 겸 권공부낭관(權工部郎官)
황탁(黃度), 우정언(右正言)
첨체인(詹體仁), 태부경(太府卿)
채유학(蔡幼學), 복건제거(福建提擧)
황호(黄灝), 절동제거(浙東提擧) 상평다염공사(常平茶鹽公事)
주남(周南), 지주교수(池州敎授)
오상승(吳桑勝), 신가흥부교수(新嘉興府敎授)
이식(李埴), 교서랑(校書郞)
왕후지(王厚之), 직현모각(直顯謨閣) 강동제형(江東提形)
맹호(孟浩), 지호주(知湖州)
조공(趙鞏), 비각수찬(秘閣修撰) 지양주(知揚州)
백염진(白炎震), 신통판성도부(新通判成都部)


* 무신(武臣) 3명

황보빈(皇甫斌), 지주도통제(池州都統制)
범중임(范仲壬), 지금주(知金州)
장치원(張致遠), 강서병마검할(江西兵馬鈐轄)


* 태학생 6명[六君子]

양굉중(楊宏中)
주단조(周端朝)
장도(張衟)
임중린(林仲鱗)
장전(蔣傳)
서범(徐範)


* 사인(士人) 2명

채원정(蔡元定)
여조태(呂祖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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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史 잡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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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한 한문 실력이나마 남송시대를 탐구(?)하고자 <宋史>를 일독중인데, 역시 만만치가 않다. 더욱이, 알려진대로 기사 내용과 구성의 충실함이란 측면에서 무미건조, 조잡하기 이를데 없어 <통감>에 비교할 따위가 아님.

틈틈이 읽어가면서 몇가지 요점 부분만 추스려 옮겨본다.
배경은 양송대를 통틀어 가장 평화스러웠던 광종황제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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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종(光宗) 순도헌인명공무덕온문순무성철자효황제(循道憲仁明功茂德溫文順武聖哲慈孝皇帝)의 휘(諱)는 조돈(趙惇), 효종(孝宗)의 셋째아들이다. 모친은 가로되, 성목황후(成穆皇后) 곽씨(郭氏)였다. 소흥(紹興)17년(1147) 9월 을축일, 번저(藩邸)에서 태어났다. 소흥20년(1150), 현재의 이름을 하사받고, 우감문위솔부부솔(右監門衛率府副率) 직책에 제수되어 영주자사(榮州刺史)를 더했다. (소흥32년에 高宗이 퇴위해) 효종황제가 즉위하자, 진조군(鎭洮軍)절도사와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받았으며, 공왕(恭王)에 봉(封)해진다.

장문태자(莊文太子)가 사망하자, 효종은 황제[여기서는 光宗을 뜻함]가 자신과 닮아 영특하고 용감하여 황태자로 세우고자 했으나, 미처 결정을 내리지 않은 채 지체시켰다. 건도(乾道)6년(1170) 7월, 태사(泰史)가 상주해 (五行의) 목(木)과 화(火)가 결합했으니 황태자를 책립(冊立)해야 한다며 아뢰자, 응당 사면령을 내렸다.

그무렵, 재상 우윤문(虞允文)이 연달아 일찌감치 태자를 세울 것을 아뢰었다. 효종이 이르기를...


'짐도 오래간 생각했으며, 본래부터 결심해 온 터이니라. 다만, 태자를 세웠다간 성품이 교만해져 스스로 제멋대로 굴거나 학문에 힘쓰지 않고, 점차 덕망을 잃지 않을까 우려될 따름이다. 때문에 짐은 아직 태자를 세우지 아니한 바, 마땅히 실무와 고금(古今)에 통달하게끔 경험을 쌓도록 훈육시켜 후회가 없기를 바랄 뿐이다.'


건도7년(1171) 정월 병자일 초하루날, 양궁(兩宮)이 효종에게 존호(尊號)를 올려 바쳤으며, 진귀한 예를 갖추었다. 승상 우윤문이 태자의 책립을 재차 간청하자, 효종은 '짐은 이미 태자를 세우기로 했으니, 친왕과 외번(外藩)들에게 출석하도록 영을 내리고, 경(卿)은 마땅히 전대(前代)의 전례(典禮)를 논의토록 하라.'고 말했다. 우윤문이 그 말을 듣고, 과거의 책봉사례를 조사하였다. 2월 계축일, 마침내 공왕이 태자로 세워졌으며, 경왕(慶王) 조개(趙愷)는 웅무(雄武), 보녕군(保寧軍)절도사와 영국부(寧國府) 통판을 제수받고, 위왕(魏王)에 진봉(進封)되었다.
 
3월 정유일, 정식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4월 갑자일, 임안부(臨安府) 통판으로 임명받아 부윤(府尹)의 업무를 관장 ・계승하였다. 광종황제가 공왕이었을 무렵, 강연관과 더불어 과거의 역사를 헤아리는데 때때로 의표를 찔러 강연관 스스로가 이에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 임안부윤에 이르러, 태자는 민정(民政)을 깊이 헤아리면서 진실과 거짓됨을 두루 숙지하였다. 효종이 자주 칭찬하자, 승상 조웅(趙雄) 역시 '태자전하의 자질은 참으로 아름다우며, 매번 사람을 보내와 문안인사를 드리시니, 학문이 향상되어간다는 분명한 조짐입니다.'라고 말했다.

순희(淳熙) 14년(1187) 10월 을해일, 태상황 고종(高宗)이 붕어하였다. 11월 기해일, 백관(百官)들이 장례를 마치자, 효종은 손수 조서를 내려 '황태자가 여러가지 사무를 결재하는데 참여할 것이며, 내동문사(內東門司)를 의사당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순희15년(1188) 2월 무술일, 황제[光宗]가 의사당에 나가기 시작했다. 순희16년(1189) 2월 임술일, 효종이 [臨安宮] 자신전(紫宸殿)에서 길복(吉服)을 입고 선양(禪讓)의식을 거행하자, 관리들이 뜻을 받들어 차례로 축하하였다. ...8월 갑오일, 공주(恭州)를 중경부(重慶府, 광종의 봉지로 겹경사를 의미함)로 승격시켰다.

병신일, 양절(兩浙)지방의 월춘전(月春錢) 등 세금 25만 5천민(緡)을 1년간 감면해주었다. 기해일, [전직 재상] 왕회(王淮)가 죽었다. 계축일, 금나라가 온대한숙(溫蒂罕肅) 등을 파견해와 즉위를 축하해주었다.


소희(紹熙)원년(1190) 9월 정사일, 금나라가 왕수(王修) 등을 보내와 중명절(重明節)을 축하해주었다. 기미일, 검주(劍州)를 융경부(隆慶府)로 승격시켰다. 신유일에 천둥이 쳤다. 경오일, 금나라에 소산(蘇山) 등을 신년(新年, 正旦) 축하사절로 파견하였다. ...11월 갑인일, 안남(安南, 베트남)이 입공(入貢)했다. 12월 신사일 초하루, 좌천우위대장군 정(挺, 皇子)에게 보녕군절도사를 더해주었다. 임오일, 왕륜(王倫)에게 시호를 하사하여 '절민(節愍)'이라고 하였다. 병술일, 왕린(王藺)을 추밀사직에서 파면시켰다. 무자일, 갈필(葛邲)을 지추밀원사로, 호진신(胡晉臣)을 참지정사 겸 지추밀원사로 삼았다. 계묘일, 조서를 내려 1년간 광동(廣東)의 관염세(官鹽稅)를 감면해주었다.

소희2년(1191) 11월 신미일, 태묘(太廟)에 가서 제사를 드렸다. 이황후(李皇后)가 황귀비(黃貴妃)를 때려죽였다는 소문이 났다. 임신일, 원구(圜丘)에서 천지신명께 제사드리고, 태조(太祖)와 태종(太宗)을 배향했는데, 거센 바람이 몰아친데다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예를 갖추지 못한 채 중단했다. 황제는 귀비가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선 놀라 두려워해 병을 얻었고, 하례마저 중단했으나, 황후를 통제할 수가 없어 묵인해버렸다. 수황성제(壽皇聖帝, 孝宗)와 수성황후(壽成皇后)가 병문안을 왔음에도, 황제는 조현(朝見)하기를 스스로 거부하였다. 12월 병신일에 형문군성(荊門軍城)을 축조하였다. 정해일, 황제가 내전(內殿)에서 비로소 보신(輔臣)들과 회견했다.

소희3년(1192) 봄 정월 을사일 초하루날, 황제가 병을 앓아 조회에 출석하지 않았다. 경술일, 수주(秀州)의 상공미(上供米) 4만 4천석(石)을 감면해주었다. 사천의 염세(鹽稅)와 주세(酒稅) 90만민(緡)을 1년간 감면하였다.


소희5년(1194) 가을 7월 신유일, 승상 유정(留正)이 병을 핑계로 정무를 관장할 수 없다하여 마침내 [臨安城 밖으로] 도망하였다. 애초에, 유정 등은 거듭해서 가왕(嘉王)을 황태자로 세울 것을 건의했었는데, 황제가 이를 허락하였다. 유정이 나아가 어찰(御札)을 받자, '세월도 오래흘렀으니, 한가로와지고 싶네'라고 적혀있었다. 유정이 그것을 알고 크게 두려워하여, 물러나기를 도모했던 것이다. 갑자일, 태황태후(太皇太后, 高宗의 황후)는 광종황제가 병환으로 효종의 국상을 주재할 수 없자, 명을 내려 중화궁(重華宮)에 장막을 씌우고, 황제(皇子) 가왕을 즉위시켰다. 광종을 태상황제로, 황후를 수인태상황후(壽仁太上皇后)로 올렸으며, 태안궁(泰安宮)으로 옮겼다.
 
경원(慶元)원년(1195) 11월 무술일, 존호를 올려 '성안수인태상황제(聖安壽仁太上皇帝)'라고 하였다. 경원6년(1200) 6월 무자일, 태상황후 이씨가 붕어했다. 8월 경인일, 태상황제가 위독해졌다. 신묘일, 수강궁(壽康宮)에서 붕어하니, 향년 54세였다. 병신일, 이태후(李太后)의 시호를 자의황후(慈懿皇后)라 하였다. 계묘일, 자의황후를 임안부 남산 수길사(修吉寺)에서 장사지냈다. 11월 병인일, 태상황제의 시호를 '헌인성철자효황제(憲仁聖哲慈孝皇帝)', 묘호를 광종(光宗)이라 하였다. 가태(嘉泰)3년(1203) 11월 임신일, 시호를 덧붙여 '순도헌인명공무덕온문순무성철자효황제(循道憲仁明功茂德溫文順武聖哲慈孝皇帝)'라 했다. 영숭릉(永崇陵)에 안장되었다.


논평하기를, 광종은 젊은 시절 훌륭한 평판을 얻었고, 학문이 깊어 품위있게 행동하였다. 즉위함에 이르러, 권력을 총괄하여 폐행(嬖倖, 총애를 받는 간신)을 물리쳤으며, 부세(賦稅)를 줄여 형벌을 완화시켰으니, 소희(紹熙)초기의 정치는 아름다웠다 평가할 만 하다. 그러나 지아비로서 궁중(宮中)의 투한(妒悍, 李皇后)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바람에 놀라고, 근심하여 병[心疾을 뜻함]까지 얻고 말았다. 자연스레 정치는 날로 혼미(昏迷)해졌고, 어버이에게 효도하지 않게 되었으니, 건순(乾淳, 宋孝宗의 치세)시대의 위업은 이로부터 쇠퇴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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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이런 식이다. 개인적 감상평이라면, 한마디로 레알 재미없음.;; 사마문정공의 유려한 문체라던지 평론 수준은 기대하지도 않았건만, 원대에 사서를 편찬하며 몽고인 입맛에 맞게 취사선택한 티부터가 너무나 강함. 


                                   투한(妬悍)으로 악명높았던 스캔들 메이커, 자의황후(慈懿皇后) 이씨(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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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황릉(皇陵)의 대조적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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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진은 하남성 공현에 소재한 송나라 개국군주 태조 조광윤의 영창릉(永昌陵) 전경이다.
사진에서 보시다시피 묘역이 보리밭으로 사용되면서, 한눈에 보더라도 관리가 좋지 않다는 인상이 강한데...
능묘 자체는 원대초기에 조광윤의 옥대를 노린 도굴꾼에게 한 차례 능욕당한 수난사를 간직한 바 있다.
그래도, 강남으로 내려갔던 후손들의 수난사에 비한다면야 저건 오히려 약과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




문혁을 거치면서 봉분이며, 조형물이 죄다 철거당하고 차밭으로 개조된 남송 황릉을 보면 더더욱 그렇다.
위의 사진은 절강성 소흥현에 소재한 광종의 영숭릉(永崇陵)인데, 나머지 다섯 황릉도 사정은 피차 마찬가지임.
1960년대까진 영창릉과 비슷한 광경에 사당도 건재하여 '여기가 황릉이구나'라는 인상을 간직한 반면,
문혁 이후에 와서야 지금처럼 무심코 지나치기 십상인 유적지다운 느낌은 전혀 와닿지 않는다, 이 말씀이다.

61~64년부터 주변에 차밭이 조성되기 시작한 점으로 미루어, 문혁을 기화로 싸그리 밀어버린 모양이고...
하남의 북송시대 황릉에 비해 애시당초 규모면에서나 관리면에서 협소한데다, 소홀했던 후과가 작용한 듯 하다.

누굴 원망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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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孝宗)과 자치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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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조(宋朝)는 중원을 금나라에 내주고 강남으로 남천(南遷), 중흥하여 여러가지 제도들을 새로이 제정해야만 했다. 중흥한 지 40년이 지난 효종대(孝宗代)에 이르러서도 조정내 부서의 업무 분장은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은 듯 한데, 여기서 효종황제는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읽고, 거기로부터 당태종(唐太宗)의 고사를 통해 업무 분장의 방침을 배우게 된다. 건도(乾道)3년(1167) 2월 13일, 홍매(洪邁)가 상주한 대목에서 그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기거사인 홍매가 상주하기를, '양성(兩省, 中書省과 上書省)에서 매일 기록을 보내오는데, 황문서(黃文書)가 궤각(几閣)에 가득쌓였지만, 대부분 일상적인 자잘한 일들로 조정을 번거롭게 할 정도는 아닙니다. 다만, 오로지 명령을 내린 것만으로도 중서성의 업무가 깨끗하지 못하니, 이보다 심한 폐해도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황상(皇上, 宋孝宗)이 말하기를, '짐이 일찍이 <통감>을 읽었는데, 당태종이 재상들에게 말했던 것이 실렸으며 사송(辭訟)을 들어서 받들게 하고, 장부에 얽매이면 매일 한가할 수 없으니, 상서(上書)에 칙령을 내려 자질구레한 일은 좌우 사람들에게 위촉토록 했었소. 짐은 이해하니, 경이 언급한 것은 지극히 마땅하오.'라고 하였다.


송효종이 언급한 <통감>의 고사는 정관(貞觀)3년(629)의 사례로서, 다음과 같다.


황상(皇上, 唐太宗)이 방현령(房玄齡)과 두여회(杜如晦)에게 말했다.

'공(公)들은 복야(僕射)로서, 마땅히 널리 현명한 인재를 물색하여 재주에 따라 임무를 부여해야 할 것인즉, 이것이 바로 재상의 직책이오. 근좌에 듣건대, 송사(訟事) 문제를 처리하느라 하루도 쉴 틈이 없다는데 어떻게 짐을 도와줄 현명한 사람을 구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어서 칙령을 내리니, '상서들의 자질구레한 업무는 좌우승(左右丞)에게 위촉하고, 오로지 중대한 안건으로 상주해야 할 것만 골라내 복야에게 관계토록 하라.'고 하였다.


정관3년 <통감>의 기사 내용과 송효종이 홍매에게 답한 발언은 거의 일맥상통한다. 이처럼, 효종은 <자치통감>을 일독하여 업무처리의 지혜를 얻어낸 것이다. 또한, 순희(淳熙)6년(1179) 2월에 우성관(佑聖觀)으로 행차하였을 때, 여기서도 효종은 태자[宋光宗]에게 새삼 <자치통감>을 언급하면서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황상이 우성관에 행차하였고, 곧바로 저궁(儲宮, 太子宮)으로 올라갔다. 황태자가 따라가니, 사호증(史浩曽)을 불러 입시(入侍)토록 했으며, 황상은 강궁(講宮)에 건너가서 동우(東宇)를 올려다봤다. 처음에는 개조하지 않았었는데, 엄연히 새로 단장한 것과 같았다. 황상이 기뻐하여 구여(舊與)를 생각하며 명원루(明遠樓) 아래에 이르렀다. 황상이 황태자에게 이르기를, '앞서 <통감>을 익혔다면, 따로 어떠한 책을 읽느냐?'라고 물으니 태자가 대답했다.

"경사(經史)를 함께 읽습니다."

황상이 말하였다.

"먼저 경서(經書)를 주로 해야겠지만, 역사 또한 없앨 순 없다."


송효종은 태상황 고종(高宗)이 서거했을 시에도 장례절차의 의례를 <통감>에서 찾고자 했었던 모양이다. 순희14년(1187) 10월 을해일(8일), 태상황이 덕수전(德壽殿)에서 붕어하자, 이와 관련한 기록이 남아있다.


유조(遺詔)로 태상황후(太上皇后) 오씨(吳氏)를 태황태후로 개칭하였다. 황상이 아프게 통곡하고, 가슴을 치며 펄쩍 뛰면서 재신 왕회(王淮) 등에게 이르기를, '진효무제(晋孝武帝)와 위효문제(魏孝文帝)는 3년상(喪)을 실행했었는데, 무엇이 청정(聽政)을 방해하겠는가? 사마광의 <통감>에 기재된 것이 아주 상세하구나!'라고 하였다.


여기서 태상황이란, 물론 송고종(宋高宗)을 말한다. 고종은 일찌감치 후사가 요절하는 바람에 양자 효종을 태자로 삼았고, 소흥(紹興)32년(1162) 효종에게 양위했다. 고종이 이때 서거하자, 효종은 3년간 상복을 입겠다고 주장하며 근거를 <자치통감>에서 찾았다. 소희(紹熙)4년(1193) 3월, 수황(壽皇)은 새삼 <자치통감>을 호평하였다. 수황이란 순희16년(1189) 2월, 광종에게 선위(禪位)하고 중화궁(重華宮)으로 물러난 효종의 존호(尊號)를 가리킨다. 송효종 스스로가 태상황이 된 지 4년만에, 조여우(趙汝愚)에게 <자치통감>의 중요성을 귀띔한 것이다.


3월 병자일, 황상(皇上, 宋光宗)이 중화궁으로 조현(朝見)드리러 가자, 황후(皇后, 李皇后)가 따라갔다. 신사일, 갈필(葛邲)을 우승상으로, 호진신(胡晉臣)을 지추밀원사로, 진규(陳騤)를 참지정사로, 조여우를 동지추밀원사로 삼았다. 갑신일, 감찰어사 왕의단(汪義端)이 상주하기를, 조여우가 집정(執政)하며 조종(祖宗)의 고사를 쫓지 아니한고로, 파면할 것을 청하였다. 상소를 세 차례나 올렸으나, 이에 답변해주지 않았다. 신묘일, 왕의단을 파면시켰다. 계사일, 황상이 수황성제(壽皇聖帝, 孝宗)와 수성황후(壽成皇后)를 모시어 취경원(聚景園)으로 행차하였다.

수황성제가 조여우를 호출해 만나보고 이르기를...

"경은 종실(宗室) 가운데 현명한 사람으로 집정하게 되었으니, 마침내 국가의 성대한 일이로다. 경이 촉(蜀, 四川)에 주재할 무렵 올렸던 주의(奏議, 의견서)는 아주 훌륭했던 바, 짐이 일찍이 그 책을 보았는데, <자치통감>과 더불어 나란히 통용할 수 있을 정도였소. 그가 성권(聖眷, 황제의 총애)을 입은 것이 이러하다."


4월 기유일, 사천 연변군현(沿邊郡縣)의 관전(官田)을 매각하는 것을 중지시켰다. 5월 병인일 초하루, 영주(永州)의 의보(義保)를 회복시켰다. 기사일, 예부진사(禮部進士) 진량(陳亮) 이하 급제자 출신 396명에 대해 포상을 내렸다. 황상이 절동(浙東)총관 강특립(姜特立)을 임안(臨安)으로 불렀다. 좌승상 유정(留正)은 강특립과 보조를 같이하지 못한데다, 자주 다투었기 때문에 재상직에서 사임하게끔 간청했으나, 황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자치통감을 거울삼아 치국(治國)의 방도를 터득한 송효종(宋孝宗)
                                           효종의 치세는 송대 최전성기로 '乾淳之治'라 찬사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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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宋代 중국 강역도(疆域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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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송(南宋) ・금(金) ・서하(西夏) 형세도(形勢圖), 1966년판 대만 중등교과서


                                                 남송중기(南宋中期) 대륙 형세도, 1979년판 중국역사부도집


                              1161년 11월, 송금(宋金)간 채석지전(采石之戰) 전개도, 1976년판 중화통사(通史)
                              강릉대첩 ・조어성 전투와 더불어 남송 3大 전승(戰勝)으로 거론되는 전투이다.


                                              남송 임안도성도(臨安都城圖, 杭州), 1979년판 중국역사부도집


                                           남송시대 중국~동남아간 육해상교통로, 1979년판 중국역사부도집


                                             1233~34년, 몽송(蒙宋)연합군의 대금정벌전(對金征伐戰) 전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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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일(宋日)무역 잡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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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320년에 걸친 송대(宋代)는 전체적으로 북송과 남송으로 구분된다. 일본에선 헤이안(平安) 중기~가마쿠라(鎌倉) 전기에 해당하는데, 송일(宋日) 양국간 공식적인 국교는 성립되지 않았지만, 민간 차원의 교류가 중단없이 꾸준히 지속되었다. 헤이안시대 말기, 보원(保元)의 내란을 기화로 국정 대권을 장악하게된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淸盛)는 대재부(大宰府) 차관으로서의 경력과 본거지인 세토내해(瀨戶內海) 항로의 잇점에 착안, 범국가적 차원에서 대송(對宋)교역을 활성화시켜 재정수입 증대와 문화수준 향상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현대의 효고현(兵庫縣)에 해당하는 섭진국(摂津國) 후쿠하라(福原), 즉 고베(神戶)시로 기요모리가 일시적이나마 천도(遷都)를 강행한 시기가 치승(治承)4년(1180). 그 이전부터 기요모리는 이곳에서 신도시를 건설해왔으며, 승안(承安)3년(1173)엔 고베의 외항(外港)격인 오와다노토마리(大輪田泊)를 수축한 바 있다. '외국인을 접견치 말라'는 불문율을 깨뜨리고, 반론을 무릅쓴 채 가응(嘉應)2년(1170) 9월, 고시라카와 법황(後白河法皇)을 후쿠하라로 초청해 송인(宋人)과 대면토록 주선한 것은 주목가는데, 2년후 효종(孝宗)황제가 보내온 선물이 도착했다.                

승안2년(1172) 9월 17일, 명주(明州)의 자사를 대리삼아 송효종이 고시라카와 법황과 기요모리에게 '하사'한 물품의 정확한 내역은 알 수 없지만, 이듬해 작성 ・초안된 반첩(返牒, 답서)에서 선물의 '미려(美麗)함과 진귀함'을 칭송한 점으로 짐작컨대, 도자기류의 공예품이었으리라 추정된다. 남송으로 반첩과 답례품을 보내면서 법황은 황금책장과 채색가죽 30장, 사금(砂金) 1백냥을, 상국(相國, 淸盛)은 일본도와 갑옷 따위를 기증했다. 한편, <송회요(宋會要)>에 따르면, 일본측의 국서 ・답례품은 그해 5월 임안(臨安) 조정에 전달되었다고 한다.
 
이 무렵부터 양국간 교역은 공적인 성향을 띄우게 되었으니, 다카쿠라 천황(高倉天皇)이 송나라 선박을 시찰하고자 몸소 효고까지 행차하는가 하면, 치승3년(1179) 2월 기요모리가 대륙에서 직수입된 <태평어람(太平御覽)> 서적을 천황에게 헌상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교역이라고는 하지만, 일본측이 대폭적 수입초과로 송전(宋錢)의 유입으로 말미암아 화폐경제 발달을 자극하는 동시에, 물가앙등을 초래해 사회불안을 야기시킨 단점도 있었다. 그래서, 일본 조정내에선 송전의 국내 유통을 중지해야 한다는 제안마저 심도있게 논의되기조차 했던 모양이다.

송대는 보통 '도자기의 시대'라고도 한다. 경덕진을 위시로 소위 '6大 명요(名窯)가 등장해 그 조형과 유색 및 장식은 최고의 경지에 이른 것이었다. 당시, 중국산 도자기의 수출범위는 일본과 동남아시아로부터 이집트에 이르기까지 광대하게 확장된 상태였다. 남송은 수출입에서 우세한 조건을 이용해 금(金)과 서하(西夏)에 대해서도 중개무역을 전개하였는데, 차(茶)와 향료, 도자기 등이 주종의 수출품목으로 북방에서 산출되는 축산품과 교환하는 식이었다. 그만큼 남송시대엔 다양한 종류의 상품들이 판매되었고, 객상(客商)또한 많았다.

남송시대에 들어와 강역이 동남연해로 치우치고, 세수원이 격감된 상황속에서 군비와 관봉, 황실의 지출은 여전히 막대하여 북송에 비해 조금도 감소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대외무역이 국가재정에서 점유한 비중감을 더더욱 강조하였다. 소흥(紹興)16년(1146) 9월 25일 반포된 고종(高宗)의 상유(上諭)에서도 '시박(市舶, 무역)의 이로움으로 국가재정에 뒷받침하니, 옛 법률에 따라 외국인을 초치, 재화와 상품을 통용'토록 훈시했던 것처럼 남송왕조는 무역 장려를 국시(國是)로 삼았으며, 무역항 천주(泉州)와 광주(廣州)가 번영한 것도 유명한 사실이다.

송일(宋日)무역을 재차 논하자면, 북송대엔 송선(宋船)의 주도로 전개된 '수동적 교역'이었던 반면, 남송으로 오면 항해술 발달에 힘입어 일본상선도 직접 대륙까지 건너가 활약하기 시작한 '능동적 교역'으로 변질된 점이 특징이다. 즉, 소흥15년(1145) 11월, 일본인 남녀(男女) 19명이 온주(溫州)에 도달했다는 중국측의 기록에서 처음 확인되는 바, 절강 연안으로 표류해 온 일선(日船)에 대해 식량을 제공해 준 사례만 10여차례 언급되고 있다. 특히, 이같은 추세가 헤이씨(平氏)정권 수립으로 교역진흥책이 추진되면서 가속화되었음은 물론이다.

일본의 대송(對宋)수출품으로서 이종(理宗) 보경(寶慶)연간에 작성된 <보경사명지(寶慶四明志)>에선 사금과 진주, 수은, 유황 등을 언급했으며, 그밖의 진상품이나 봉납품에 자주 이용된 마키에(蒔絵), 나전(螺鈿), 수정, 부채, 병풍, 일본도 등과 서국(西國)지방에서 산출하는 목재도 특산품으로서 각광받았다고 한다. 남송의 대일(對日)수출품으론 동전과 도자기, 비단, 문구(文具), 서적, 향료, 약품, 회화(繪畵) 등이 포함된다. 상술했듯이, 송전의 유입은 화폐경제 진전에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승려들의 빈번한 교류 ・왕래가 겸창불교에 미친 영향도 심대하였다.


                         헤이케(平家)의 근거지이자, 대송무역 전초기지였던 고베항(神戶港) 전경, 1974년 촬영
                         기요모리가 이곳으로 천도한 해, 요리토모(賴朝)는 관동(關東)에서 거병했다.
                        

                           고시라카와 상황(上皇)이 1164년 건조한 교토 연화왕원(蓮華王院)의 관음상, 1974년
                           양무제(梁武帝) 뺨칠 정도로 불심(佛心)이 깊다며 비아냥을 듣기도 했다.


                          일본 3대(大)절경의 하나인 히로시마만(灣) 이츠쿠시마 신사(嚴島神社), 1978년 촬영
                          1174년 봄, 고시라카와 법황(法皇)은 바닷길로 전격 방문해 참배 ・유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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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려(宋麗)관계 잡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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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宋)과 고려의 통교는 건륭(建隆)3년(962) 11월 개시, 양국은 비교적 친선관계를 유지하였다. 양국이 친선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이면에는 서로 상대방을 이용하려는 의도가 깔렸었기 때문이었다. 송과 고려는 모두 북방세력, 즉 거란의 압력하에 놓여 있었다. 뿐만 아니라, 쌍방은 국교를 유지함으로써 거란을 억제하려는 정치적 의도 역시 짙게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송은 국초(國初) 이래 문치주의를 채택한 결과, 국방이 약화된 상황이었다. 고려는 이같은 송측의 정치적인 욕구보단 경제 ・문화적 욕구에 관심을 가지고 접근했다. 저마다 속셈이 달랐기 때문에, 가능한 한 북방민족이 연루된 복잡한 분쟁에 휘말려들지 않으려는 조심스런 태도를 견지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통교 초기부터 찾아볼 수 있다. 5대시대 후진(後晉)이 건국될 당시, 석경당(石敬塘)은 거란의 원조를 받은 대가로 장성 이남의 연운(燕雲)16주를 할양했는데, 중국으로선 고토(故土) 수복의 열망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태평흥국(太平與國)4년(979), 송태종(宋太宗)은 중원통일의 여세를 몰아 연운16주를 탈환하려는 친정에 나섰으나, 도리어 고량하(高梁河)에서 대패하였다. 그후로도 실지회복의 기회를 엿보던 송은 거란에서 성종(聖宗)이 즉위한 것을 계기로 재차 군사를 일으켰다. 앞서 1년전인 옹희(雍熙)2년(985), 송은 고려에 한국화(韓國華)를 보내어 원병을 청하였던 바, 고려는 송의 요청에 마지못해 응하는 척 하였으나, 실제로 활동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거란이 강성해짐에 따라, 송려(宋麗)관계는 멀어지게 되었다. 순화(淳化)5년(994), 고려에 대한 거란의 1차 침입이 있자 이듬해 고려는 원욱(元郁)을 송에 파견하어 거란의 침략을 통보하는 동시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송은 북방국경이 겨우 편안해졌으니 경솔하게 군대를 동원할 수 없다며, 사신을 후대해 돌려보냈을 뿐이었다. 이때부터 송과의 관계가 사실상 단절된다. 거란의 압박으로 중단된 송과의 국교는 재개와 단절을 번복하다가, 문종(文宗)때 정식으로 재개됐다. 물론, 그동안 교류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고, 목종(穆宗)연간엔 여러차례 송에 사신을 파견한 일이 있었으며, 송으로 하여금 거란을 배후에서 견제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현종(顯宗)때부터 민간교역이 시작되어 문종22년(1068)까지 56년간 총 50회에 걸친 송상(宋商)의 고려 내항(來航)이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송려(宋麗) 양국이 거란 때문에 정치적 관계는 중단되었을지라도, 통교의 필요성은 공유했었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처럼 통교의 필요성을 느꼈지만 정치적인 접촉은 드물고, 민간교역만이 전개되어간 이유는 송이 한반도 문제에 개입하기를 극력 회피했기 때문인데, 고려측에서도 성종 이후로 대외정책에 점차 소극적이고, 내치에 역점을 두었던 까닭이라 여겨진다. 이같은 상황속에 송에서는 신종(神宗)이 즉위하면서 고려와의 국교를 재개해 거란을 견제하려는 연려대요책(聯麗對遼策)이 새삼 대두됐다.

희녕(熙寧)원년(1068), 송나라는 상인 황신(黃愼)을 고려로 파견해와 복교를 요구했다. 이에 고려는 3년후, 민관시랑 김제(金悌)를 단장으로 한 사절단을 송에 파견함으로써 양국간 국교는 다시금 열리게 되었다. 예종대(代)에 이르러 고려에 대한 송의 친선태도가 더욱 깊어졌으니, 송휘종(宋徽宗)은 고려 사신의 지위를 국신사(國信使)로 높이는가 하면, 접대에 있어서도 서하(西夏)위에 두어 거란 사신과 마찬가지로 추밀원(樞密院)에서 담당토록 했을 정도였다. 다만, 서기 916~1125년 요조(遼朝)의 존속기간 고려가 파견한 사절만 173차례, 거란이 파견해 온 사절은 212차례에 달했던 여요(麗遼)관계에 비하면, 송과의 사절교환 횟수는 현저히 줄어든 것이었다.

한동안 지속되던 대송(對宋)관계는 북방정세의 급변으로 변질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주에서 흥기한 금(金)은 진출 예봉이 중원으로 향했던 만큼, 송을 거란보다 더욱 강하게 압박하였다. 여진이 흥기하자, 송은 금과 동맹하여 숙적 거란을 협공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고려에 그 중재를 맡아주도록 요청하였다. 정강(靖康)원년(1126) 7월, 송은 후장(侯章) 등을 파견해와 금군(金軍)이 개봉(開封)을 위협중인 사실을 환기시키면서, 공수동맹을 제안하기에 이른다. 당시, 고려는 대금사대(對金事大)를 결정한 직후였으므로, 여러가지 사정을 들어가며 송측의 제안을 거절해버렸다. 국제정세가 매우 미묘해진 가운데, 가도(假道)문제로 대송관계는 한층 복잡성을 띄기 시작했다.

건염(建炎)2년(1128) 6월, 송은 국신사 양응성(楊應誠)을 보내와 포로로 잡혀간 휘종과 흠종(欽宗)을 구출하기 위해 국신사가 금에 가서 교섭할 수 있도록 고려측이 길을 빌려주고, 또한 금나라 국경까지 안내해 주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고려는 '여진족이 싸움을 좋아하여 전부터 고려가 송과 가까운 것을 미워했으며, 지금에 와서는 국경지역에 성(城)을 수리하고, 군사를 집결시켰는데 송에 길을 빌려주어 그 사절이 여진 땅에 들어간 것을 알면, 반드시 전쟁을 일으켜 침공할 가능성'을 지적하는 등 여러가지 사정을 들어대가며 거절해버렸다. 현실적인 시각에서 고려는 송과 합작하는 대가로 새로이 흥기한 금의 미움을 살 필요따윈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고려의 등거리외교, 중립적 태도로 말미암아 송려(宋麗)관계는 급속도로 경색된 결과를 초래하였다. 북송대 거란과 항쟁한 시기와는 달리, 남송과 금의 대립시기엔 상술했듯이 북방으로부터의 위협이 강화되고, 금과 고려의 관계가 밀착된데다, 지리상으로도 멀리 떨어지는 바람에 고려와 남송간의 관계는 크게 후퇴하였다. 예컨대, 북송시대에만 양국간 총 87차례의 사절교환이 확인되는 반면, 남송시대로 오면 13차례로 격감되고 그나마 송효종(宋孝宗) 이후론 완전히 끊어졌다. 심지어 융흥(隆興)2년(1164) 4월, 고려 사신 조동희(趙冬曦)가 도착했는데도 의혹적으로 바라본 남송 조정은 사절의 교환을 중지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 접견마저 거부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마침내 경원(慶元)4년(1198), 송상(宋商)이 동전을 소지한 채 고려에 왕래하는 것을 금(禁)한다는 방침이 내려졌다. 이는 사실상, 송인(宋人)의 고려 입국 자체를 금지시킨 것으로, 남송 조정이 공식 차원에서 대(對)고려 국교단절을 선언한 셈이나 다름없었다. 대신, 남송은 일본 ・안남(安南, 베트남)과의 교역 촉진과 관계 긴밀화를 도모함으로써 새로운 외교 파트너를 물색하였으니, 효종황제가 일본황실에 선물을 보낸 것이나, 안남왕(安南王)에 대한 책봉을 승인해주었던 것도 그러한 전환외교의 연장선상이라 볼 수 있다. 북방왕조로부터의 영향에 노출되고, 사대관계를 맺은 고려가 북방문제에만 신경을 곤두세워 최대한 비중을 두게된 것은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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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사(金史) 태조본기(太祖本紀) (1), 擧兵 前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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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太祖) 응건여운소덕정공인명장효대성무원황제(應乾與運昭德定功仁明莊孝大聖武元皇帝)의 휘(諱)는 민(旻), 본래는 아골타(阿骨打)라 하였고, 세조(世祖) 핵리발(核里鉢)의 둘째아들이다. 모친은 가로되, 익간황후(翼簡皇后) 나라씨(拏懶氏)였다. 요도종(遼道宗) 시기, 5색(五色) 운기(雲氣)가 자주 동방에 나타나 약 2천곡(斛) 크기의 곳간과 같은 모습이었다. 사천(司天, 천문가) 공치화(孔致和)가 몰래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그밑에 기이한 인물이 나타나, 비상한 일을 이룩하리라. 하늘에서 이렇게 알리는 것으로 사람의 힘으론 어찌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요나라 함옹(咸雍)4년(1068) 무신(戊申) 7월 1일에 금태조(金太祖)가 태어났다. 어렸을 때,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며 힘이 여럿을 합칠 정도였고, 행동거지가 단정했으므로 핵리발은 아골타를 매우 총애하였다.

핵리발이 야작수(野鵲水)에서 납배(臘碚), 마산(麻産)과 싸우다 네 군데 창(槍)에 찔려 병으로 고생했으니, 아골타를 무릎위에 앉혀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 아이가 잘 성장한다면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10세 때, 궁술을 좋아하였고, 성장하면서 활쏘기에 능했다. 하루는 요나라 사신이 부중(府中)에 앉아 아골타의 활과 화살을 보고선 새들을 쏘도록 시켰는데, 세 발 모두 명중시켰다. 요나라 사신은 놀라워하며 '기이한 사내아이로구나!'라고 말했다. 아골타가 일찍이 흘석열부(紇石烈部) 활리한가(活離罕家)의 연회에 갔는데, 문밖으로 나가 남쪽에서 높은 언덕을 보며 사람들에게 활을 쏘도록 했으나, 모두 도달하지 못했다. 아골타는 한 발에 그곳을 제꼈고, 320보(步)가 넘었다. 종실(宗室) 만도가(謾都訶)가 가장 멀리 쏘았지만, 그래도 아골타보다 1백보 뒤떨어진 곳이었다.

천덕(天德)3년(1151), 사비(射碑)를 세워 이 사실을 기록하였다. 핵리발이 복회(卜灰)를 토벌할 때, 아골타는 사불실(辭不失)로 하여금 따라가기를 청했다. 핵리발은 허락해주지 않았으나, 내심 기특하게 여겼다. 오춘(烏春)이 죽자, 와모한(窩謀罕)은 화의를 청하였다. 화의가 이루어진 후 다시 공격해오자, 마침내 그 성(城)을 포위했다. 아골타의 나이 23세로 이때 단갑(短甲)만 입고, 투구는 내벗은 채, 말도 타지 않으며 달려가 여러 군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성중(城中)에서 이를 보고, 그가 아골타임을 눈치챘다. 장사(壯士) 태욕(太峪)이 준마(駿馬)를 타고, 성밖으로 나와 아골타를 찌르고자 달려들었다. 아골타가 미처 방비하기에 늦었던 찰나, 외삼촌 활랍호(活臘胡)가 뛰쳐나와 태욕을 공격했고, 창은 명중되어 그의 준마를 찔렀으며, 태욕은 간신히 위기를 면했다.

일찍이 사홀대(沙忽帶)가 진영에서 나와 살략(殺略)했는데, 핵리발은 이 사실을 미처 몰랐었다. 그리고, 아골타가 귀환하려고 하자 적(敵)은 많은 병사로 추격해왔다. 아골타는 홀로 애항중(隘巷中)까지 갔으나 길을 잃고, 추격자가 늘어나 상황이 급박했다. 사람 키 정도의 벼랑과 마주쳤지만, 아골타의 말이 단번에 뛰어넘자 따라오던 추격자들은 이내 되돌아갔다. 핵리발이 중병으로 앓아 누웠다. 그 일로 말미암아, 아골타는 요나라 통군사(統軍司)에 보고하러 가게 되었다. 아골타가 떠나려하자, 핵리발은 주의를 주며 '너는 신속히 일을 마무리짓고, 5월 중순까지 돌아와야만 내가 너를 볼 수 있겠구나'라고 말했다. 아골타는 갈로소고(曷魯騷古) 통군을 만나 일을 마치고, 핵리발이 서거하기 전날에 돌아왔다. 핵리발은 아골타가 온 것을 보고, 청한 일이 모두 뜻대로 성사되었음을 알았다.

핵리발은 매우 기뻐하여 아골타의 손을 잡으면서 영가(盈歌)에게 '오아속(烏雅束)은 부드럽고 착하니 이 아이만이 거란과의 관계를 처리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영가도 아골타를 중시해 외출시에는 반드시 동행토록 하고, 아골타가 멀리 나갔다가 돌아오면 직접 맞이하였다. 핵리발이 이미 납배를 사로잡은 후에도 마산(麻産)은 여전히 직옥개수(直屋鎧水)를 점거하고 있었다. 파자숙(頗剌淑)은 아골타로 하여금 먼저 마산의 가족을 잡아오도록 하였고, 영가는 직옥개수를 포위했다. 아골타가 군사들과 합류하여 직접 마산을 사로잡아 그의 수급을 요나라에 바쳤다. 요나라는 아골타를 상온(詳穩)에 임명하고, 영가와 사불실, 환도(歡都) 역시 임명해주었다. 세월이 흘러, 아골타는 니방고부(泥厖古部)의 발흑(跋黑), 파립개(播立開) 등을 토벌하고자 부대를 편성했다.

달도아(達塗阿)를 향도(鄉導)로 삼아 밤중에 수수(帥水) 연변을 따라 그들을 습격하여 처자를 사로잡았다. 애초에, 온도부(溫都部)의 발특(跋忒)이 당괄부(唐括部)의 발갈(跋葛)을 죽이자, 영가는 아골타에게 이를 토벌토록 하였다. 아골타가 인사차 찾아가 영가에게 '어젯밤 상서로운 조짐을 보았으니, 반드시 적을 무찌를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출발했다. 그 해엔 큰 눈이 내렸고, 추위가 심하였다. 아골타는 오고론부(烏古論部) 군사와 함께 토온수(土溫水)를 따라가며 말린향(末鄰鄉)을 통과했고, 발특을 아사온산(阿斯溫山)과 북락(北濼) 사이까지 추격하여 발특을 죽였다. 군사가 귀환하자, 영가는 친히 애건촌(靄建村)으로 나가 아골타를 영접하였다. 살개(撒改)는 도통(都統)으로서 유가(留可)를 토벌하고, 만도가(謾都訶)는 석토문(石土門)과 더불어 적고덕(敵庫德)을 토벌하였다.

살개가 장수들과 상의한 결과, 어떤 자는 먼저 변방 부락의 성보(城堡)를 평정하자고 했으며, 어떤 자는 즉시 유가의 성을 공격하자고 주장하며 결론이 나질 않았으므로 아골타의 의견을 듣기로 하고, 군중(軍中)에 들어갔다. 영가는 아골타에게 가도록 하면서 '무슨 사태가 일어날 듯 한데, 의심스럽다. 출발하지 않은 군사들 가운데 갑사(甲士) 70이 남아있으니, 모두 너에게 주도록 하마'고 하였다. 만도가는 미리미석한성(米里迷石罕城) 아래에 있었지만 석토문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현지 주민들이 만도가를 잡아 적에게 넘기려 하니, 사절이 돌아와 사퇴전(斜堆甸)에 주둔한 아골타를 만나 급히 전하였다. 아골타가 말하기를, '국병(國兵)은 모두 이곳에 있다. 적들이 먼저 만도가를 죽이고 만다면, 나중에 여러명의 적들을 죽여봤자 무슨 이득이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갑사 40명을 나누었다. 아골타는 30명을 인솔하여 살개의 진영으로 갔다. 도중에 사람을 만났는데 그자는 '적들이 이미 분닉령(盆搦嶺) 남로(南路)에 있다'고 말했다. 많은 이들이 사편령(沙偏嶺)을 경유하여 가기를 원했다. 아골타가 '너희들은 적을 두려워하는게냐?'라며 힐난했다. 분닉령을 지났음에도 적은 보이지 않았고, 이미 그들은 사편령을 지키며 아군과 맞서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도착하자마자, 살개의 군은 밤중에 기습에 나서 새벽녘에 적을 격파하였다. 이때, 유가와 오탑(塢塔)은 요나라로 달아났다. 유가를 격파하고 돌아와서 오탑의 성을 공격하자, 성중(城中)의 사람들이 성을 바치며 투항했다. 처음 아골타가 분닉령을 지나 오탑의 성 아래를 통과할 때, 뒤따르던 기병으로 후방에 배치되던 자들이 있었는데, 오탑성 사람들이 그들을 공격하여 솥을 빼앗았다.

아골타가 말을 멈추고 이들을 불러 '우리의 식기(食器)를 가져가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 중 한 사람이 '공(公)께서는 이곳에 잘 오셨습니다. 식사할 수 없을까 무슨 걱정이라도 하시는지요?'라며 기만하여 말했다. 아골타는 채찍으로 그 자를 가리키며 '유가를 쳐부수고 나면, 네놈부터 잡아들일 것이야'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자는 솥들을 아골타의 앞으로 가지고 오면서 '누가 감히 상온님의 그릇을 가져가 망가뜨리겠습니까?'라고 했다. 포가노(蒲家奴)로 하여금 사도(詐都)를 초유시켰고, 사도가 항복하니 아골타는 그를 석방시켜 주었다. 영가가 소해리(蕭海里)를 토벌하고자 병사를 모집해 1천여명을 얻었다. 여진 병사가 1천에 이른적이 없었는데, 천여명에 달하자 아골타는 용기 충만하여 '이런 갑병(甲兵)이 있으니, 무슨 일인들 도모하지 못하겠는가?'라고 말했다.

소해리가 공격해오자 아골타는 요군(遼軍)과 합류하였는데, 요나라 군사들을 물리도록 하고선 여진족 병사만으로 전투에 나섰다. 발해유수(勃海留守)가 아골타에게 갑옷을 내렸지만, 아골타는 이것도 받지 않았다. 영가가 어째서 갑옷을 받지 않았냐며 아골타에게 물었다. 아골타는 '그 갑옷을 입고 승리하더라도, 요나라 덕분에 성공했다고 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목종(穆宗, 盈歌)말년, 여러 부족들에 명령을 내려 멋대로 신패(信牌)를 만들어 역참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였고, 이때부터 호령(號令)이 일체화되었는데, 모두 아골타의 건의로 행해진 것이다. 강종(康宗, 烏雅束)7년(1109), 그해엔 작황이 좋지않아 백성들 다수가 굶주려 유랑했고, 강한 자는 도적이 되었다. 환도(歡都) 등은 법으로 엄중히 대처하여 도적에 대해서라면, 모두 사형에 처하기를 바랬다.

아골타가 이르기를, '재물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재물이란 어차피, 사람의 능력으로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라며 반대하였다. 그리하여 배상법을 완화시켜 훔친 재물에 대해선 3배가량 배상토록 하였다. 백성 가운데 빚이 연체되어 처자식을 팔아도 상환하지 못하는 자가 있었으니, 오아속은 관속(屬會)들과 의논하였는데, 아골타가 바깥 마당에서 비단을 막대기에 묶고, 그 무리를 지휘하며 명령을 내렸다. '지금 가난한 자는 자활(自活)이 불가능한고로, 처자식을 팔아 빚을 갚는 실정이다. 골육지간의 애정은 인지상정 아닌가?! 지금부터 3년간 가난한 자에게서 세금을 거두지 말라. 3년후에 다시금 천천히 생각해보마'라고 하였다. 모두가 그 명령을 듣고 감동했으며, 이로부터 아골타에 대하여 멀리서나 가까이서나 심적으로 귀부하게 되었다.

계사년(癸巳年, 1113) 10월, 오아속은 꿈속에서 이리를 쫓으며 여러차례 쏘았으나 명중시키지 못했는데, 아골타가 앞으로 나아가 이를 명중시켰다. 다음날 아침, 꿈의 내용을 신료들에게 물어보자 그들은 '길조(吉兆)입니다. 형님이 얻지 못한 것을 아우가 얻는다는 뜻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달 29일에 오아속이 서거하자, 아골타는 도발극렬(都勃極烈) 지위를 세습받았다. 요나라 사신 아식보(阿息保)가 와서 '어째서 오아속이 죽었다는 사실을 고(告)하지 않았는가?'라고 추궁했다. 아골타는 '상(喪)을 당했건만 조문은 하지 않고, 죄부터 묻습니까?'라며 대꾸했다. 어느날, 아식보가 재차 부락으로 와서 말위에 탄 채 오아속의 빈소에 이르러 부조(扶助)로 들어온 말을 살펴보더니, 그것을 가지려 하였다. 아골타가 노하여 아식보를 죽이려 하자, 종웅(宗雄)이 충고하여 그만두었다.

나중에 요나라의 명령은 더이상 여진 부락에까지 이르지 않았다. 요나라 주군(主君, 天祚帝)은 사냥을 좋아하였고, 음탕하고 술에 빠져 정사(政事)를 등한시했으며, 사방에서 상소가 올라와도 자주 열람하지 않았다. 목종 영가시대, 완안부(完顔部)에 반항했던 흘석렬아소(紇石烈阿疏)는 이미 요나라로 달아났다. 영가가 아소의 성(城)과 주민들을 차지하니,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아소의 족제(族弟)인 은출가(銀朮可)와 사리한(辭里罕)은 남강(南江)에 거주하는 혼도복속(渾都僕速)과 은밀히 연락을 취하여 고려(高麗)로 달아나고자 하였다. 일이 발각되자 아골타는 협고살갈(夾古撒喝)에게 그들을 사로잡아 오도록 지시했는데, 나중에 은출가와 사리한은 요나라 병사에 붙잡혔고, 혼도복속은 벌써 도망해버려 협고살갈은 그의 처자들만 잡아 귀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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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사(金史) 태조본기(太祖本紀) (2), 蹶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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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太祖)2년(1114) 갑오(甲午) 6월, 아골타가 혼동강(混同江, 송화강)의 서안(西岸)에 도착하자 요나라는 사자를 보내와 절도사직의 세습을 허락한다고 통보했다. 애초에, 요나라는 매년 사신을 파견해 바닷가[연해주 방면]에서 해동청(海東靑, 사냥매)을 구입했는데, 도중에 여진 부락의 경내를 통과하는 사신은 탐욕스러운데다 제멋대로여서 공사(公私)가 모두 고생하고, 싫어하였다. 소해리(蕭海里)를 토벌하였을 때부터 여진인들은 요나라에 대해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오아속(烏雅束)은 일찍이 흘석렬아소(紇石烈阿疏)를 송환하지 않는다는 구실로 사신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아골타가 절도사를 세습받고 나자 포가노(蒲家奴)를 파견해 거듭 아소의 송환을 요구하였고, 이상의 두가지 문제는 요나라가 멸망하고 나서야 해결될 수 있었다. 여기에 이르러, 종실(宗室)의 습고내(習古乃)와 완안은출가(完顏銀朮可)를 파견해 요나라에 다시금 아소의 송환을 요구했다.

습고내 등이 돌아와 요나라 군주가 교만방자하여 해이해졌다고 알려주었다. 그리하여 관헌과 원로들을 소집하여 요나라를 정벌할 것을 알렸으며, 요충지 방비와 성보(城堡)의 건축, 병장기 수리를 지시한 한편, 명령을 기다리도록 하였다. 요나라 통군사는 소식을 듣고, 절도사 열가(涅哥)를 파견하여 '너희는 다른 속셈이 있는 것이냐? 병장기를 수리하고, 수비 태세를 갖추는 모습이 누구를 방어하려는 뜻인가?'라고 물었다. 아골타는 '위험에 대비해 스스로를 방어하고자 함인데,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요나라가 아식보(阿息保)를 보내와 다시금 추궁하자, '우리는 소국(小國)으로 대국(大國)을 섬기는데 무례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대국이 덕(德)을 베풀지 않고, 도망자를 숨겨주며, 도량이 좁으니 무엇을 기대한단 말입니까? 만약, 아소를 저희에게 넘겨주신다면, 조공을 바칠 것입니다. 아소를 아직 잡지 못했는데 어찌 양손이 묶인 채 통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라며 반박하였다.

아식보가 돌아가자 요인(遼人)들은 수비를 갖추기 시작했으며, 통군사 소달불야(蕭撻不野)에게 군사들을 영강주(寧江州, 길림성 부여현)에서 징발하도록 명령하였다. 아골타가 이 소식을 듣고, 복괄자(僕聒剌)를 요나라에 파견해 또다시 아소의 송환을 요구했는데, 사실은 현지의 국내 사정을 정탐하기 위함이었다. 복괄자가 돌아와 말하기를, '요나라 병사들은 많아서 숫자조차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아골타는 '그들은 처음 병력을 징발했는데, 어떻게 이토록 빨리 소집할 수 있단 말인가?'라며 호사보(胡沙保)를 파견하고, 그가 돌아와서 요군(遼軍) 병력이 4원(四院) 통군사와 영강주 주둔군 및 발해인(勃海人) 8백명 뿐이라고 보고하였다. 아골타는 '과연 내가 말한대로다. 요인들은 우리가 거병하려는 것을 눈치챘고, 각 로(路)의 군사들을 집결시켜 경계하고 있으니, 반드시 우리가 먼저 공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제압당한다'며 제장(諸將)들에게 말했다.

모두가 '좋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아골타는 선정황후(宣靖皇后, 肅宗 頗刺淑의 미망인)께 인사드리며 요나라를 정벌한다는 사실을 아뢰었다. 황후가 말하기를, '너는 부형(父兄)께서 일으켜세운 가문을 물려받았다. 가능하다고 보여지면 떠나거라. 나는 늙었으니, 걱정하지 마라. 네가 굳이 여기까지 오지 않아도 괜찮건만.' 아골타는 감읍하여, 장수를 기원드리며 잔을 올렸다. 곧바로 황후를 모시고 제장들과 함께 문밖으로 나와 동쪽을 향해 술잔을 올리면서, 요인들이 교만해 아소를 송환하지 않아 거병한다는 뜻을 황천후토(皇天后土, 天地神明)께 알렸다. 제사가 파하자, 황후는 아골타에게 정좌(正坐)하도록 명하고, 부하들과 더불어 한 잔을 나누고선, 각 부락에 출전 명령을 하달했다. 파로화(婆盧火)에겐 이라로(移懶路)의 적고내병(迪古乃兵)을 소집하도록 하고, 알로고(斡魯古)와 아로(阿魯)에겐 알홀(斡忽) ・급새(急賽) 양로(兩路)의 요적(遼籍, 요나라 국적) 여진인을 회유하도록 지시했다.

실불질(實不迭)에겐 완도로(完睹路)에 가서 요나라의 장응관(障鷹官)으로 달로고부(達魯古部) 부사(副使)인 사열(辭列)과 영강주 발해(勃海)의 대가노(大家奴)를 잡아오도록 명하였다. 그러자, 달로고부의 실리관(實里館)이 와서 '요나라를 친다며 거병하셨다는데, 우리네 부락은 누굴 따라야 합니까?'라고 물었다. 아골타는 '우리 군사는 적지만 오래된 나라이고, 너희와 경계를 접했으니 응당 우리들을 따라야지. 만약 요인들이 두렵거든, 알아서 떠나거라'라고 대답하였다. 요나라 천경(天慶)4년(1114) 9월, 아골타가 군사를 인솔해 영강주로 진군(進軍)하였고, 요회성(寥晦城, 흑룡강성 하얼빈시 서남쪽)에서 숙영했다. 파로화가 병사 소집이 늦어지는 바람에 아골타는 그에게 장(杖)을 치고, 다시 보내어 군사를 지휘하게 하였다. 각 로(路)의 군사들이 모두 래류수(來流水)에 집결하자, 2천 5백명에 달했다. 도강에 임하여 아골타는 요나라의 죄악을 천지(天地)에 고하며 호소하였다.


"대대로 요나라를 섬겨왔고, 직무와 조공에 충실했으며, 오춘(烏春)과 와모한(窩謀罕)의 반란을 평정하고, 소해리(蕭海里) 무리를 격파하는 등 공적이 있는데, 침략과 모욕은 가중되었습니다. 거듭 요청했지만, 죄인 아소(阿疏)를 돌려보내지 않았습니다. 지금, 요나라의 죄를 묻고자 하니 천지신명께선 도와주시옵소서!"


마침내 제장들에게 방망이를 나누어주어 맹세할 것을 명령하고, '너희들은 한마음으로 최선을 다하거라. 공(功)을 세운 자라면 노비와 부곡(部曲, 천민)은 양민으로 삼고, 서인(庶人)은 관리로 기용하며, 이미 관리인 자는 진급시켜 공적자의 평가는 중요함의 여부를 가릴 것이다. 혹여나, 맹세를 위반하는 자는 방망이로 맞아죽을 것이고, 가족들 역시 용서받지 못할 것이리라!'고 말했다. 당괄대알갑(唐括帶斡甲)에서 숙영하였다. 여러 군사가 액운을 물리치는 화살을 쏘았으며, 갑옷을 입고 도열하자 발과 창위로 열화처럼 밝은 광채가 보였다. 사람들은 이를 출병의 상서로운 조짐이라 여겼다. 다음날, 찰지수(紮只水)에서 숙영하는데 처음과 같은 광채가 보였다. 요나라 경계에 도달할 무렵, 아골타가 종간(宗幹)에게 군사를 지휘해 도랑을 평탄하게끔 만들었다. 도랑을 건너 발해군(勃海軍)과 마주쳤는데, 여진군의 좌익 7모극(七謀克)을 공격하면서 소수가 후퇴하자, 직접 중앙군쪽으로 쳐들어왔다.

사야(斜也)가 출전하고, 철질(哲垤)이 선두에 앞장섰다. 아골타는 '전투를 가벼이 여겨선 안된다'라며 종간을 파견해 그들이 선두에 나서는 것을 제지시켰다. 종간이 사야 앞으로 달려가 철질의 말을 가로막고, 사야와 함께 돌아왔다. 적들이 이를 추격해왔는데, 야율사십(耶律謝十)이 말위에서 떨어지자 동료 거란인이 앞에서 구해주었다. 아골타가 이를 보고선 그자를 쏘아 쓰려뜨렸고, 사십도 동시에 명중시켰다. 다른 기병이 돌격해오자, 다시 명중시켜 가슴을 관통했다. 야율사십이 화살을 뽑고 달아나자, 그를 추격하여 활을 쏘아 맞추었고, 등의 절반까지 파고들어가 사십은 쓰러져 죽었다. 아골타는 사십의 말을 빼앗았다. 종간과 몇몇 기병들이 요군(遼軍) 중앙으로 들어갔다 포위당하자, 아골타가 구원하며 투구마저 벗은 채 싸웠다. 누군가 옆에서 화살을 쏘아 아골타의 이마를 스쳤다. 아골타는 자신을 쏜 자를 돌아보고 단발에 쓰러뜨렸다. 그러고는 장사(將士)들에게 외쳤다.


"적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물리쳐라!!"


무리가 이에 따랐고, 용기 충만하였다. 적들은 대부분 도주해 서로 짓밟혀 죽은 자만 17~18명이었다. 살개(撒改)는 다른 길에 있었고, 전투에 참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을 보내어 그에게 승리한 사실을 알렸으며, 야율사십의 말을 하사했다. 살개는 아들 종한(宗翰)과 완안희윤(完顏希尹)을 보내와 축하해주었고, 아골타에게 황제를 칭해 즉위할 것을 권하였다. 아골타는 '한 번 싸우고 이겼다며 황제를 칭했다간 남들에게서 천박하다는 비웃음만 살 뿐이다'라고 말했다. 영강주로 진군하여 해자를 메우고, 그 성을 공격하였다. 요나라 병사들이 동문(東門)에서 나왔는데, 온적흔(溫蒂痕)과 아도한(阿徒罕)이 공격해 모조리 죽였다. 10월 초하루날, 성을 함락시켜 방어사 대약사노(大藥師奴)를 사로잡아 비밀리에 그로 하여금 요나라 사람들을 회유하도록 지시했다. 철려부(鐵驪部)가 축하 선물을 보내왔다. 래류수(來流水)에서 숙영하고, 장군과 병사들에게 전리품을 나눠주었다.

발해인 양복(梁福)과 알답자(斡答剌)를 불러 거짓으로 도망가도록 사주하고, 그곳 사람들을 회유시켰는데 '여진과 발해는 본래 한 집안이다. 나[아골타]와 군사들이 죄악을 응징하고자 하니, 허물없는 자는 해지지 않을 것이다'라며 선전했다. 완안누실(完顏婁室)에게 요적(遼籍) 여진을 회유하도록 명했다. 완안부로 귀환해 선정황후를 알현하고, 전리품을 종실과 원로들에게 바쳤으며, 실리관(實里館)은 나머지 재물을 병사들에게 분배해주었다. 처음으로 제로(諸路)에 명하여 3백호(戶)를 모극(謀克), 10모극을 맹안(猛安)으로 지정하였다. 수알(酬斡) 등이 참모수(讒謀水)의 여진 부락을 위무해 평정시켰다. 별고(鱉古) 추장이 호소로(胡蘇魯)의 성을 가지고 항복해왔다. 11월, 요나라 도통(都統) 소규리(蕭糺里)와 부(副)도통 달불야(撻不野)가 보병 ・기병의 10만 병사들을 이끌고 압자하(鴨子河, 길림성 부여현 북쪽) 북쪽에 집결하였다. 아골타가 스스로 장수가 되어 이들을 요격하고자 하였다.

압자하에 도착하기 전에 날이 어두워져 아골타가 잠자리에 드려는데, 누군가 목 부위를 세 차례 가리킨 듯 하였다. 아골타는 깨어나 '신명(神明)께서 내게 경고하시는구나!'라고 말했다. 즉시, 북을 울리고 횃불을 들면서 진격했다. 날이 밝아올 무렵 강가에 이르렀고, 요나라 병사가 능도(淩道)를 무너뜨리려 하자 장사(壯士) 10명을 선발해 그들을 공격하여 쫓아내버렸다. 대군(大軍)은 계속 진격하여 강언덕에 올라갔다. 갑사(甲士)는 3천 7백명이었는데, 셋중의 1할만이 도달했다. 갑자기 출하점(出河店, 흑룡강성 조원 서남쪽)에서 적과 마주쳤는데 큰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먼지가 하늘을 뒤덮으니 풍향에 따라 적들을 공격하여 요군은 붕괴되었다. 추격하여 알론락(斡論濼)에 이르렀고, 죽인 적병(敵兵)의 수급(首級)과 포로 및 수레와 말, 갑병(甲兵)과 진귀한 물건을 수없이 많이 노획하여 관속(官屬) 장병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었으며, 하루종일 전승기념 잔치를 베풀었다.

요나라 사람이 말하기를, 여진 병사가 1만에 달하면 감당할 수 없다고 하였으니 이때 처음으로 1만에 달했다 한다. 알로고(斡魯古)가 요군을 격파해 절도사 달불야를 참수했다. 복회(僕虺) 등이 빈주(賓州, 길림성 농안현 동북쪽)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올야(兀惹)의 추골실(雛鶻室)이 항복했다. 요나라 장수 적구아(赤狗兒)가 빈주에서 싸웠으나, 복회와 혼출(渾黜)에게 패배당했다. 철려왕(鐵驪王) 회리보(回離保)가 휘하 부락을 인솔하여 항복해왔다. 오도보(吾睹補)와 포찰(蒲察)이 재차 적구아와 소을설(蕭乙薛)의 요군을 장주(祥州) 동쪽에서 패배시켰다. 알홀(斡忽)과 급새(急塞)가 항복했다. 알로고가 함주(鹹州, 요녕성 개원현) 서쪽에서 적을 패배시키고, 요나라 통군 실루(實婁)를 진영에서 참수했다. 완안루실(完顏婁室)이 함주를 점령했다. 이달, 오걸매(吳乞買, 훗날의 金太宗)와 살개, 사불실(辭不失)이 관리와 제장(諸將)을 데리고 즉위할 것을 권하며, 존호(尊號)를 올리게끔 청했다.

아골타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아리합만(阿離合懣)과 포가노(蒲家奴), 종한(宗翰) 등이 진언해 '이미 대공(大功)을 세웠는데도 칭제(稱帝)하지 않으면, 천하의 마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아골타가 '차차 생각해보겠다'고 대답했다. 수국(收國)원년(1115) 정월 임신일 초하루, 군신들이 존호를 올렸다. 이날, 아골타는 황제로 즉위하였다. 황상(皇上, 金太祖 阿骨打)께서 '요나라는 빈철(賓鐵)로부터 국호(國號)를 정했는데, 그것의 견고함을 취한 것이다. 빈철은 견고하지만, 종국엔 녹이 슬어버리니 오로지 금(金)만이 변치않고, 녹슬지도 않는다. 금의 색깔은 흰색인데, 완안부는 흰색을 숭상한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국호를 대금(大金), 연호를 수국이라 제정했다. 1월 병자일, 황상이 친히 황룡부(黃龍部, 길림성 농안현)를 공략하고자 진격하여 익주(益州, 농안현 북쪽)에 이르렀다. 익주 사람들이 황룡부를 방어하려고 달아나자, 남아있던 주민을 잡아서 귀환해왔다.

요나라에서 도통 야율와리타(耶律訛里朵)와 좌부통(左副統) 소을설(蕭乙薛), 우부통(右副統) 야율장노(耶律張奴), 도감(都監) 소사불류(蕭謝佛留)를 파견하여 기병 20만과 보병 7만으로 변경을 방어하도록 했다. 황상은 완안루실과 은출가(銀朮可)에게 황룡부를 지키도록 하고, 병사들을 인솔하여 달로고성(達魯古城)으로 향하던 도중에 영강주 서쪽에서 숙영했다. 요나라 사신 승가노(僧家奴)가 찾아와 화의를 논했는데, 국서(國書)엔 황상의 이름이 빠졌으며, 속국처럼 취급하였다. 경자일, 군사를 진군시키는데, 둥근 모양의 화광(火光)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황상이 보고선 '좋은 조짐이다. 하늘이 도와주시리라!'고 하였다. 하얀 물을 부어 제사를 드리자, 제장과 병사들은 기뻐하여 날뛰지 않는 자가 없었다. 나아가 달로고성에 가까워지자, 황상은 높은 곳으로 올라가 적진을 관찰했다. 요나라 병사들을 바라보니, 구름이 관목(灌木)에 늘어선 듯한 모습으로 황상이 뒤돌아 좌우에게 말하였다.


"요나라 병사는 두 마음을 품고 있는데다, 겁먹었으니 숫적으로 우세할지라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이어서, 높은 언덕으로 달려가 진영을 갖추었다. 종웅(宗雄)이 우익군(右翼軍)을 거느리고 요나라 좌군(左軍)에게 질주하자, 적병이 후퇴하였다. 진영 뒤에서 아군의 좌익군이 출동하자, 요나라 우군(右軍)은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완안루실과 은출가가 요나라 주력군과 충돌하여 9차례에 걸쳐 적진까지 들어갔다가, 총력을 다해 싸우고 물러났다. 종한이 중군(中軍)에 지원을 요청해오자, 황상은 종간(宗幹)을 파견해 위장병 노릇을 하도록 시켰다. 종웅은 이미 승리하여 요나라 우군을 공격하였고, 요군이 드디어 패배했다. 승리하자, 계속 추격하여 적의 진영까지 도달했으며, 날이 저물자 그곳을 포위하였다. 동이 트고, 요군이 포위를 뚫어 달아나자, 그들을 쫓아 아루강(阿婁岡)까지 갔다. 요나라 보병을 모두 죽였고, 농기구 수천개를 노획하여 군사들에게 나누었다. 이번 전쟁에서 요나라 사람들은 본래 둔전(屯田)을 가꾸어 전투와 방어를 겸하려고 했는데, 그런 까닭에 농기구까지 획득했다.



                                               흑룡강성 조원현(肇源縣)의 출하점대첩(出河店大捷) 기념비
                                               아골타는 이곳에서 3700 병력으로 요군 10만을 격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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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박이 다 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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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량(後梁) 태조(太祖) 주전충(朱全忠)하면, 당제국(唐帝國)을 찬탈해 5대(五代)시대의 본격적인 개막을 스타트한 장본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주전충 자신은 본래 황소(黃巢)의 휘하 무장으로 비적 출신이었으며, 주전충 정권 자체가 황소군단에서 명패만 바꾼 것에 다름아닌 탓에 후세의 평가는 별로 좋지 않았다. 실제로, 후량왕조는 종실 구성원들 사이에 살벌한 기풍이 강한데다, 교양이 부족하여 치자(治者)로서의 자격이 부족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주전충의 숙적 이극용(李克用)-이존욱(李存勗) 부자가 세운 후당(後唐)은 대당제국(大唐帝國)의 계승자를 자임했던 만큼 후량을 역적으로 규정했고, 북송시대에 편찬된 사료집 <책부원귀(冊府元龜)>에서도 후당 이후의 4대왕조는 정통으로 간주하지만, 후량에 대해선 참위부(僭僞部)로 분류하여 차별을 명확히 했다.

이같은 태생적 한계와 혹평에도 불구하고, 반면 주전충의 재평가도 음미해 볼만한 대목이다. 만당(晩唐)시대 내내 궁정(宮廷)의 암적 존재로 군림해 온 환관세력을 일거에 숙청시킨 점이라던지, 당조의 귀족정치하에서 상대적으로 등용되지 못한 채 불우한 상태에 놓여있던 하급사인(士人)을 발탁해 과감하고도, 현실주의적인 시책을 펼쳐갔다는 지적이 그것이다. 후량 정권에 등용된 하급사인 대다수는 당조말기, 과거시험에 낙제하여 당나라에 애착을 지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명분과 허례를 싫어하는 현실주의자들이었다. <통감(通鑑)>에 기재된 에피소드로, 주전충이 즉위하기 직전 개봉(開封) 교외의 어느 버드나무 밑에서 휴식을 취할 때였다. 버드나무를 바라본 주전충이 혼자서 '이걸로 수레를 만들어야 한다'며 중얼거리자, 앉아있던 유객(遊客) 몇몇이 맞장구를 치며 지껄였다.

그러자, 주전충은 갑자기 언성을 높이더니 '서생(書生)이 구미에 맞춰 사람놀리기 좋아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병신같은 놈들, 수레는 반드시 느릅나무를 끼워서 만들어야 하거늘, 어찌 버드나무로 만든다는 게냐?!'라고 외치며 장사(壯士)들에게 시켜, 유객들을 그자리에서 곤봉으로 쳐죽였다고 한다. 수레의 재료가 어떤 나무인지 기본적인 이치조차 모르면서 실생활에 도움되지 않고, 남에게 훈수두길 좋아하며, 고상한 척하는 인텔리야말로 주전충에겐 경멸스럽고, 혐오가는 존재였던 것이다. 당나라 최후의 귀족관료 30여명을 '탁류(濁流)'에 빗대어 황하에 수장시킨 '백마(白馬)의 화(禍)'도 그의 반당(反唐)의식과 인텔리 계층에 대한 혐오감이 반영된 결과였다. 그처럼 좋고 싫음이 분명한 성격에다, 과격했다는 주전충에게 즉위 당시의 또 한가지 재밌는 일화가 있다.

당나라 마지막 황제 소선제(昭宣帝, 哀帝)로부터 선위받아 등극한 주전충은 개봉 궁전의 현덕전(玄德殿)에서 크게 연회를 열어 신료들과 더불어 춤추고, 먹고 마신 연후에 종실 인척들을 모아 주사위로 도박을 즐겼다. 술이 거하게 무르익자, 주전충의 친형인 전욱(全昱)이 주사위를 던져 술병을 깨뜨리고 눈을 부릅뜬 채 경고했다.


"주삼(朱三, 셋째라는 뜻)아! 너는 본래 탕산(碭山)의 일개 백성으로 황소를 따라 도적이 되었다. 그럼에도 천자께선 너를 4진(四鎭)절도사로 삼아 부귀가 극에 달했건만, 어떻게 하루아침에 당가(唐家) 3백년 사직을 멸망시켜 스스로 제왕을 참칭하느냐?! 그 행동으로 보아 마땅히 멸족당할 것이니, 도박이 다 뭐냐!"


연회는 곧바로 해산되었으나, 형의 일침으로 주전충의 성장 배경이 들춰져 망신당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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