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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협정의 허실(虛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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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협정은 '베트남 포기'를 전제로 한 조약이었다. 요란스럽게 떠들어 온 '명예로운 평화'란 미사여구의 배후엔 전쟁에서 발을 빼기 위한 속셈이 있었다. 전사상(戰史上)으로 보아서 닉슨이 실천하였듯이 지상군 50여만을 투입했다가, 철수할 시엔 그만큼 많은 각오를 다졌던 셈이다. 특히나, 닉슨독트린이 아시아 대륙에서의 철수를 기본으로 삼았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파리협정이 정치적 기초로서 크게 변모한 것은 미국의 '도미노 이론' 포기였다. 도미노 이론은 베트남이 무너질 경우엔 인도지나 전체가 넘어가며, 인도지나가 붕괴되면 동남아시아가, 더 나아가 태평양정책의 핵심인 일본열도란 복합기지가 위협받는다는 식이다. 결국, 도미노 이론의 핵심은 미국의 대일(對日)정책과 관련한 것인데, 그러나 현재는 도미노 이론을 포기할 만한 충분한 사유가 있다.

우선, 베트남을 포기, 장기적 안목에서 크메르 ・라오스를 포함한 인도지나반도를 하노이가 석권하더라도 민족주의적 경향이 강한 사회주의 국가로 변모할 가능성이 높으며, 이는 도미노 이론에서 주장하듯이 곧 동남아 전체를 위협하지는 않으리란 예상에서다. 또한, 국내 공산좌익세력을 숙청, 우경화된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정권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도미노 이론은 효력이 떨어진다.


                                 1973년 1월 27일, 파리평화협정에 서명하는 트린(Trinh) 북베트남 외상



미중(美中)간의 상호 핵(核)분리 및 정치적 타협은 태평양에 대한 중공의 군사적 위협을 정치적으로 제거함으로서, 도미노 이론의 완전한 수정을 의미했다. 즉, 파리협정의 기초발상은 베트남을 어떻게 포기하는가란 '방법'에 촛점을 맞춘 것이었다. 당장, 군사적으로 '현(現)위치 휴전'이란 전선(戰線)없이 표범형 반점 모양으로 구성된 상태에서 미국이 철수할 동안만은 '멈추어달라'는 형식이었다.

도대체,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더라도 게릴라전에서의 휴전이란 불가능하다. 73년도 협정은 54년도 협정보다도 더욱 악화된 것으로 54년 당시엔 특정지점으로 병력을 재집결, 적어도 17도선을 규정하여 정치 ・군사분계선을 확실시했으나, 73년도엔 '현재위치 휴전'이란 휴전선 없는 휴전을 떠넘겼다. 또한, 17도선을 남하한 월맹 정규군의 철수를 조항화시키지 않았던 점도 치명적이었다.

정치상 마무리 역시 베트남 포기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공산측의 '잠정연립정부'안(案)에 대해서 미국은 '선거관리위원회'를 주장, 그 타협점으로 나온 '민족화해위원회'를 통하여 '남부 베트남의 양(兩) 당사자'인 사이공 정부와 베트콩이 해결토록 조치했는데, 베트콩 철수가 보장되지 못한 마당에 사이공을  고스란히 바쳐버린 꼴이었다. '당사자주의'를 엄격히 적용, 미국은 발을 빼고자 의도했던 것이다.


                                            1950년대 전반, 도미노 이론(Domino Theory)의 개념도



군사조약인 동시에 무리하게 정치적 해결방안마저 포함된 파리협정은 사실상, 애시당초 누구도 준수할 수 없는 '휴지조각'이었다. 재차 강조하지만, 파리협정은 미국이 어떻게 정치 ・군사적으로 빠져나오면서 체면을 유지하는가 하는 방법론적인 구상에서 성립된 총결산이다. 협정에서 나타난 핵심은 역대행정부를 지배한 도미노 이론의 수정에서 기원된 남베트남의 희생이었다 할 수 있겠다.

아시아 대륙의 변경기지를 포기한다던지, 72년도 '안전보장 소(小)위원회'가 내린 결론에서 보듯이 모국이 공산화되더라도, 미국에 위협적이란 이론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사실로부터 파리협정 발상을 가늠하고도 남는 것이다. 미국의 국익(國益)에 결정적이라 판단될 경우에 한해서만 군사개입을 허용하며, 그 반대의 경우라면 과감히 포기한다는 전략들이 기존의 도미노 이론을  대체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미국의 발상엔 대륙변경기지에서 공산당을 봉쇄한다는 군사전략 대신, 해군력을 바탕으로 일본과 한반도, 동남아 도서(島庶)국가 뿐만 아니라, 대륙까지도 통제하는 '도서수로(水路) 전략'이란 새로운 전환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베트남 평화협정은 미국의 인도지나 패퇴에 따른 손실을 재정비, 제해권을 내세워 아시아 방어선을 수호한다는 대전환의 기점으로 집약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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